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칼립소가 절벽 아래를 흘낏 봤다.
절벽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하자, 뒤늦게 따라온 데릭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만류했다.
“폐하! 혹시 직접 내려가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래. 왜?”
“밤이 깊었습니다. 이곳 절벽은 가파르고 미끄럽습니다. 다른 대원들에게 임무를 맡기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비켜.”
칼립소는 데릭의 의견을 무시하고 절벽 아래로 날렵하게 내려갔다.
‘휴우.’
데릭은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자신의 말을 들어 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절벽 아래로 스산한 기운이 올라왔다.
하필이면 안개까지 끼어서 절벽은 더욱 미끄러워 보였다.
어느새 밑까지 내려갔는지 칼립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데릭 경, 제가 내려가 보겠습니다.”
친위대장인 라이언이 자청했다.
데릭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절벽 아래에서 칼립소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은빛 여우의 목을 쥐고,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서 절벽을 가뿐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폐하, 무사하십니까?”
“쓸데없는 소리.”
칼립소가 잡은 것은 사라타 중에서도 보기 드문 우두머리였다.
크기도 크고, 빛깔도 고운 것이 여간 귀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탐스러운 세 개의 꼬리는 흐린 달빛에도 반짝이며 빛났다.
“……화살을 쏘지 않으셨네요.”
“생포했다.”
칼립소는 사라타의 목을 흔들어보았다.
힘이 빠진 채로 사라타의 목이 가르랑거리며, 흔들렸다.
보기 힘든 종이니만큼 바로 목도리를 만드는 것보다 살아있는 채로 보여주고 싶었다.
“폐하, 역시 대단하십니다.”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모두의 함성에 칼립소가 손을 높게 들었다.
“사냥을 이만 철수한다.”
칼립소의 말에 비로소 친위대는 황궁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말에 올라탄 칼립소는 친위대와 방향을 달리했다.
“폐하, 어디로 가십니까?”
데릭이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먼저 궁으로 돌아가. 짐은 로하스관으로 갈 테니.”
“네?”
데릭의 놀란 얼굴을 뒤로하고 칼립소는 전속력으로 말을 달렸다.
안장에는 사라타가 흔들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엘레나!’
지나간 밤이 아깝기만 했다.
절벽을 내려가 사라타를 잡는 순간, 칼립소는 깨달았다.
엘레나가 원하는 건 사라타가 아니라는 것을.
‘원하는 것을 주지도 못하면서 무슨 좋아한다고.’
칼립소는 자신의 비겁함을 자책하며, 힘껏 말을 몰았다.
다행히 보름밤이 지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칼립소는 더욱 속도를 냈다.
설령, 이 밤을 끝으로 그녀와 다시는 같이 밤을 보내지 못하더라도.
선택은 엘레나에게 맡겨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거니까.
“이럇!”
마음이 급한 칼립소는 말을 더욱 거칠게 몰았다.
결국 이렇게 갈 것이었으면, 오늘 동이 틀 무렵부터 로하스관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귀한 시간을 헛되이 보낸 후회가 뒤늦게 밀려왔다.
좀처럼 후회를 하지 않는 편인 칼립소이지만, 유독 엘레나와의 문제에서만큼은 후회할 일이 많이 생겼다.
이제 더는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겠다며 칼립소는 전속력으로 말을 몰았다.
* * *
마차가 멈추자, 엘레나와 비비안은 긴장했다. 멈춘 마차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나가볼까요?”
마차 문을 열려고 하는 비비안을 엘레나가 만류했다.
“가만히 있어 봐.”
엘레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신중하게 마차 밖의 기색을 살폈다.
하나, 둘, 셋.
주변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그 때, 마차 문이 열리고, 마부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엘레나를 바라봤다.
“내리시죠.”
“여기서 말이냐?”
“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비안이 서둘러 나가려 하자, 엘레나가 제지했다.
“내가 먼저 나갈게.”
엘레나는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마차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인적이 드문 산길이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폐하는 어디 계시지?”
“따라오세요.”
엘레나는 길 위쪽에 있는 검은 무리를 보는 순간, 확실하게 느꼈다.
‘함정이다!’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뒷길 역시 한 무리의 사내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다.
“엘레나 님.”
비비안이 달달 떨며 엘레나의 팔을 꼭 잡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별일 아닐 거야.”
엘레나는 비비안을 토닥이며 달랬다.
그 때,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8척에 긴 장발,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몸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이는 히르타인이었다.
“은빛 여우?”
“넌 누구지?”
“그걸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요?”
사내는 엘레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징그러운 시선에 엘레나는 몸을 흠칫 떨었다.
“은색 머리카락, 보랏빛 눈, 가이아 제국의 황녀가 맞죠?”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은 사내가 긴 칼을 꺼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먼 섬에서도 소식은 들었죠. 은빛 여우라고 불리는 여전사가 있다고.”
“네놈을 누가 보냈지?”
“그런 건 알 필요 없습니다. 황녀님은 얌전히 목숨이나 내놓으면 됩니다.”
몇 명이나 될까?
엘레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하나, 둘, 셋……. 열?
“조심해, 요타. 저래 봬도, 검을 잘 써.”
8척 장신의 뒤로 한 사내가 나왔다.
