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11화 (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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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발끈하는 엘레나를 보고, 칼립소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엘레나가 움찔 뒤로 물러난 순간, 칼립소의 손이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살짝 헝클어뜨렸다.

“그쪽과 다르게 난 꽤 로맨틱한 남자라.”

칼립소가 얄밉게 덧붙였다.

“이런 식은 도무지 끌리지가 않아.”

로맨틱이라고?

엘레나는 욕이 나오려는 입을 간신히 막았다.

“어쨌든 지금은 날 풀어준다는 거죠? 그거면 돼요.”

그제야 엘레나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옷장을 살펴봤다.

하지만 안에는 제대로 입을 만한 옷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속옷 차림이 낫겠어.’

그러다 엘레나는 하녀나 입을 법한 옷이 옷장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낡은 옷이지만, 활동하기 불편한 드레스보다는 훨씬 나았다.

엘레나는 서둘러 옷을 입었다.

“이제, 됐어요.”

채비를 갖춘 엘레나가 돌아보자, 칼립소는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가요.”

“따라오지.”

“같이 가주는 거예요?”

“나 없이 이곳의 방비를 뚫을 수 있을 것 같나?”

칼립소는 엘레나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

“좀 더 안겨. 우리는 지금부터 다정하게 산책을 나갈 테니.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칼립소가 엘레나의 허리에 손을 감아 자신의 몸에 딱 붙였다.

‘아야.’

엘레나는 돌처럼 딱딱한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혔다.

‘얼마나 훈련을 했기에 이런 거야.’

잠시 숨을 가다듬은 엘레나가 단단한 허리를 붙잡았다.

“너무 자극하지는 말고.”

칼립소는 엘레나의 손을 떼어 자신의 커다란 손 안에 넣었다.

“가지.”

칼립소와 나란히 손을 잡고 내려가자 삼엄한 경비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오히려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절을 할 뿐이었다.

엘레나는 총총 계단을 내려와 비로소 땅을 밟았다.

“휴우.”

땅을 밟으니 살 것 같았다. 고작 몇 시간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고 체력까지 없어진 것 같았다.

칼립소는 그런 엘레나를 유심히 보더니 설핏 미소 지었다.

“말을 내와라. 내 여자와 산책을 할 테니.”

칼립소가 손짓을 하니, 옆에 있던 병사가 군마를 가지러 갔다.

말을 기다리는 동안, 칼립소의 소식을 들은 데릭이 황급히 달려 나왔다.

“폐하,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데릭의 눈은 엘레나를 향해 있었다.

그 못마땅한 시선에 엘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산책을 다녀오겠다.”

“야밤에 산책이라니요?”

데릭이 당황한 듯 칼립소를 바라봤다.

“폐하, 날이 좋지 않습니다. 정 산책을 하고 싶으시면 성내의 정원에서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짐이 산책하는 것도 경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

“……송구합니다, 폐하.”

데릭이 다시 납작 엎드렸다.

“돌아가서 병사들이나 점검해라. 빠른 시일 내에 출병할 테니.”

“알겠습니다, 폐하.”

데릭은 걱정스럽게 칼립소를 바라봤으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데릭이 사라지자, 엘레나는 칼립소를 올려봤다.

‘출병? 정말 전쟁을 할 생각이었구나.’

시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가이아 제국으로 돌아가서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말을 가져왔습니다.”

금세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커다란 흑마가 눈앞에 준비됐다. 칼립소는 냉큼 말에 올랐다.

“타지.”

칼립소가 손을 내밀자, 엘레나 역시 능숙하게 칼립소의 등 뒤편으로 말에 올랐다.

“앞으로 타는 게 나을 텐데.”

“괜찮아요.”

말 위에서까지 그의 품 안에 안기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말을 따로 내어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았다.

국경 부근에만 내려주면, 숨어서 돌아갈 자신이 있었다.

“그럼, 잘 잡아.”

칼립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지만, 엘레나에게선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잡지 않아도 괜찮으니 그대로 가요.”

엘레나는 칼립소의 허리 대신 안장을 단단히 붙잡았다.

“좋을 대로. 이럇!”

그러나 갑자기 칼립소가 출발하는 통에 엘레나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말의 속도가 예상보다 빨랐다.

처음에는 그의 허리를 잡지 않고 최대한 버티려던 엘레나도 격한 움직임에 그의 허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몸에 탄탄한 허리가 기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내 착각일까.’

엘레나가 그의 허리를 잡자 말의 속도가 아까보다 느려진 듯했다. 청량한 바람의 기운도 그제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격하게 달려서인지 그의 등에선 열기가 전해졌다. 엘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탄탄한 등에 얼굴을 기댔다.

‘다음엔 전장에서 만나게 되겠지?’

왠지 모를 아쉬움에 엘레나는 그의 허리를 꼭 잡았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드디어 국경 부근에 다다르자, 칼립소가 말을 멈췄다.

그리고 날쌘 동작으로 말에서 내렸다.

“이곳부터는 혼자서 가지.”

엘레나가 놀란 눈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내가 말을 가져가도 된다는 뜻이에요?”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이에요?”

엘레나가 못 믿겠다가는 눈으로 칼립소를 바라보자, 칼립소가 설핏 웃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칼이야.”

