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부탁이 있어요.”
“부탁?”
칼립소는 기대감 어린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처소를 옮겨달라고 하면 그리해줄 것이다.
그녀가 백기를 든다면, 출병을 멈출 용의가 있었다.
“가이아 제국과 전쟁을 할 거죠?”
“…….”
칼립소는 좀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을 할 거면 정정당당하게 겨뤄요.”
“그게 무슨 말이지? 난 전투에 있어서 정정당당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날 풀어줘요.”
칼립소의 입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풀어달라……?”
“인질을 잡고 싸우는 건 정당한 싸움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적장에게 무작정 풀어달라는 것도 어린아이의 떼가 아닌가?”
칼립소가 날카로운 눈으로 엘레나를 노려봤다.
“내가 당신을 풀어주면 그 대가는 뭐지?”
“이번에도 지게 되면 당신 뜻에 따를게요. 순순히 황후가 될게요.”
그 말에 칼립소가 실소했다.
“기껏, 당신의 마음을 얻자고? 그렇게까지 당신이 가치가 있나?”
칼립소의 붉은 눈이 타오르듯 일렁였다.
“물론이죠.”
“대단한 자신감이군.”
“만약 그렇지 않다면 폐하께서 이런 번거로운 일을 벌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엘레나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니까 날 보내줘요.”
“…….”
“설마 이길 자신 없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그럼, 보내줘요.”
“싫어.”
칼립소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길 자신은 있는데, 당신에 대한 확신은 없거든.”
쓸데없는 반복은 질색이다.
자신은 앞으로 나가고 싶은 것이지, 뒤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생각 할 시간이 있으면 잠이나 자.”
칼립소가 등을 돌리자, 등 뒤편에서 엘레나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한테 원하는 게 있죠?”
그 말에 칼립소의 시선이 다시 엘레나에게 향했다.
엘레나는 뚫어지게 칼립소를 바라봤다.
이번이 아니면 기회는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야 했다.
“내가?”
칼립소의 눈에 흥미가 돌았다.
엘레나는 숨을 깊게 마시고, 정면으로 그를 바라봤다.
“날 가져요.”
엘레나의 얼굴이 도전적으로 빛났다.
“뭐라고?”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칼립소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아나?”
그의 눈 속에는 작은 분노가 스쳐 지나갔다.
“그 정도로 순진하진 않아요.”
긴장이 돼서 입에 침이 마른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핥았다.
“날 못 믿는다면서요? 증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요.”
엘레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고 노력했다.
“이것 참.”
칼립소는 어느새 무표정한 얼굴로 엘레나를 되물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당신은 그 증표로 내게 몸을 주겠다는 뜻인데,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가?”
적나라한 표현에 엘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래요.”
엘레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이아 제국에서는 예의를 중시한다던데 정조 관념은 형편없나 보지?”
“어떤 식으로 모욕해도 상관없어요.”
“모욕이라.”
“그래요. 모욕. 그러니까 날 취하고, 날 보내줘요.”
꽤 고민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사내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라면 뻔하지 않은가. 엘레나는 도박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동안 기사로 지내면서 자신에게 음흉한 눈길을 보내는 사내들이 종종 있었다.
처음 검을 잡았을 때, 기가 막혀서 그런 자들을 혼쭐내 주기도 했다.
물론 황녀라는 위치와 든든한 정혼자 덕분에 그 이후에는 사라지기도 했지만, 어떤 사내들은 여전히 자신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정복하고 싶은 마음일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깟 몸뚱이쯤,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버릴 수 있었다.
오늘 받게 될 치욕은 다시 돌아와서 그의 목을 베면 그만이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엘레나는 못 할 것이 없었다.
초조한 심경으로 칼립소의 답을 기다렸다.
“그럼, 벗어보든가.”
칼립소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면 눈빛은 날카롭게 엘레나의 몸을 훑어봤다. 그 날카로운 눈빛을 받으며, 엘레나는 드레스의 매듭을 풀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엘레나는 신경질적으로 매듭을 당겼다.
매듭 한 자락을 풀자, 한 줄로 꼬여진 드레스가 스르륵 풀리면서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속옷뿐인 상태가 되었다.
은빛 머리칼이 그녀의 가는 목을 지나 허리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숨겨진 탄탄하고 아름다운 그녀의 몸매가 완전히 드러났다.
칼립소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더 벗어요? 아니면 침대로 갈까요?”
그 매혹적인 모습과는 달리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에는 새파란 기운이 돌았다.
칼립소는 무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망토를 걷어 그녀에게 던졌다.
“별론데.”
그 말에 엘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흥미롭긴 하지만, 거래는 무산이야.”
엘레나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라왔다.
