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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3화 (3/100)

3

“폐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래서 일을 덜어주려는데, 왜 그러지?”

“폐하!”

“가이아 제국을 잠재우는 데 이것보다 더 좋은 수가 있으면 이야기해 봐.”

데릭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그래도 황후의 자리입니다.”

“그래, 내가 그들의 황녀를 황후에 앉히면 가이아족은 우리에게 우호적이 될 수밖에 없겠지.”

칼립소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골칫덩이지만 가이아 제국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또한 그들의 문화가 탐나기도 했다. 힘으로 정복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순순히 협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혼인을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주변국들의 문제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

그제야 데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지만, 어쩌면 이 방법만큼 가이아 제국과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은 방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걸리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하지만 가이아 제국에서 순순히 응할지도 의문입니다. 게다가 무엇보다 폐하의 반려입니다. 이런 식으로 즉흥적으로 정하신다는 것이…….”

“모르는 여자보단 나아. 적어도 나한테 쓸데없는 기대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가이아 제국의 황녀라면 꽤 우아하게 나라 살림도 맡을 테지.”

“은빛 여우로 불렸던 자입니다. 고분고분하게 황후의 역할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케이타 제국 황후라면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당장 전장에서도 칼립소의 목을 베어버리려고 했다.

지금의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항복을 선언하지 않은 것만 봐도 얼마나 독한 여인인지 알 수 있었다.

“억지로 혼인한다고 해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히려 후환이 될 것입니다.”

“무엇을 걱정하는 거지? 그땐 동쪽 탑에 가둬버리면 그뿐이야.”

그 말에 데릭이 굳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혼인을 하면 황후신데…….”

“언제 내 목줄을 끊을지도 모르는 여자와 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겠나?”

“…….”

“데릭, 염려 마. 짐이 여인 하나 못 다루겠나?”

자신만만한 칼립소의 표정에 데릭은 의문을 표했다.

전투야 신의 경지인 것을 익히 알고 있지만, 여인과 그 무엇을 하는 것은 본 일이 없었다.

“만약 뜻대로 안 되신다면 후사는 어찌하실 겁니까?”

“짐은 아직 젊고, 여자는 많지.”

“그래도 지금 혼인하시면 제1황후가 됩니다. 당연히 제1황후의 자식이 황제 계승 서열 1위가 되는 것이고요.”

칼립소가 눈을 번뜩였다.

“가이아족은 땅의 기운을 못 받으면 시들해진다지. 동쪽 가장 높은 탑에 가둬둘 생각이다. 땅은 절대로 밟지도 못하게. 기운이 빠지면 말을 듣게 되겠지.”

그 말에 데릭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결국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마음대로 하실 작정이시구나.’

“그러니 잔말 말고 준비하거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혼인식은 지상 최대의 규모로 화려하게 준비하도록.”

“네?”

데릭은 어리둥절했다.

혼인하자마자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탑으로 처박아 둘 것이라면서 화려한 혼인식이라니.

“나 칼립소가 처음으로 혼인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상대가 누구든 간에 당연히 가장 화려하게 해야지.”

데릭은 칼립소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황제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칼립소는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황제라는 사실이다.

* * *

칼립소의 명에 따라, 군사들이 엘레나의 손과 발에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수갑이 풀린 후에도 엘레나는 실감 나지 않았다.

‘청혼이라니?’

자신을 놀리거나 또 다른 종류의 고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설마 진심으로 청혼을 할 리가 없지 않는가.

그런데 정말 감옥에서 나오게 되고, 따뜻한 욕탕으로 끌려가게 되자 황당해지기까지 했다.

군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엘레나를 질질 끌고 갔다.

“이놈들! 어서 그 손을 놓지 못할까?”

위엄있는 목소리에 엘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다소 통통한 체격의 시녀였다.

“안녕하세요, 공주님. 저는 비비안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공주님을 모시게 될 시녀입니다.”

‘공……주님?’ 엘레나는 낯선 어휘에 정신이 멍해졌다.

“이제 곧 황후 폐하가 되실 거지만, 지금은 혼인 전이니 공주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괜찮을까요?”

엘레나는 정신이 얼떨떨해서 그저 듣고만 있었다.

“에휴. 그동안 얼마나 고초가 많으셨어요.”

비비안은 엘레나를 조심스럽게 욕탕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한눈에 반하셨다는 게 사실인가요? 공주님께 반해서 전쟁도 멈추셨다면서요? 저희는 폐하께서 그리 낭만적인 분이신지 참말로 몰랐습니다.”

엘레나는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뭐? 나한테 반했다고? 그런 거짓말을 믿는 것인가?’

뻣뻣하게 굳은 엘레나를 눈치채지 못한 채 비비안은 계속해서 수다스럽게 말을 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감옥으로 구애하러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저 저희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니까요.”

‘당연히 믿을 수 없겠지,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

“그런데도 매번 매몰차게 거절하셨다면서요. 너무하시네요.”

비비안이 부드러운 브러시로 머리를 빗겨주고, 엘레나의 옷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난 고문을 당했다고. 그것도 매일 심하게!’

