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엘레나가 있을 때, 친위대의 장은 아들라스 공이 맡고 있었다.
경력도 실력도 뛰어난 이였다.
황실의 친위대는 들어가기도 힘들뿐더러, 장이 되기는 더욱 힘들었다.
안토니안이 친위대에서 근무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젊은 시절 잠깐이었다.
그 자리에 바로 안토니안이 올라갔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드하야 즙 문제는 제대로 해명했을까?’
유야무야 넘어갔을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마지막 모습 역시 뒷수습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모습이었으니.
“안토니안 님의 전언을 보시겠습니까?”
“나에게 직접 온 건가요?”
“네. 밀서로 봉해왔습니다.”
노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일이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노아.”
“네, 황녀님.”
“칼립소 황제가 나에게 본국과의 소통을 금한 것을 알고 있나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 일에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겠네요.”
“각오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눈빛은 명료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었다.
비록 케이타 제국에서의 생활이 편안해지고, 뜻을 펼치기 좋지만 조국은 조국이었다.
조국이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히 황녀님을 위해서라면 이깟 목숨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노아의 결연한 표정을 본 엘레나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목숨은 좀 더 가치 있는 일에 써야죠. 왜 이런 위험한 짓을 하죠?”
“하지만…….”
“지금 가이아 제국과 케이타 제국은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며 협력관계로 가고 있어요. 전쟁의 위험 없이 양국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지요. 굳이 무리를 해 가며 이런 비공식적인 통로로 전언을 받을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저희는 굴욕적인 협정을 맺었습니다.”
“그야 전쟁에서 졌으니까요.”
엘레나가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이 관계가 가이아 제국에 불리하기만 한가요? 이런 갈등을 만들만큼?”
엘레나의 물음에 노아는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안토니안에게는 공식적인 통로를 이용하라고 전하세요.”
밀서의 내용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예전의 드하야 즙의 사건을 미루어 짐작해볼 때,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웠을 리가 없었다.
또다시 어설픈 계획에 장단을 맞춰주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가이아의 군력이 하루아침에 달라졌을 리도 없다.
도망갔다 돌아온 안토니안을 친위대 대장으로 앉혔을 정도니까.
엘레나는 진중한 눈빛으로 노아를 봤다.
“혹시 가이아 황궁에서 나에 대해 염려한다면, 내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전하세요. 그리고 외교적 답변이 필요한 일이라면 케이타 제국의 데릭 경을 통하라고 하고요.”
엘레나는 단호하게 결론 냈다.
“황……녀님. 하지만 밀서의 내용만이라도 한 번 보시고 ……”
“노아, 지금 양국의 관계에서 신뢰는 가장 중요해요. 지금 이런 일로 전쟁의 불씨를 만들 때라고 생각해요?”
전쟁이라는 말에 노아의 안색도 창백해졌다.
“알, 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가보세요.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마세요.”
노아를 돌려보내고 엘레나는 상념에 잠겼다.
한 번 이런 연락이 시작되었으니, 앞으로도 이런 시도는 계속될 것이다.
지금 양국 간의 관계는 좋고, 안정된 관계를 바탕으로 무역도 증가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국력을 키우는데 전심을 다해야지.’
엘레나는 답답했다.
가이아 제국과 소통이 된다면 여러 사정을 잘 알 수 있을 텐데.
‘대신녀님과라도 연락이 되면 좋을 텐데.’
보름 이후, 자신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니 걱정할 만도 했다.
그러다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이아의 신녀뿐 아니라 가이아 제국과의 접촉은 금하겠소.」
지금은 칼립소와의 신뢰를 회복할 때이다.
칼립소의 말대로 그날 이후, 엘레나는 카트리전 쪽으로는 발걸음조차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칼립소에게 실망을 주고 싶지 않았다.
* * *
엘레나 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속이 타는 쪽은 요하스 자작이었다.
‘가이아의 전언을 안 받아?’
어렵게 히르타인과 자리를 마련하고, 안토니안 측과도 함께 도모하여 만든 전략이었다.
엘레나를 처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이번 건을 성공시키기 위해 수많은 자금을 퍼부었다.
동시에 히르타인 중에서도 최고의 전사라고 불리는 자들을 십여 명 넘게 수배해 극비리에 케이타 제국으로 불러들였다. 여인 하나를 해치우는데 한 명이면 족하겠지만, 상대는 가이아의 황녀였다.
그간 전투에서 보여준 실력은 섣불리 얕보다가는 당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거기다 원래 히르타인은 케이타 제국으로 입국이 금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밀입국시키는 데 드는 금전만 해도 꽤 되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로하스관을 바로 습격하는 것도 생각해봤으나, 그것은 득보다 실이 컸다.
습격을 당한 것이라면, 엘레나가 무엇을 꾸몄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당했다고 볼 것이다. 오히려 습격 세력에 대해 추궁당해 자신의 세력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
어떻게든 밖으로 유인해내야 했다.
‘이제 무슨 방법으로 나오게 하지?’
요하스 자작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뒤로 몇 시간이나 머리를 쥐어짰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축 처진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최근 요하스 자작이 애첩으로 들인 리아였다.
“자작님, 아직도 일하시는 거예요?”