“뭐 하자는 거죠?”
“솔직히 별로 동하지도 않고.”
“그럼, 벗기 전에 말했어야죠!”
“혹시나 했는데 역시더라고.”
칼립소가 얄밉게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 말에 칼립소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 순간 엘레나가 천천히 칼립소에게 다가섰다. 그 탄탄한 가슴에 손을 올리고, 먼저 칼립소에게 입을 맞췄다.
말캉하고 달콤한 입술이 닿자, 칼립소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엘레나는 용기 있게 입술을 좀 더 비볐으나, 그의 입술을 여전히 차갑기만 했으며, 그의 손은 흥미 없다는 듯이 여전히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었다.
‘소용없나?’
키스의 방법 따위는 몰랐다.
남자를 흥분시키는 방법 따위는 더욱더 몰랐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했더라?’
감옥에서 물어뜯듯이 당했던 입맞춤을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성 밖으로 탈출했을 때. 그때 분명히 칼립소는 흥분했던 거 같았다.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칼립소의 입술 사이에 혀를 집어넣었다.
‘이랬던 거 같은데…….’
말캉하고 보드라운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와도 칼립소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것도 아닌가?’
이 방법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방법이 없었다.
엘레나가 실망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그의 혀를 빨았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 없는 그의 몸짓에 그녀도 혀를 물리려 했다.
그의 입술에서 서서히 멀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뒷머리에 악력이 느껴졌다.
“이런, 젠장.”
으르렁거리며 그제야 칼립소의 입술이 거칠게 부딪혀왔다.
갑자기 당겨지는 악력에 엘레나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이건 뭐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거친 숨결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여린 입을 온통 헤집어 놓으면서도 때로는 부드럽게 건드리는 몸짓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렸다.
주저앉고 싶었으나 단단하게 허리를 잡은 손은 그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온몸이 흐물흐물 녹는 기분이었다.
구석구석 탐욕스럽게 헤집는 혀를 피하고 싶어도 피할 곳이 없었다.
어느새 엘레나는 구명줄처럼 칼립소의 단단한 어깨에 의지한 채 매달려 있었다.
첫 시작이 무엇 때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했다.
‘제발 끝나길. 아니,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거친 숨결이 좁은 침실에 가득 찼다.
달아오른 공기가 답답해져 숨이 조여올 때, 갑자기 내쳐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엘레나는 칼립소를 바라봤다.
마치 온몸을 태워버릴 정도로 강렬한 불꽃 같은 눈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젠장.”
칼립소가 다시 욕설을 뱉으며 자신의 눈을 가렸다.
들썩거리는 숨만이 그가 흥분했다는 것을 보여줬다.
엘레나는 거의 쓰러질 것 같은 몸을 겨우 지탱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호흡이 차츰 진정될 즈음에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잡히면…….”
어느새 칼립소의 목소리에서 열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오히려 낮은 목소리는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손을 내리자, 타는 듯한 붉은 눈에는 아직 사라지지 않는 열기가 남아 있었다.
“지금처럼 황후가 될 수 없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전쟁에서 지고 나면, 그때야말로 포로가 될 것이다. 황후는커녕 노리개가 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전쟁을 할 때는, 패배를 염두에 두지 않는 법.
엘레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황후 자리 따위에는 욕심낸 적도 없었다.
“좋아요.”
“정말 상관없나?”
“상관없어요.”
“그렇겠지.”
칼립소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나갈 채비를 하지.”
“지금요?”
엘레나의 눈이 커졌다.
“도망칠 시간은 오래 못 줘.”
“정말…… 가게 해주는 거예요?”
엘레나의 눈이 기쁨으로 물결쳤다.
“마음 변하기 전에 채비를 해.”
칼립소가 뒤를 돌자, 엘레나는 서둘러 옷장을 열었다.
하지만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순순히 보내주나? 고작 키스 한 번 했다고?’
엘레나는 멈칫했다.
이 정도로 끝날 상대가 아니지 않는가.
혹시 함정은 아닐까.
“정말 이대로 보내주는 게 맞는 거죠?”
엘레나의 말에 칼립소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불만이라도 있나?”
“원하면 말해도 돼요.”
“무엇을?”
“그…….”
엘레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어찌 되었건 빚지는 것은 질색이었다.
“안 자도 되냐는 말이에요.”
그 말에 한 발 짝, 칼립소의 몸이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괜히 말했나?’
어찌 되었든 보내주려고 했잖아.
엘레나는 후회하는 낯빛으로 조심스럽게 칼립소를 바라봤다.
“왠지 나보다 당신이 아쉬워하는 것 같은데.”
칼립소가 팔짱을 끼며 엘레나의 얼굴을 샅샅이 살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