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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2화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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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는 바닥에 나뒹굴어진 검을 집었다.

“목이 완전히 달아나면 치유력도 소용없겠지.”

검이 높이 올라가며 태양이 반사되었다.

땀과 피에 범벅이 된 은빛 여우가 보라색 눈을 찡그렸다.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죽여라.”

치욕적인 표정으로 은빛 여우가 말했다.

“……바라는 대로 해 주는 건 내 방식이 아니지.”

은빛 여우의 머리 위에서 칼립소가 말했다.

“죽고 싶어서 죽지 못하게 밟고 밟은 다음에, 처절하게 항복을 받아낼 테다. 여봐라. 묶어라.”

칼립소가 물러서있던 병사들에게 명하자, 순식간에 은빛 여우의 몸이 꽁꽁 묶였다.

케이타족에게 끌려가는 은빛 여우의 모습을 보고 가이아의 군사들은 절망에 휩싸였다.

* * *

일주일 후.

칼립소의 신경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다.

예상과 달리 밤낮으로 모진 고문을 해도 은빛 여우에게 항복의 단어를 받아낼 수 없었다.

은빛 여우가 잡혔다는 소식에, 가이아 제국은 케이타 제국의 만행을 사방에 규탄하며 속히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은빛 여우는 가이아 제국뿐 아니라 주변국들에도 명망이 높았기에 케이타 제국에 대해 못마땅해했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는 가이아 제국을 중심으로 케이타 제국에 반감을 품은 나라들이 뭉치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뜻을 꺾지 않습니다. 게다가 상처가 저절로 아물어서 소용이 없습니다. 차라리 목을 베시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칼립소는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를 생각했다.

그 목덜미를 완전히 베어버리면 붉은 피가 튀겠지. 하얀 목에서 튀는 붉은 피는 꽤 장관일 것이다.

아예 문밖에 머리를 걸어줄까.

“안 됩니다. 폐하, 이대로 저들의 분노를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가뜩이나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차라리 은빛 여우를 놓고 협상을 벌이십시오.”

“협상? 그런 귀찮은 짓을 하란 말이냐?”

“폐하!”

“그래서, 내가 자발적 항복을 받아내라는 것이 아닌가. 은빛 여우의 항복을 받아낸 후 그들을 굴복시키면 되지 않느냐!”

칼립소의 질책에 대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폐하, 이대로 은빛 여우를 계속 감금하기엔 무리가 따릅니다.”

그나마 칼립소가 신임하는 데릭이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지금 우리에게 등 돌린 국가가 여럿입니다.”

“모두 다 정복해버리면 그만 아니냐?”

“폐하, 아무리 케이타 제국이 강하더라도 지금으로선 그건 무리입니다.”

“그럼, 다른 방도를 내놓아 보아라.”

“…….”

대신들의 침묵이 길어지자, 칼립소는 짜증이 났다.

“우리 편을 들어줄 제국들이 없단 말인가?”

침묵은 계속되었다.

최근 들어 일으킨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케이타 제국에 손을 내미는 국가들이 없었다. 게다가 칼립소 황제는 외교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 그러시다면, 혼인을 하십시오.”

“혼인? 또 그 소리인가?”

“그렇지 않아도 르시아 제국에서 폐하의 답변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만약 르시아 제국과 혼약으로 맺어진다면, 서쪽에 있는 제국들은 우리 편에 설 것입니다.”

“혼인이라…… 그깟 이유로 그 쓸데없는 짓을 하란 말인가?”

데릭이 황당한 눈으로 칼립소를 바라봤다.

“폐하! 폐하의 혼인은 단순한 개인의 일이 아닌 국가의 중대지사입니다.”

칼립소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데릭을 바라봤다.

“그래서?”

“케이타 제국을 위해서라도 폐하께서는 하루빨리 혼인을 하셔야 합니다. 또한 후사를 마련하는 것도 케이타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제발 이번 기회에…….”

“그게 은빛 여우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것보다 낫단 말이냐?”

“그 은빛 여우 하나 때문에 여러 국가들이 우리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입니다.”

“안 되겠다.”

칼립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 가서 직접 항복을 얻어내지.”

칼립소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신들이 예를 갖추며 뒤를 따랐다.

지하 고문실에 도착하니 비명과 피 냄새가 오감을 자극했다.

대신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칼립소는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가장 깊숙한 층으로 내려가자 멀리서 쓰러져 있는 은발의 여인이 보였다.

긴 은발이 작고 하얀 몸을 뒤덮은 채 쓰러져 있었다.

‘정말 은빛 여우 같군.’

오랜만에 보는 그녀는 새삼 작은 체구였다.

“폐하! 오셨습니까.”

칼립소를 보고 고문관들은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며칠 내내 얼마나 애썼는지 초췌해진 안색이 역력했다.

칼립소는 인사를 대강 받은 후, 감옥 문을 열고 은빛 여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피 냄새가 다시 확 끼쳤다.

칼립소는 전신에 휘도는 묘한 감각에 눈썹을 찌푸렸다.

‘또 다.’

전장에서 느꼈던 기묘한 느낌이 다시 몸 안에 맴돌았다.

심한 고문의 증거인 듯 의복은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은빛 머리카락에는 피가 묻어 중간중간 검은 얼룩이 눈에 띄었다.

‘젠장.’

칼립소는 이 상황에 이상하게 화가 났다.

