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비비안은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엘레나는 비비안이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는 따끈한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휴.’
엘레나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님이 청혼을 거절하신 것은 다행이나, 칼립소가 어찌 나올지는 불안했다.
‘설마 먼저 공격을 하는 건 아니겠지?’
케이타족이 전쟁을 마다할 리가 있을 리 없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어디든 쑥대밭을 만들어 놓으려 할 것이다.
엘레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 물었다.
‘케이타족이 먼저 공격하기 전에 선공을 해야 할 텐데. 누가 앞장서려 할까? 안토니안이 해줄까?’
자신이 잡혀있는 것이 알려졌을 테니, 안토니안이 나서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가 전쟁을 주도하는 모습은 잘 그려지지 않았다.
훌륭한 기사임에는 분명하지만, 안토니안은 전쟁을 즐기지 않았으니까.
이것저것 복잡한 생각이 들어 엘레나는 목욕부터 하기로 했다.
욕조에 담긴 따뜻한 물이 아까부터 엘레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예전부터 생각이 복잡할 때마다 엘레나는 목욕을 즐겨 했다. 뜨끈한 물에 오랫동안 잠겨있으면 온갖 잡생각이 달아나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향이 좋은 입욕제라도 듬뿍 뿌리고 싶었으나, 거기까지는 욕심인 것 같았다.
‘화려하긴 하네.’
최근 들어 무섭게 영토를 확장한 제국답게 욕실도 화려했다.
금덩이에 원수라도 진 것처럼 욕실 전체가 금으로 된 장식이 가득했다.
따뜻한 물에 잠겨 있으니 몸의 근육이 녹진하게 풀어지는 것이 편안해졌다.
그 기운에 취해서인가 욕실에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다. 엘레나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욕실에서 나와 엘레나가 스스로 옷을 챙겨 입자, 뒤늦게 비비안이 달려왔다.
“죄송해요. 제가 늦었어요.”
“괜찮아.”
엘레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서 입으신 거예요?”
“난 혼자 하는 게 편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말렴.”
“네, 그런데…….”
비비안이 뒷말을 흐리자 엘레나가 의문스럽게 바라봤다.
“왜 그러지?”
“저기…… 오늘부터 방을 옮기셔야 해요.”
“방을?”
“네.”
비비안이 다소 굳은 얼굴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여기 계시면 좋은데, 폐하의 명이니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어디로 가는 거지?”
“그건…… 일단 따라오시면 돼요.”
엘레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애써 떨쳐냈다.
‘감옥까지 가 봤는데, 설마 더한 곳이 있겠어?’
엘레나는 일어나 비비안을 따랐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성의 동쪽에 있는 탑이었다.
“여기로 올라가셔야 해요.”
비비안을 따라 올라가는 계단은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지?”
엘레나가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가이아족은 본래 땅에 뿌리를 두고 사는 민족이었다. 때문에 자연을 좋아하고, 땅의 기운을 받아야 했다.
그렇기에 가이아의 침실은 대부분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내려오기도 어렵게 끝없이 올라가자 엘레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정확히 말해줘. 몇 층까지 가는 거야?”
하지만 비비안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결국 맨 꼭대기 층까지 와서야 비비안이 발을 멈췄다.
“……여기가 공주님이 계실 곳이에요.”
동쪽 탑 맨 꼭대기 층.
이곳에 자신을 두는 의도는 뻔했다.
‘이번엔 가두려는 건가?’
여기라면 창문을 통해 탈출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듯싶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일단 방의 위치를 알았으니, 식사를 하러 갈게.”
아직 아침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아니에요, 공주님. 식사도 이곳에서 하게 될 거예요.”
“설마…… 이곳에서만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 말에 비비안은 슬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해요.”
“밖에는 나가지도 못한다고?”
“……네.”
비비안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공주님, 혹시 폐하께 잘못한 일이 있으신가요?”
엘레나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
“그렇지 않고선, 사랑하는 여인을 이렇게 가둘 리가 없잖아요.”
비비안이 울먹이는 얼굴로 말했다.
“휴.”
엘레나는 한숨을 쉬며 비비안을 바라봤다.
“비비안, 당신 나라의 폐하는 날 사랑하지 않아.”
“하지만…….”
비비안은 잠시 충격적인 눈으로 엘레나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당신 황제는 그렇게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공주님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지 않았다고요.”
그 말에 엘레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한숨을 쉰 비비안이 입을 열었다.
“일단 식사를 갖다 드릴게요.”
“그래.”
엘레나가 비비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혼자 남은 엘레나는 방을 훑어보았다.
이전의 침실에 비해서는 확실히 소박했다. 거기다 사람의 몸이 통과하지도 못하게 좁은 창문으로 아래를 보니 정신이 핑 돌았다.
‘탈출하기가 만만치 않겠군.’
