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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님! 그렇지 않아도 보고드릴 것이 있어 로하스관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아몬이 엘레나를 반기며 그간의 작업 진행 상황을 보고 하였으나, 엘레나는 도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보의 끄트머리가 걸치게 되어 불안정했었는데 순서를 바꿔서 이동시키면 딱 맞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이 하루 정도 늦어질 수는 있는데 괜찮을까요? ……엘레나 님? 엘레나 님?”
“아, 뭐라고…… 했지?”
“전에 말씀드린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잘됐네.”
“그럼 일정은 하루 정도 늦춰도 될까요?”
“그래.”
엘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몬은 기대와 다른 반응에 살짝 실망했다.
‘분명 기뻐해 주실 줄 알았는데.’
아까부터 엘레나는 뭔가 불안해 보였다.
아니면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보고를 듣고 있지만, 눈동자는 자주 다른 곳을 향했다.
“혹시 누군가를…… 찾으십니까?”
“아니야.”
엘레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럼, 아까 문제는 해결된 거지?”
“네, 한 번 돌아보시겠어요?”
“그래.”
신전 건축 진행 사항을 살펴보고 나오자,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엘레나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로하스관으로 돌아왔다.
엘레나가 들어가자, 비비안이 달려 나왔다.
“엘레나 님, 늦으셨네요.”
엘레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비안의 얼굴을 살폈다.
“배고프시죠? 얼른 식사 하셔야죠.”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래. 곧 내려갈게.”
엘레나는 침실에 가서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손에 묻은 먼지를 씻고, 거울을 보았다. 멍한 눈의 얼굴은 누군가를 애타게 여인의 얼굴이었다.
‘치유력 때문이야, 오늘이 마지막 밤이잖아. 단지 그거뿐이야.’
엘레나는 거울을 치우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식당으로 내려갔다.
일부러 밝게 웃으며 비비안과 대화도 하고, 스튜도 고기도 잔뜩 먹었다.
식사를 마시고, 엘레나는 바로 일어섰다.
“또 일하시려고요?”
“그래야지.”
“차랑 다과를 가져다드릴까요?”
“저녁을 많이 먹었더니, 괜찮아. 먼저 자렴.”
엘레나는 일감을 잔뜩 안고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 문이 닫히고 비로소 혼자 있는 시간이 오자, 엘레나는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오늘은 안 오는구나.’
안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섭섭한 마음이 잔뜩 쌓였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가득했지만, 엘레나는 칼립소에 대한 생각으로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 * *
칼립소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황궁 뒤에 있는 옥타인 산으로 밤 사냥을 떠났다.
옥타인 산은 로하스관 뒤로 이어져 있었다.
심정적으로 엘레나와 가까이 있다는 것이 조금 위안이 되었다.
“와!”
오랜만에 벌어지는 밤 사냥에 대원들이 함성을 높였다.
오늘따라 왠지 칼립소의 기세는 험악했다.
첫 번째로 날카로운 뿔을 가진 멧돼지를 잡자, 함성이 더 커졌다.
사냥감은 계속 늘어갔으나, 그만큼 칼립소의 기분은 가라앉았다.
데릭은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을 보며 그런 칼립소의 기분을 짐작했다.
데릭은 칼립소의 밤 사냥 행을 찬성했다.
치유력을 영원히 되찾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그녀를 길들이는 일이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마음이 복잡하시겠지만, 이번 기회로 엘레나를 완전히 정부로만 대하기를 데릭은 간절히 바랐다.
밤이 되자 숲은 더 어두워졌다.
비록 보름이었으나, 오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있어 은은한 빛만 돌 뿐이었다.
대원들의 움직임도 더욱 조심스러웠다.
“으앗!”
뒤를 따르던 이들의 비명 소리에 칼립소가 뒤를 돌았다.
슈우욱.
비명 소리의 원인을 발견하자, 칼립소는 곧바로 활을 쏘았다.
이브뱀의 눈에 명중하며, 몇 번을 꿈틀거리다 사라졌다.
“데릭, 히르타인이 케이타 제국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확실해?”
얼마 전, 엘레나와 함께 있을 때도 나왔던 이브뱀이었다.
그 이후 데릭에게 히르타인의 입국 여부를 확인하라고 명했다.
“맞습니다, 폐하. 선대 황제 때부터 히르타인은 금하지 않으셨습니까? 국경을 맡고 있던 카토 공작이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그자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밀입국 쪽으로 다시 알아봐.”
“네, 폐하.”
칼립소는 꿈틀거리는 이브뱀에게 다가서더니 다시 한번 완벽하게 두 동강 냈다.
“폐하, 밤이 꽤 깊었습니다. 이만 사냥을 마치시겠습니까?”
“아니, 얼마나 됐다고.”
칼립소의 명에 모두 다시 산속 깊이 들어갔다.
“멧돼지다!”
첫 사냥 때보다 더 큰 멧돼지가 달려오자, 칼립소가 직접 나섰다.
검을 들고, 멧돼지와 뒹구는 칼립소의 모습은 흡사 맹수 같았다.
한참의 사투 끝에 커다란 멧돼지가 완벽하게 포획되었다.
스윽.
날카로운 발톱에 팔과 어깨가 긁혔으나, 칼립소는 아픔을 몰랐다.
“폐하, 다치셨습니까?”
“아니야.”
칼립소는 팔에 생긴 상처가 저절로 아무는 것을 지켜봤다.