엘레나가 차마 입 밖으로 말은 못 하고 벙긋거리자, 비비안이 먼저 선수 쳤다.

“어머, 피부도 이리 고우셔라.”

고문을 당한 흔적 따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특유의 치유력 덕분에 이미 상처는 아물고 최상의 피부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이렇게 고운 피부를 가지시다니, 정말 부러워요.”

비비안이 속옷마저 벗기려 들자, 엘레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내가 혼자 하지.”

“안 됩니다. 제가 시중을 들어드려야죠. 가이아 제국에서는 공주님의 시중을 아무도 들지 않았나요?”

그 말에 엘레나는 할 말이 없었다.

엘레나에게도 당연히 시녀가 있었다. 다만 그녀 특유의 고집으로 정말 필요할 때만 호출했었다.

어려서부터 활동적이었던 엘레나는 옷을 입고 벗는 것은 스스로 했고, 옷차림 또한 가볍게 입고 다녀서 시녀가 크게 필요 없었다.

하지만 공주에게 시녀가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풍습이었고,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가이아 제국의 체통의 문제였다.

엘레나는 아무 말 없이 비비안의 손길을 견디기로 했다.

능숙한 비비안의 손길에 의해 엘레나는 어느새 알몸이 되었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공주님.”

비비안은 순수한 감탄의 시선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단련이 일상인 엘레나는 매끈하고 탄력적인 몸을 가지고 있었다.

몸 전체에 생기가 흘렀고, 아름다운 복근과 탄탄한 허벅지에서는 건강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게다가 잘록한 허리와 부드러운 가슴선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이래서 폐하께서 반하셨군요.”

엘레나는 자신을 홀린 듯이 빤히 바라보는 비비안의 시선에 당황해 서둘러 탕으로 들어갔다.

“매일 세레나데까지 부르시며 구애하셨다니 저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그자가 세레나데를 불렀다고?’ 점점 점입가경인 거짓말에 엘레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참아야지.’

엘레나는 우선 진정하고 생각을 했다.

어떻게든 포로 신분을 탈피했으니 탈출할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때까지는 잠자코 있어야 했다.

하지만 비비안의 다음 말에 엘레나는 그 다짐을 지킬 수 없었다.

“그런데 결국 키스에 넘어가셨다면서요?”

울컥한 엘레나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간 엘레나의 몸에서 물기가 좌르륵 떨어졌다.

물방울이 탄력 있는 가슴부터 잘록한 허리까지 후두둑 떨어지자, 비비안이 감탄했다.

“어머, 예쁘셔라.”

비비안의 눈을 똑바로 보고 엘레나가 말했다.

“먼저 잘못된 사실부터 정정해야겠어. 나는 그의 키스에 반한 게 아니야.”

발끈하는 엘레나를 보고 비비안이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눌러 탕에 도로 앉혔다.

“걱정 마세요. 아무한테도 소문 안 낼 테니.”

“이미 소문은 파다한 거 같은데?”

날카로운 엘레나의 말에 비비안이 웃었다.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하지만 안심하라는 듯이 비비안이 눈을 찡긋했다.

“수줍어서 그러시는 거 다 알아요. 하지만 여긴 가이아 제국과는 달라요. 거긴 좀 내숭이 심하지요?”

‘내숭?’ 엘레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비비안을 바라봤다.

졸지에 내숭이 심한 여자가 되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일단 들어나 보자 싶었다.

“여기선 그런 거 다 이해해요. 우리 폐하가 또 좀 멋있으세요?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며, 그 멋진 근육들까지!”

비비안의 눈이 황홀하게 빛났다.

“밤에는 또 얼마나 근사하실까?”

엘레나는 점점 머리가 아파 왔다.

자신이 아니라고 말할수록 그저 ‘내숭 떠는 공주’로 전락해버릴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그냥 무시하는 게 나았다.

어차피 틈을 봐서 탈출하면 그뿐이었다.

“참, 검을 그렇게 잘 다루신다면서요?”

비비안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엘레나를 봤다.

“언제부터 검을 잡으셨어요?”

엘레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곱 살 때.”

“어머! 천생연분이시네요. 물론 폐하께서는 세 살 때부터 검을 잡으셨지만요.”

‘이건 또 뭐지?’ 왠지 밀리는 기분에 엘레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엘레나는 결코 자랑하는 성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친 겸손으로 주변에서 떠들어댈 뿐, 꽤 과묵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이 수다쟁이 시녀에게는 조금쯤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줄 필요가 느껴졌다.

“내가 처음 기사로 임명받은 날, 일대일의 호적수가 없어서 다섯 명이 함께 나와 겨뤘어.”

비비안이 냉큼 그녀의 말을 끊었다.

“어머, 폐하는 서른 명하고도 혼자 싸우시는데.”

엘레나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명수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어떻게 이기느냐가 중요한 법이니까.”

“어쨌든 공주님, 이제부터는 그런 고생은 안 하셔도 돼요.”

“고생, 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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