“저런 차림으로? 무기도 없잖아.”
“그래도 조심해.”
“히쟌, 넌 너무 겁이 많아. 검보단 얼굴에 볼만하네. 그 안의 것은 더 굉장할 거 같고. 그냥 죽이긴 아까워.”
“쓸데없는 소리 작작해. 그냥 우린 목만 가져가면 돼. 선수금이 어마어마한 건 잊지 않았지?”
“알아.”
요타라고 불린 자가 휘파람을 불자, 뒤편의 사내들도 검을 들고 엘레나 주변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시작해.”
요타의 지시에 따라 사내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엘레나를 향해 가차 없이 휘두르는 검날을 몸을 숙여 피했다.
낮춘 자세로 흙을 집어 든 엘레나는 상대의 눈 주위로 뿌렸다.
“으, 윽.”
당황한 찰나를 놓치지 않고, 명치를 가격한 후, 검을 빼앗았다.
최대한 빠른 동작으로 검이 급소를 찌르자, 검을 뺏긴 사내의 무릎이 꺾였다.
그 뒤로는 엘레나의 독무대였다.
검을 가진 엘레나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드레스를 입고 있기는 하나 엘레나는 본디 전장을 누볐던 무장이었다.
춤을 추듯 휘날리는 엘레나의 검에 사내들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엘레나의 기세에 사내들은 주춤거리며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한 무리가 쓰러지자, 앞에서 지켜보던 히쟌이 나섰다.
히쟌이 휘두르는 검을 엘레나는 허리를 뒤로 젖혀 날렵하게 피한 후, 다시 허리를 낮춰 안으로 파고들어 급소를 정확하게 찔렀다.
“헉.”
울컥 피를 토하며 쓰러진 히쟌의 뒤로 또 다른 놈들이 다가왔다.
‘대체 몇 명이야.’
한 번에 밀려오는 무리 덕분에 엘레나의 검이 바빠졌다.
하필이면 레이스가 많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오는 통에 활동에도 많은 제약이 있었다.
“헉.”
엘레나는 팔을 감쌌다.
하얀 레이스 사이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팔뿐 아니다.
수많은 검들이 스친 탓에 허리나 다리 근처에도 곳곳에 붉은빛이 번졌다.
“내가 나서야겠군.”
요타가 긴 검을 꺼내 들었다.
“그래, 와라.”
엘레나가 자세를 바로 했다.
요타는 커다란 검을 가지고 돌격했다. 하지만 재빠르게 피하는 엘레나에게 닿지 않았다.
치열한 두 사람의 결투가 시작되었다.
검술로 따지자면, 엘레나가 한참 위였으나, 체력이 문제였다.
“학, 학.”
엘레나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치유력만 있었다면…….’
아쉬웠다.
그제야 자신의 검 실력에 치유력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깨달았다.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날 선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적막한 산속을 살벌하게 울려댔다.
“역시, 보통이 아니구나.”
그 많은 놈들을 상대하고도 자신의 공격을 너끈하게 막아내는 상대에게 요타는 경의라도 표하고 싶었다.
“네놈의 평가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엘레나는 검을 고쳐 쥔 후, 땅을 딛고 펄쩍 뛰었다. 순식간에 요타의 뒤로 간 후, 뒷목을 가격했다.
“악”
쓰러진 요타의 목에 엘레나가 칼을 대었다.
“말해, 누가 보냈는지.”
그 때였다.
“아악! 엘레나 님!”
잠시 잊고 있던 비비안의 비명이 높게 들렸다.
엘레나의 칼에 쓰러졌던 히쟌이 비비안의 목에 칼을 댄 것이다.
“비비안!”
“검을 버려. 안 그럼, 이 여자가 죽는다.”
“비비안을 풀어줘. 상관없는 여자야.”
“먼저 검을 버려.”
비비안의 눈에선 눈물이 떨어졌다.
“사…… 살려 주세요.”
히쟌이 비비안의 목에 더 가까이 칼을 댔다.
“악……!”
비비안의 목에서 피가 조금 배어나왔다.
“셋, 셀 동안 검을 버리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하나, 둘.”
엘레나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검을 내려놨다.
그리고는 허리를 펴서 양손을 들고 히쟌을 바라봤다.
“검을 내려놨으니, 비비안을 풀어 줘.”
“가까이 와.”
한 걸음.
두 걸음.
엘레나가 두 손을 들고 히쟌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바로 한 걸음 앞이었다.
“좀 더 가까이”
히쟌의 말대로 엘레나가 걸음을 옮기자, 비비안을 확 내쳤다.
“비비안!”
엘레나가 비비안의 향해 고개를 숙인 사이, 히챤이 그녀의 복부를 찔렀다.
“하악.”
깊게 찔린 상처에서 피가 울컥 나왔다.
“으…….”
엘레나의 무릎이 꺾였다.
“이제 끝내야겠군.”
히쟌이 피 묻은 검을 높게 들었다.
* * *
로하스관에 도착한 칼립소는 당황했다.
로하스관에는 엘레나가 없었다.
대신, 남아 있던 시종이 쩔쩔매며 칼립소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엘레나 님은…… 폐하께서 부르셔서.”
“내가?”
“예…… 황궁에서 마차가 왔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칼립소의 노성이 하늘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