이 정도 높이에서 내려가기에는 어려웠고, 계단을 통과하자니 그 많은 계단을 내려갈 동안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두고 봐야 하는가?’
이대로 가이아 제국이 자신을 구하러 오길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가.
‘날 인질로 삼으면 어쩌지?’
인질로 잡혀서 가이아 제국의 발목을 잡느니 명예롭게 죽고 싶었으나, 그 소식조차 가이아 제국에 제대로 전해질 리 만무했다.
엘레나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럴 바에는 칼립소를 만나서 그 속내를 제대로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만나주지 않는다면 엘레나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엘레나는 머리를 굴려봤다.
그에게 거래를 제시할 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혹시?’
엘레나는 자신의 입술을 만졌다.
「공주님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지 않았다고요.」
정말…… 자신에게 정말 매력을 느끼나?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 속에 의심이 싹텄다.
청혼이며, 때로는 묘하게 구는 것이 충분히 수상했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쪽으로 승부를 걸어봐도 될까.
엘레나는 작은 창문으로 하늘을 보았다.
아침과 달리 먹구름이 낀 것이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 * *
칼립소는 엘레나를 동쪽 탑으로 옮길 것을 명한 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날이 좋지 않군.”
당장 비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주변이 습했다.
원래도 비가 오는 날엔 칼립소의 기분은 예민해지곤 했지만, 지금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단지 날씨 때문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칼립소는 본래 고민을 좋아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고민을 한다는 것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적들에게 틈을 준다는 뜻이고, 다시 말해 목숨을 위협당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칼립소의 결정은 빠르고 정확했으며, 한 번 내린 명을 번복하지 않았다.
엘레나를 탑에 가두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황후로 책봉하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탈출을 감행했다.
명백히 거부 의사를 보였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탑에 가두는 것이 맞았다.
더구나 곧이어 가이아 제국과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가둬두는 게 맞았다.
‘어차피 혼인한 후에 문제가 생기면 가두려고 했었잖아?’
그 시일을 좀 당긴 것에 불과했다.
그녀의 기가 충분히 꺾일 때까지 탑에 가둬두고, 그동안 가이아 제국의 문물을 흡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마치 중요한 무기를 놓고, 전쟁에 참전한 것처럼 영 개운치 않았다.
그때 데릭이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폐하, 출병 준비를 마쳤습니다. 언제 가이아 제국으로 출발할까요?”
“날씨가 좋지 않아.”
청혼을 거부했으니 전쟁에 대한 그럴듯한 명분은 충분히 주어졌다.
어쩌면 가이아 제국도 예감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쪽에서 먼저 행동하기 전에 먼저 공격하는 것이 옳았다.
‘순순히 청혼을 받아들이면 좋았을 것을.’
칼립소는 가이아 제국의 문물이 탐났다. 하지만 전쟁을 하면 상당한 문화재가 손실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평화로운 방법으로 얻을 수 없다면, 뺏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내키지 않는 기분은 무엇일까.
케이타족은 언제든지 짧은 준비로 전쟁을 할 채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훈련시켰고, 전쟁을 즐기고 승리를 거두도록 만들었으니 더 준비할 것도 없었다.
“따로 명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
칼립소의 말에 데릭이 고개를 숙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칼립소는 궁을 나와 동쪽 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곧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새까만 하늘을 쳐다봤다.
날씨 핑계를 대었지만, 정작 확인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 * *
동쪽 탑은 본래 에로디아 제국의 것이었다.
이 땅을 정복할 때 동쪽 탑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반역자나 죄수들 중 처리하기 곤란한 자들을 가둬놓는 곳이라고.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고 했다.
아직은 그렇게 스산하지 않은 날임에도 위로 올라갈수록 냉기가 감돌았다.
‘여긴가?’
어느새 꼭대기 층에 도착한 칼립소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땅보다 하늘이 가까울 것 같은 높이였다.
‘이곳의 벽을 탄다면 목숨을 걸어야겠군.’
적어도 쉽게 탈출하지는 못할 것이다.
칼립소가 문을 열자 반짝이는 은발이 먼저 시선을 끌었다.
놀란 듯 자신을 보는 보라색 눈동자의 시선을 칼립소는 냉큼 피했다.
대신 재빨리 방을 훑어봤다. 죄수를 수감했다고 하더니, 방은 지나치게 좁고 소박했다.
이전의 침실에 비하면 십 분의 일이나 될까.
그나마 가구라곤 좁은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새로 옮긴 침실은 마음에 드나?”
차갑게 말하면서도 칼립소는 왠지 엘레나를 정면으로 보지 못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엘레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칼립소에게 다가왔다. 결투를 신청하듯 시선을 부딪치고 칼립소와의 거리를 좁혔다.
칼립소 역시 그 끈질긴 시선에 시선을 마주쳤다.
방 안의 공기가 어느새 팽팽히 당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