‘칼.’ 엘레나가 말갈기를 쓰다듬자, 칼이 투레질하며 움직였다.

“까다로운 녀석인데 당신은 마음에 드는 것 같군.”

“사람 보는 눈이 있네요.”

엘레나가 칼의 콧등을 톡톡 두드렸다.

“안장주머니에 간식도 있으니 잊지 말고.”

“웬일이에요? 그런 것까지 준비해주고.”

“당신 말고 칼한테 주라고.”

세심한 배려에 살짝 감동했다가 그 말에 엘레나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칼이 먹다 남긴 것은 당신이 먹어도 좋고.”

말본새는 그래도 제법 안장주머니가 두꺼운 것을 보니 제대로 준비를 갖춘 것 같았다.

“……고마워요.”

“당신이 몰라서 그렇지, 난 꽤 자비로운 편이거든.”

엘레나가 칼립소를 바라봤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지독한 고문을 했어요?”

“그건…….”

뭐라 말을 이으려는 칼립소의 말을 엘레나는 냉큼 잘랐다.

“어쨌든 고마워요.”

엘레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미련 없이 칼립소가 손을 들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잡히지 마. 또다시 잡히면 두 번의 기회는 없어.”

“걱정 말아요. 그럴 일 없으니까.”

엘레나는 잠시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전장에서 만나면, 한 번쯤은 당신도 봐줄게요.”

“그러다간 당신 목이 날아갈걸?”

“당신 목이나 걱정하는 게 나을걸요?”

“얼마든지 기대하는 바야.”

칼립소가 살짝 웃었다.

“전쟁터에서는 쓸데없는 자비는 베풀지 말라는 뜻이야.”

칼립소가 다소 우스꽝스럽게 과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럼, 떠나시오.”

그 모양새가 웃겨서 엘레나도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우중충한 날과는 달리 간질간질한 공기가 감돌았다.

그때 엘레나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이만 갈게요. 이럇!”

엘레나가 거칠게 말을 몰며 달아났다.

멀리 달아나는 엘레나의 모습을 보고 칼립소는 참았던 뒷말을 뱉었다.

“절대 잡히지 마. 다시 잡히면, 지금처럼 신사가 될 자신은 없으니까.”

칼립소는 엘레나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머물렀다.

“이럇.”

엘레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힘껏 달렸다.

과연 칼립소의 말은 명마 중의 명마였다. 보통 이 정도 가면 지칠 법도 한데, 말의 속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주변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엘레나는 쉬지도 않고 힘껏 달렸다.

얼마 동안 달렸을까.

배 속에서 강렬한 허기가 느껴졌다. 설상가상으로 빗방울까지 뚝뚝 내리고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쉬어 가야 했다.

“쉬이…….”

엘레나가 말 허리를 두드리자, 그제야 말이 서서히 멈췄다.

“칼, 착하지. 고생했어.”

그동안 고생한 것을 칭찬하듯 엘레나는 말 목을 톡톡 두드렸다.

그 손길이 좋은 듯 말이 엘레나의 손을 비벼댔다.

“잠깐 쉬어 가자.”

엘레나가 말에서 훌쩍 내려왔다. 긴 시간 승마를 한 탓에 엘레나의 몸도 피곤했다.

이대로 잠시 비를 피한 후에 동이 트면 다시 달려야 했다. 그러면 해가 뜨기 전에 가이아 제국 국경에는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는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쫓아오는 기척은 없어 보였다.

‘완전히 도망칠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건가.’

타오르는 듯한 그의 붉은 눈동자가 생각났다.

「난 꽤 자비로운 편이오.」

엘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자비라니.’

전쟁을 즐기는 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쩌면 조금은 사실일 지도 몰랐다.

순간 말이 보채는 소리에 엘레나는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목마르지?”

안장주머니를 여니, 물과 설탕 과자가 들어있었다.

지쳐있던 칼에게도 물을 주니 좋아하는 티가 역력했다.

‘주인보다 훨씬 마음에 드네.’

순하게 물을 먹는 칼이 어여뻐서 엘레나는 설탕 과자도 꺼내주었다. 자신의 손에 든 설탕 과자를 긴 혀가 순식간에 채갔다.

‘이건 또 뭐지?”

두둑한 다른 배낭을 열어 내용물을 살펴본 엘레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한 사람분의 간단한 도시락과 충분한 물, 그리고 육포까지 들어있었다. 육포는 전쟁 시 최고의 간식이었다.

엘레나는 육포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고소하고 짭조름한 맛이 입 안 가득히 퍼지자, 그제야 엘레나도 살 것 같았다.

잠시 다리를 펴고 엘레나도 자리에 앉았다.

빗방울은 점점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지금쯤 전쟁준비를 마쳤을까?’

엘레나는 초조해졌다.

비가 오긴 하지만 이 정도 빗줄기라면 뚫고 갈 수 있지 않을까.

“칼, 미안하지만 좀 더 달리자. 괜찮겠어?”

그 말을 알아듣는다는 듯이 칼도 다리를 슬쩍 들어 보였다.

“고마워.”

그녀가 갈기를 쓰다듬고, 올라타자 칼은 기다렸다는 듯 빗줄기를 뚫고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동트기 전에 국경에 다다르려면 서둘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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