리아의 긴 손톱이 요하스 자작의 목을 간질이듯 스쳤다.
리아가 능숙한 손길로 요하스 자작의 어깨를 주물렀다.
“요새 너무 열심히 일하시는 거 같아요.”
열심히 일하기는 했다.
히르타인들을 알아보고, 가이아 제국의 안토니안과 연락이 닿도록 노력했으니까.
“뭐,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세요? 어깨가 딱딱하게 뭉치셨어요.”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긴 하지.”
“뭔데요?”
“여우 하나를 잡으려고 하는데 도통 굴에서 숨어서 나오질 않아.”
“그럼, 미끼를 써서 유인해야죠.”
“해 봤지.”
안토니안의 전언마저 무시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전혀 안 통해.”
“그럼 다른 미끼를 써야죠.”
“어떤 미끼를 말이야?”
“잘 모르겠지만, 여우가 좋아하는 미끼여야 하지 않을까요?”
좋아하는…… 미끼라.
그런 게 뭐가 있을까.
가이아의 황녀니 당연히 가이아의 전언을 반겼어야 하는 거 아닌가.
황제와 붙어먹는 것에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요하스는 벌떡 일어났다.
“오! 나의 천사.”
요하스가 리아를 안았다.
“당신은 천재야.”
“네?”
“요 작은 머리통이 쓸만할 때가 있다니깐.”
요하스 자작은 리아의 머리를 귀엽다는 듯이 쓰다듬어 주고 입술을 진하게 맞췄다.
“어디 가세요?”
요하스 자작이 키스만 한 후, 일어서려 하자 리아가 그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여우가 먹을 맛있는 먹이를 만들어야지.”
“지금 이 시간에요?”
“오늘 밤엔 침실에서 기다려. 중요한 일을 하고 돌아 올 테니.”
자신의 애첩을 어른 요하스 자작은 서둘러 서재로 들어갔다.
엘레나와 요새 가장 같이 있는 자는 칼립소 황제였다.
안토니안보다 칼립소의 밀언이 더 효과적일 것은 자명했다.
특히 두 사람이 최근에 사이가 더욱 좋아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요하스 자작은 황제의 일정을 면밀하게 알아보기 시작했다.
* * *
칼립소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둥그스름한 달이 훤히 밝았다.
약간 이지러진 모양은 내일이 되면 완전히 보름이 모양이 될 것을 예고했다.
「다음에 봐요.」
‘삭’의 밤 이후, 둘은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세 번의 밤’에 대해 애써 외면했건만, 벌써 내일이 마지막 보름날이다.
「보름에 한 번, 삭에 한 번, 또다시 보름에 한 번 이렇게 세 번의 밤을 보내면 치유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번 보름이 지나면 엘레나는 치유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치유력을 돌려주는 것은 아무렇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살았지만, 칼립소는 치유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상처야 수시로 낫고, 고통은 친구와 같았으니.
원래 엘레나의 것.
당연히 돌려줘야 했다. 오히려 자신이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더한 것도 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다만, 하나 걸리는 것이 있었다.
치유력을 찾은 엘레나가 어떻게 변할까.
처음 자신과 함께 밤을 보낸 것도 결국은 치유력 때문이었다.
요사이 사이가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아직 확신은 부족했다.
‘휴우.’
답답함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어떤 전쟁에도 앞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략은 늘 성공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자신이 없었다.
「세 번의 밤을 보낸 후에는 다시는 잠자리를 가지면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보름을 기다려달라고 했을 때도, 미쳐버릴 뻔했는데.
다시는 잠자리를 할 수 없다니.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차갑게 굳었다.
원하는 것이 없어지면, 엘레나는 자신에게 멀어질 것이다.
그건, 또다른 두려움이었다.
“데릭.”
“네.”
“이번 보름에는 밤 사냥을 할 거다. 그렇게 알고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그래. 나가봐.”
데릭을 내보내고 칼립소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이런 식으로 도망을 치다니, 참담한 심경이었다.
‘미안해, 엘레나.’
하지만 칼립소는 도무지 마지막 보름만큼은 엘레나와 보낼 수가 없었다.
* * *
보름날이 밝았다.
엘레나는 새벽 일찍 눈을 떴다.
세 번의 밤 중 마지막 밤.
이번에도 칼립소는 아침에 오지 않았다.
마음을 정돈하고, 엘레나는 일과를 정상적으로 시작했다.
이번 보름날에는 평소 일정을 소화하면서 내내 로하스관에 머물 생각이었다.
칼립소가 원하고자 한다면 언제든 올 수 있게 그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그날 칼립소가 한 거절은 아직도 아팠다.
그러니 전처럼, 황궁에 스스로 찾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하루가 지루하게 흘러갔다.
일에 집중하려고 해도 자꾸 문 쪽으로 시선이 향하는 바람에 종일 같은 페이지만 읽고 있었다.
신경 줄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엘레나는 신전 건축 현장으로 나갔다.
칼립소가 원한다면 자신의 행방을 모를 리가 없다.
찬바람을 쐬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신경이 조금은 느슨해 질 것 같았다.
“엘레나 님.”
신전 건축 현장에 도착하자, 아몬이 엘레나를 보고 급하게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