< 79화 >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한 번 집중하면 자력으로 빠져나오기 어렵다. 부모님이 말씀하시길 옆에 폭발이 일어나도 꿋꿋이 집중할 정도만큼 뛰어나다고.
하지만 마냥 장점이 될 수 없으며 상황에 따라 단점이 될 수도 있는 특징이다. 예를 들어 식사 시간이 된지도 모르고 몰입했다가 끼니를 거른 경우가 적지 않아 있었으며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무시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가급적 혼자만의 시간이 아닌 이상 집중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내가 손님방에서 독서에 집중하는 것도 나중에 세바스찬이 나를 부를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젊은 친구가 역사에 관심이 많군?"
"... ..."
"보통 제논 일대기를 읽는 편인데 말이지. 신기하군."
그리고 현재, 내 뛰어난 집중력은 장점이 아니라 단점으로 나타났다. 그것도 최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으로.
나는 코 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띈 채 나를 내려다 보는 중년인과 시선을 교환했다. 온화함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인상과 푸른빛이 감도는 새하얀 머리카락까지.
'신사'의 이미지를 표현한다면 딱 눈 앞의 남자를 내세우지 않을까. 그만큼 말끔한 외모와 더불어 양복이 매우 잘 어울렸다.
'...어?'
칭찬인지 아니면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건지 모를 남자의 말도 잠시, 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어 양 옆을 번갈아봤다.
정갈한 자세로 기립해 있는 세바스찬과 어딘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주인이자 마리의 아버지, 레킬리스 공작이 손님방에서 쉬고 있던 나를 직접 찾아왔다.
'뭐, 뭐야? 응접실은 놔두고 왜 직접?'
세바스찬이 나를 데리고 온 곳은 응접실이 아니라 손님방이다. 손님들이 보다 편히 쉬기 위해 집주인이 마련한 공간이며 다양한 즐길거리가 있는 일종의 휴게실.
만약 저택의 주인이 손님을 보고 싶다면 손님방에 직접 찾아오지 않고 고용인을 시켜 응접실로 초대해야 정상이다. 나 또한 그 부분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 놓고 책에 집중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레킬리스 공작은 그러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응접실로 초대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행차했다.
물론 집주인이 직접 손님방으로 찾아온다고 무례를 저지른 건 아니다. 사정상 격식을 차릴 수 없다면 지금처럼 직접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만 레킬리스 '공작'이 그럴 줄은 몰랐다는 것이 내 실수였을 뿐. 내 고유의 집중력이 단점으로 승화된 상황이다.
"독서에 집중하고 있던 것 같은데 방해했다면 내 사과하지."
실타래처럼 머릿속을 하나 둘 씩 정리하는 도중, 레킬리스 공작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딴에는 조곤조곤하게 말했겠지만, 울림통 자체가 큰 건지 몰라도 성량이 상당히 큰 편이었다.
그 덕분에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던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머릿속이 깔끔해지니 현재 상황을 더 정확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
나는 얼어붙었던 몸을 곧바로 해동시키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한 번 무례를 저질렀는데 두 번이나 저지를 수는 없는 법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의 키가 세바스찬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마리의 키가 어디서 왔나 했는데 유전이었던 모양이다.
일단 쓸데없는 잡념은 뒤로 하고, 나는 쩔쩔매며 그에게 사과했다.
"아, 아닙니다. 공작님이 오셨는데도 눈치채지 못 한 제 잘못이 큽니다."
"그럼 사과를 받은 걸로 알겠네. 젊은 친구가 그만한 집중력을 가진 것도 신기하군."
딴에는 칭찬처럼 들리겠지만 적어도 내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
가문의 어르신이 왔는데도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놈팽이라고. 실로 아찔함이 드는 순간이지 않을 수 없다.
본래 첫 인상이 오래 가는 법인데 첫 인상부터 말아먹게 생겼다. 나는 속으로 자책하며 다시 한 번 사죄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하하하.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된다네. 놀리는 게 아니라 칭찬이었으니까."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린 레킬리스 공작은 뒤이어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흰색 장갑이 씌워져 있는 손에 시선이 갔을 때 쯤, 레킬리스 공작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아까 전보다 한층 더 부드러워진 말투다.
"만나서 반갑네. 알고 있겠지만 레킬리스 공작가의 가주, 드미트리 하우젠 레킬리스라고 한다네. 마리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기도 하지. 우리 저택에 온 걸 환영하네."