한참을 상처를 보던 칼립소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봤다.
구름에 가린 달빛은 이제 희미한 빛만 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가볼까.’
칼립소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폐하, 사라타입니다!”
나무 사이로 은빛 여우 한 마리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꼬리가 세 개입니다!”
방금 지나간 건 사라타 종 중에서 특히 커다랗고 귀한 은빛 여우였다.
빠르기며 예민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다 분명 꼬리가 세 개였다. 그렇다면 사라타 종의 우두머리일 가능성이 높았다.
칼립소는 맹렬히 사라타를 추격했다.
전에 엘레나가 그 많은 선물은 다 제쳐놓고 여우 목도리를 침실 안에 두던 것이 기억났다.
‘저걸 잡아 줘야겠군.’
칼립소는 전속력으로 사라타를 뒤쫓기 시작했다.
* * *
커튼 사이로 비치는 달이 흐릿했다. 엘레나는 늦게서야 서재에서 나왔다.
오지 않는 이를 계속 기다리느니 차라리 잠이 드는 편이 나을 것이다.
엘레나가 침실로 돌아가려는데, 비비안이 다급하게 달려 왔다.
“엘레나 님! 지금 황실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황실에서?”
엘레나는 다급하게 비비안을 따라 응접실로 갔다.
황실에서 왔다는 시종은 엘레나를 보더니 엎드려 인사를 했다.
“엘레나 님, 황제 폐하께서 모셔오라는 분부십니다.”
“그래?”
“지금 당장 움직이셔야 합니다.”
가슴이 쿵쿵 뛰며, 엘레나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잠깐만 기다리게.”
시간이 꽤 많이 지났지만, 아직 보름밤이 남아있었다.
부르려면 진작 부르지.
새삼 그동안의 시간이 아까웠다.
엘레나는 서둘러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이아의 드레스가 아름답다고 했지.’
오늘밤, 칼립소에게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엘레나는 얼마 전 가이아에서 들어온 드레스를 골랐다.
하얀 드레스는 은사가 뒤섞인 레이스가 달려 있어 반짝반짝 빛났다.
입는 게 다소 번거로운 것이 흠이었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었다.
“비비안, 이것 좀 도와줘.”
“네, 엘레나 님.”
이번 드레스는 혼자 입기가 좀 버거웠다.
엘레나의 부름에 비비안은 빠르게 다가와 엘레나의 치장을 도왔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이대로 혼인식에 바로 들어가셔도 되실 것 같아요.”
순백색의 드레스는 마치 신부의 드레스를 연상시켰다.
“엘레나 님, 머리도 다시 꾸며드릴까요?”
“아니야. 괜찮아.”
욕심같아서는 머리도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었다.
아까운 밤이 가기 전에 칼립소와 최대한 함께 하고 싶었다.
대신 귀걸이는 빠르게 채웠다.
“하긴, 엘레나 님 머리카락은 워낙 반짝이고, 풍성해서 이대로도 너무 아름다우신 걸요.”
엘레나는 비비안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이미 시종이 현관에서 마차를 대기하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엘레나 님.”
“같이 타시죠.”
“저도요?”
비비안이 놀랐다.
“네, 어서 타세요.”
마부의 말에 비비안도 마차 안에 탔다.
“아마 내일 아침 시중을 들게 하시려나 봐요.”
비비안의 말에 엘레나가 조금 얼굴을 붉혔다.
비비안마저 마차를 타자, 마차는 빠르게 달렸다.
엘레나는 곧 칼립소를 볼 생각에 마음이 마차의 속도만큼 빨리 뛰었다.
덜컹, 덜컹.
빨리 달려서 그런지 마차의 승차감은 좋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린 비비안이 차장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그런데 엘레나 님, 왜 이 길로 들어서는 거죠?”
마차가 들어간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비비안이 잘 모르겠다는 어조로 물었다.
여기는 황궁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엘레나의 얼굴도 서서히 굳어갔다.
생각해보니 급한 마음에 확인도 안 하고 서둘러 로하스관을 떠났다. 아까 칼립소의 명을 전한 시종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너무 성급했어.’
보름이니 의심 없이 칼립소가 불렀다고 생각했다.
덜컹.
뜬금없는 길목에서 마차가 세워졌다.
당황한 비비안의 눈을 보며, 엘레나는 얼굴도 굳어졌다.
* * *
“앗! 놓쳤습니다.”
대원이 아쉽게 탄식했다.
“섣불리 화살을 쏘지 마.”
눈을 정확히 쏘아야 가죽을 온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칼립소가 책하자, 친위대원이 고개를 숙였다.
꼬리가 세 개 달린 사라타라 그런지 빠르기가 보통의 종보다 배가 빨랐다.
‘은빛 사라타를 잡아주면 엘레나가 좋아해줄까.’
화려한 꼬리로 만든 목도리를 보면 보름에 오지 않은 자신을 용서해줄까.
“폐하, 저기 있습니다!”
대원의 말에 칼립소는 활을 높게 들었다.
칼립소는 정신을 집중하여 침착하게 조준하고, 발사했다.
하지만, 예민한 사라타는 눈치채고 화살이 오기 직전 달아나기 시작했다.
“잡아라!”
칼립소는 다시 날렵하게 사라타를 쫓기 시작했다.
막다른 절벽에 이르자, 사라타가 어디에 숨었는지 알 수 없었다.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필 무렵, 팔랑거리면서 절벽 아래의 꽃이 흔들렸다.
“저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