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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8화 (8/100)

8

엘레나는 황망한 눈으로 비비안의 입술을 바라봤다.

‘도대체 저 시녀의 머릿속은 어떤 생각으로 차 있는 거지?’

“그리고 얼른 황자님도 생산하셔야죠.”

엘레나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어버버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칼립소가 들어왔다.

“잠은 잘 잤나?”

깔끔한 복장에 멀끔한 얼굴로 나타난 칼립소를 보자 엘레나는 분노가 더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런 엘레나의 표정을 본 칼립소는 그저 눈썹만 슬쩍 올릴 뿐이었다.

그러더니 옆에 서 있는 비비안에게 눈짓했다.

“나가라.”

그 말에 비비안이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방 밖으로 나갔다.

침실에는 온전히 엘레나와 칼립소 둘뿐이었다.

넓은 침실도 칼립소가 들어오니 이상하게 좁아 보였다.

“정말 치사하기가 이를 데가 없군요. 잠자는 사람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효과가 있는 것 같은데?”

“뭐라고요?”

“당신 말투가 공손해졌잖아.”

칼립소가 비웃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그건…….”

엘레나는 작게 한숨 쉬었다.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려고 그래요.”

엘레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칼립소를 바라봤다.

어젯밤의 일로 엘레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냥 조용히 탈출하는 것은 애초에 어려운 일이다. 케이타족의 방비는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제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단단히 방어할 것인가. 그렇다면 차라리 혼인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기회를 엿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일단은 자신의 몸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칼립소가 침대 끝에 앉았다.

거대한 체구가 침대 모서리에 앉자 엘레나가 있는 곳까지 출렁거렸다.

“무척 바라는 바요.”

“그럼, 먼저 이거나 풀어주시죠.”

엘레나가 시위하듯이 칼립소의 얼굴 쪽으로 발을 들었다.

그러자 칼립소가 엘레나의 발목을 한 손으로 잡았다.

커다란 손에 쏙 들어간 그녀의 발목이 한순간에 연약해 보였다.

‘왜 이렇게 뜨거운 거야?’

이 남자의 손은 불로 만들어졌는지 그에게 잡힌 발목이 후끈거렸다.

급기야 칼립소가 긴 손가락으로 그녀의 발목을 따라 내려가자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가락이었지만, 손놀림은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발목에 스친 손가락이 족쇄를 지나 발가락 사이까지 다다랐을 때, 요상한 감각을 느낀 엘레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당장 놔요!”

재빨리 벗어나려는 하얗고 가는 발목이 검게 그을린 그의 투박한 손에 냉큼 붙잡혔다.

“싫은데.”

그의 붉은 눈이 타오르듯 빛났다.

“간지럽다고요.”

“아.”

그 말에 칼립소가 아쉽다는 듯이 놓았다.

순식간에 툭 떨어진 그녀의 발이 쇠사슬에 부딪혔다.

“당신이 혼인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신부한테 이런 취급은 예의가 아니죠.”

“신부?”

칼립소가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당신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아주 의외군. 역시 족쇄를 채운 보람이 있어.”

칼립소의 웃는 얼굴에 엘레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대화가 안 통하다니. 야만인이란, 별수 없나 보네요.”

그 말에 칼립소의 눈이 무섭게 변했다.

“당신 죄를 생각하면, 이 정도에서 끝나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지.”

칼립소의 커다란 몸이 순식간에 엘레나의 위로 덮치듯이 다가왔다.

그 위협적인 기세에도 불구하고 발목에 묶인 쇠사슬 덕분에 엘레나는 꼼짝 못 하고 굳어있기만 했다.

어느새 자신의 얼굴 앞에 칼립소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눈은 마주치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니, 그런 엘레나의 얼굴에 뜨거운 손가락이 지나갔다.

칼립소의 입술이 그녀의 귀로 향했다. 그리고 귓가에는 섬뜩한 말이 나직하게 들렸다.

“엘레나, 하마터면 다리를 자를 뻔했잖아.”

이자는 진심이다.

엘레나는 칼립소가 일어날 때까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더운 숨결이 귓가를 간질이자, 엘레나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러자 칼립소의 몸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어느새 칼립소는 언제 다가왔었냐는 듯이 일어나 있었다.

그는 큰 키로 엘레나를 내려다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제대로 된 신부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제대로 된 처신을 해야지. 말투만 바꾸면 쓰나.”

그 말에 엘레나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내 신부가 될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으면서.”

본심을 꿰뚫린 엘레나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찔렸다.

엘레나는 그를 만만하게 본 자신을 자책했다.

“가이아 제국의 정혼자는 마음에 들었나?”

‘정혼자?’ 엘레나가 놀란 눈빛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안두리온이랬던가?”

“안토니안이야.”

이름을 틀리게 말한 칼립소에게 반항하듯 말을 짧게 답했다.