"마, 만나서 영광입니다. 마이샬 가문의 차남, 아이작 듀커르 마이샬이라고 합니다."
"흠. 마이샬 가문이라..."
내가 공손하게 악수를 받으며 자기소개를 하자 레킬리스 공작, 드미트리는 내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붉은 머리카락이 흔치 않은데다가 내 아버지인 호크를 떠올리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혹시 자네 아버지 성함이 호크인가?"
"네. 맞습니다."
"재미있군."
뭐가 재미있다는 거죠. 실시간으로 타들어가는 내 마음과 달리 드미트리는 싱긋 웃었다.
맞잡은 손에 힘을 강하게 주는 걸 보면 미묘한 압박감을 심어주려는 것일 수도.
내가 속으로 쓴웃음을 흘리자 드미트리는 손에 힘을 빼면서 악수를 풀었다. 나는 악수를 풀자마자 욱신거리는 손을 뒤로 숨기고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분명 나와 같은 문과일텐데 기본적인 악력이 장난 아니다. 원래 어른들이 힘이 세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 아프다.
"우선 내가 왜 직접 손님방에 온 건지 궁금해 할 수도 있겠군. 사실 내 부인이 지금 응접실을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다네. 다른 한 곳은 리모델링 중이라 사용할 수가 없고."
"그, 그렇군요."
"일단 자리에 앉도록 하지. 보아하니 독서에 몰두하느라 다과에는 손도 안 댄 것 같군."
실제로 내가 앞의 테이블 위에는 다양한 먹을거리가 놓여있었다. 네모반듯한 비스킷부터 시작하여 아직까지 김이 모락모락 풍기는 차까지.
아무래도 독서에 집중하는 동안 하녀가 잠시 왔다 간 모양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드미트리가 꺼내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찌르는 기분이다. 안 그래도 여자친구의 아버지라 더욱 쫄릴 수밖에.
"세바스찬은 내가 부를 때까지 밖에서 대기하게. 그리고 마리는 옆에 앉고."
"알겠습니다. 필요하시면 호출해주십시오."
드미트리의 지시에 세바스찬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방 밖으로 나갔고, 마리는 아무 말없이 발을 옮겨 내 옆자리에 앉았다.
슬쩍 마리를 힐끔거리니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까 내가 저지른 추태 때문에 저런 표정을 지은 것 같다.
괜스레 미안해져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였다.
"일단 이거 하나만 바로 묻도록 하지. 내 딸과 무슨 관계인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훅 치고 들어왔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렸던 주먹을 꽉 쥐었다.
원래부터 딸바보의 냄새가 풍기던 드미트리여서 이정도는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니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런 질문하지 말랬잖아. 이미 집사장님한테 다 들었으면서."
내가 입을 떼지 못 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마리가 투정을 부렸다. 그녀를 바라보니 한 쪽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 팔짱을 끼는 중이다.
드미트리도 불만을 한가득 담은 딸의 질책에 너털웃음을 흘리고는 손을 앞으로 내저으며 본인이 먼저 사과했다.
"하하하. 이거 미안하군. 골리려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야. 내 딸의 말처럼 이미 집사장에게 이야기는 들었다네."
"아... 그러면..."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공작이라고 너무 긴장할 필요는 없어.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공작가는 권위주의와 많이 동떨어진 편이거든. 그러니 자네가 내 딸아이와 사귀는 건..."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드미트리는 입을 꾹 다물더니 눈매를 좁혔다.
"...안 되겠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용납할 수 없는 문제야."
"아빠!"
"물론 농담이란다, 마리."
농담이 전혀 농담 같지가 않다. 나는 아빠와 딸의 기싸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허리만 꼿꼿하게 펴고 있을 뿐이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편하게 만드려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귀족, 그것도 백작급 이상이었다면 딸이 남작가 영식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노발대발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드미트리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중간중간 농을 던지면서 분위기를 풀어보려 시도하는 중이다. 마리도 그가 장난을 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어서 저리 격하게 반응하는 것일테고.
배려를 하는 건 좋지만 배려를 받는 입장으로서는 다소 난감한 상황이다. 비록 선을 확실하게 긋긴 했지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으니.
지금은 가급적 공작이 하는 질문에만 대답을 하는 게 현명한 선택지일 것 같다. 나는 주먹 쥔 손에 땀이 흥건해지는 걸 느끼며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혹시 우리 저택에서 하룻밤 머물고 갈 생각인가?"
"...아뇨. 오늘은 방문을 목적으로 온 겁니다."