벽에 걸린 중간중간 칼날이 박힌 채찍에는 방금 내리쳤는지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칼립소는 채찍을 집어 들었다.

“무능한 놈들!”

엎드려 있던 고문관들에게 채찍이 휘둘렸다.

“으읏…….”

비명을 지른 고문관들이 벌벌 떨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앞으로 고문 강도를 좀 더 올려서…….”

“됐다!”

칼처럼 자른 칼립소는 채찍을 집어 던졌다. 그리곤 다시 은빛 여우에게 다가갔다.

툭툭 발로 건드리자 그녀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칼립소가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는 기운 없이 쓰러져 있는 그녀와 눈을 맞췄다.

온몸이 피로 물들어도 눈빛만은 강렬했다.

“정신이 드나?”

보라색 눈이 잠시 깜빡이더니, 시선을 맞췄다.

“이런 식으로 얼마나 버틸 거 같나?”

“못 버티는 쪽은, 네놈이 될 거다.”

형형한 눈빛으로 말한 은빛 여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엘레나라고 했나.”

엘레나는 은빛 여우의 본명이자, 가이아 제1황녀의 이름이었다.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

“엘. 레. 나.”

엘레나의 경고에도 칼립소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분명히 발음했다.

“네놈이 무슨 짓을 해도 내 입에서 항복이란 말은 나오지 않을 거다.”

“그럴 것 같군. 그래서 말인데, 그럼 항복말고, 다른 것을 권하도록 하지.”

“뭘 말이지?”

칼립소의 눈썹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악동처럼 휘었다.

“엘레나. 당신에게 청혼하지.”

칼립소의 말에 지하 감옥의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

그 정적을 깨뜨린 것은 엘레나의 웃음소리였다. 큭큭거리는 웃음을 짓던 엘레나는 급기야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미쳤군.”

엘레나가 칼립소를 비웃듯이 올려다보았다.

“미치다니, 난 놀랍도록 제정신인데.”

그 말에 엘레나의 강렬한 보랏빛 눈이 반짝였다.

“제정신이라고?”

“물론이지. 그러니까 이제 당신 대답을 듣고 싶은데.”

칼립소가 턱을 문지르며 느긋하게 말했다.

“뭐, 지금 상황에서 내 제안이 황송할 줄은 알고 있지만.”

칼립소의 말에 엘레나는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렇게 내 대답을 원한다면 말해주지.”

엘레나가 손짓하자 칼립소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좀 더 가까이.”

엘레나가 칼립소에게 은밀하게 손짓했다.

그리고 그가 엘레나에게 다가선 순간.

“퉤.”

피가 섞인 침이 칼립소의 붉은 눈 주위로 튀었다.

그 순간 주위의 군사들이 엘레나를 에워쌌다.

“이년이! 감히 무엄하게!”

옆에 서 있던 고문관이 날카로운 칼날이 박힌 채찍으로 그녀의 등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그 채찍을 손으로 감은 것은 칼립소였다.

“조용히!”

엘레나의 침을 손으로 닦은 칼립소가 실소했다.

침을 닦은 손을 그대로 스윽 입가에 문질렀다.

그 모습을 엘레나가 경악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칼립소가 그녀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하긴, 내 청혼이 갑작스럽긴 했지.”

“……무슨 수작이지?”

엘레나가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수작이라니. 여인에게 처음으로 청혼하는 사내의 마음을 이리 할퀴어도 된단 말인가?”

칼립소의 손이 엘레나의 목덜미를 그대로 움켜잡았다. 그리곤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미 침도 섞인 마당에, 망설일 필요도 없겠군.”

그대로 물어뜯듯 달려드는 입술을 보고 엘레나는 완전히 굳었다.

흡사 맹수가 먹잇감을 발견한 듯 그녀의 턱을 눌러 벌리게 한 후 혀를 집어넣었다. 그녀의 안을 거칠게 헤집고, 빨아 당기는 통에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힘껏 발버둥 치려는 그녀의 몸짓을 성나게 누른 칼립소는, 여린 입 안 구석구석을 거칠게 탐했다.

입 안이 완전히 뭉겨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치열을 핥으며 아플 정도로 혀를 휘감은 탓에 야릇한 감각이 온몸에 전해졌다.

한껏 제 욕심을 다 채운 후에야, 칼립소가 입술을 물렸다.

“이제 아까보다, 훨씬 낫네.”

칼립소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고서야, 엘레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미친놈!”

칼립소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단호하게 명했다.

“내 신부를 풀어줘라.”

* * *

한바탕의 소란이 끝나고, 칼립소의 집무실에 데릭 경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폐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청혼이라니요?”

“아, 그거.”

“폐하, 제발 명을 거두어 주십시오.”

“왜지?”

“은빛 여우와 혼인을 하시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내가 하루빨리 혼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경일 터인데?”

“폐하.”

데릭은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제가 말씀드릴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엉뚱하신 분이지만 이런 일을 벌이실 줄이야.’ 데릭은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

칼립소가 제국을 세울 때 그 옆에서 보좌하면서 행정적인 기틀을 닦은 것은 데릭이었다.

데릭은 케이타족이 아닌 이방인 출신이었지만 영민한 머리와 철저한 성품으로 칼립소의 신임을 차지했다.

“자네가, 요즘 피곤해 보이더군.”

칼립소의 붉은 눈이 데릭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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