칼립소는 짧아진 엘레나의 말을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뭐, 어쨌든.”

차갑게 변한 엘레나의 얼굴을 보며 칼립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 정혼자도 지키지 못하는 형편없는 사내임은 분명하지.”

“함부로 말하지 마. 당신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남자니까.”

“그래?”

칼립소의 입매가 비웃듯이 일그러졌다.

“얼마나 대단한 작자인지 직접 보고 싶군.”

엘레나의 눈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뭘 어쩌려고 하는 거지?”

“가이아 제국에서 내 청혼을 거절했어.”

‘부모님께서 거절하셨구나.’ 엘레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마음속에서 안도감이 피어올랐다.

속으로는 은근히 걱정했었다.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는 케이타족의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혼인이라도 명하면 어쩌나.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나.

불안감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이젠 당신 의견을 듣고 싶어.”

칼립소가 눈을 맞춰왔다.

“당신 생각은 어떻지?”

“……뭘 말하는 거지?”

“나와 함께 사랑에 빠졌다며 같이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갈 생각은 없는지 묻는 거야.”

그 말에 엘레나가 실소했다.

“대답은?”

엘레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짐작했을 텐데? 난 미친놈의 신부가 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

엘레나는 부모님의 현명한 선택에 기꺼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한발 더 나아가 가이아에서 군대를 보내 싸워주길 원했다.

그래서 무작정 이웃 나라들을 짓밟고 있는 케이타 제국을 징벌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자신도 목숨을 바쳐 싸울 것이다. 명예롭게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절로 드는 상상에 엘레나의 표정이 부드럽게 펴졌다.

그런 엘레나의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던 칼립소가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렇군.”

자리에서 일어난 칼립소는 아쉽다는 듯이 턱을 만지며 엘레나를 바라봤다.

결연한 엘레나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틈도 발견할 수 없었다.

“정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칼립소는 미련 없이 뒤를 돌아 뚜벅뚜벅 문 앞으로 나갔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엘레나가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

그 말에 칼립소가 서서히 등을 돌렸다.

“왜? 무슨 할 말이라도 남았나?”

“이건 언제 풀어줄 거지?”

엘레나가 발목을 들어 보였다.

발목에 묶인 쇠사슬이 찰랑대며 소리를 냈다.

“그걸 내가 왜 풀어줘야 하지?”

뻔뻔스러운 칼립소의 얼굴을 보면서 엘레나는 화를 삼키며 말했다.

“최소한 생리현상은 해결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거 아니야.”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칼립소가 얄밉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아서 해. 아니면 머리를 좀 써보든가.”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마친 칼립소는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엘레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저런 치사한 놈이 있나.’

신경질적으로 발목을 당기던 엘레나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아무래도 꼼짝없이 묶여 있어야 할 것 같았다.

‘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자 마침 해맑은 표정을 한 비비안이 들어왔다.

“공주님. 담소는 잘 나누셨나요?”

비비안이 생글거리며 엘레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씻으시고 아침 드셔야죠.”

“나더러 씻으라고?”

엘레나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비비안을 바라봤다.

“네, 뭐가 불편하세요?”

“내 발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니?”

엘레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비비안을 바라봤다.

하지만 비비안은 더 황당한 표정으로 엘레나를 바라봤다.

“왜……요?”

“왜요, 라니?”

그 말에 비비안이 눈썹을 찌푸렸다.

“혹시 사용법을 모르시나요?”

엘레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비비안이 족쇄에 손을 댔다.

“여기를 돌리면 풀려요.”

놀라서 엘레나가 고개를 들자, 비비안이 손쉽게 나사를 돌렸다. 그동안 고민한 것이 민망할 정도로 쇠사슬이 쉽게 풀렸다.

“어떻게 알았지?”

“여기 ‘열림’ 표시가 되어 있는데요? 그리고 폐하께서 공주님이 풀 수도 없는 족쇄를 사용하실 리 없잖아요. 포로도 아니신데. 이건 두 분께서 밤놀이로 하신 거 아니었어요?”

「머리를 좀 써보든가.」

갑자기 그자의 말이 들리는 듯해서 엘레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럼, 목욕 준비해 놓을게요.”

비비안이 사라진 후에 엘레나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진정시켰다.

‘진작 알려주면 좋았잖아.’

아까 그렇게 발버둥 쳤는데도 불구하고 발목에는 부드러운 털로 감겨서 그런지 엘레나의 발목은 아무런 생채기 없이 멀쩡했다.

‘뭐야, 사람 민망하게.’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이불 속에 폭 파묻혀 있자, 비비안이 다가왔다.

“공주님, 일어나세요. 목욕 시중들어드릴게요.”

“아니, 괜찮아.”

“제가 할 일인데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그럼, 조금 있다가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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