"흠. 알겠네. 그런데 내가 알기론 마이샬 영지는 수도에서 마차로 10시간 이상 걸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괜찮겠나? 정 안 되면 하룻밤 머물러도 상관없네."
"호의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점심을 먹기 전에 출발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런가? 그거 참 아쉽군."
아쉽다고? 오히려 다행이라 여겨야 하지 않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딸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뉘앙스를 풍기던 양반이 어째서 태도를 바꾸었는지 살짝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내 눈빛을 읽었는지 드미트리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별 이유는 없다네. 최근에 내 딸아이가 저택에 초대한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렇거든. 그것도 남자를 말일세."
"...아빠."
이제는 마리의 목소리가 스산해졌다. 옆에 있는 내가 다 흠칫거릴 정도로 은은한 분노가 실려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미트리는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곧바로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딸아. 내가 너무 심했니? 화가 났다면 사과하마."
"앞으로 그런 말 좀 하지 마세요. 얘가 얼마나 긴장하겠어요? 어머. 이 땀 좀 봐."
마리는 나를 위로해주면서 무릎 위에 올렸던 내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땀도 땀이지만 그녀가 내 손을 잡자마자 드미트리의 눈 밑이 살짝 꿈틀거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걸 멕인다고 표현하는 걸까. 나는 마리의 부드러운 손을 잡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상 애인 관계라고 간접적으로 선포하는 거나 다름없는지라 여러모로 곤란했다.
"...뭐,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가 네 스스로 선택했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 아빠는 네 선택을 존중해주마."
"고마워요."
"단, 조건이 있다."
훈훈함이 흐르는 것도 잠시, 조건이 있다는 드미트리의 말에 분위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나는 안도하려는 찰나 그의 말을 듣자마자 긴장의 끈을 다시 붙잡았다.
이어서 드미트리는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우리의 손을 바라보다가 내 얼굴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흥미로운 대상을 관찰하는 듯한 푸른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는 중이다.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마리조차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고 있을 쯤, 드미트리가 싱긋 웃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허나 울림통이 커서 조용히 말하는 것조차 크게 들렸다.
"전에 마리가 보내 준 편지를 본 적이 있다네. 마리가 그토록 싫어하던 역사를 가르쳐 준 장본인이 자네라더군. 내 말이 맞는가?"
"부족한 실력이지만 맞습니다."
"겸손을 유지할 필요는 없네. 오히려 마음에 드니까. 우리 레킬리스 가문은 역사를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거든. 역사는 과거와 대화하고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수단이니까 말일세."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드미트리가 꺼낸 말은 전생에 있던 명언과 놀라울만치 똑같았다.
그만큼 레킬리스 가문은 대대로 역사를 우선 순위로 두었다는 의미다. 레킬리스 가문에게 역사란 신념이면서 동시에 명예일 것이리라.
"남을 가르친다는 건 그만큼 폭넓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니 언제, 어디서,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한 건 묻지 않겠네. 이건 기초 중의 기초니까 말이야. 대신 다른 질문을 꺼내도록 하지."
"...네."
"보아하니 자네는 펜을 오래 잡은 것 같더군. 아닌가?"
드미트리는 그리 말하면서 턱짓으로 내 손을 가리켰다. 아무래도 내 중지 손가락에 난 펜혹을 알아챈 듯했다.
이에 내가 버릇적으로 중지 손가락의 펜혹을 문지르고 있을 때, 드미트리가 나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똑같이 '펜을 잡는 사람'으로서 하나 묻도록 하지. 역사적으로 펜을 쥔 사람들은 칼을 쥔 사람들을 휘하에 놓았다네."
"...맞습니다. 반대로 칼이 강해지면 쿠데타가 발생해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워지죠."
"정확히 알고 있구만. 그러면 여기서 질문하겠네."
잠깐 말을 멈춘 드미트리는 나를 샅샅이 파헤치겠다는 듯, 예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는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포식자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있었다.
여기서 물러났다간 기세에 억눌려 말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러니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뒤이어 쥐 죽은 듯한 고요함 속에서, 한참동안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드미트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약 그 펜을 쥔 사람이 국가를 넘어 세상마저 바꿀 수 있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 ..."
"가만히 방관하고 있을건가, 아니면 막기 위해 대항할텐가?"
나는 그 질문에 한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둘 다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지?"
여기서 드미트리가 모르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나는 이 세상보다 사회적으로 진보된 문명에서 태어나 자란 환생자라는 것을.
"역사가 그걸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둥이를 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