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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1화 (1/100)

[ 폭군과 세 번의 밤을 보내면 ]

1

하늘에는 온통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에 바람이 차가웠다.

하지만 그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피 냄새였다. 전쟁의 피 냄새가 막사 안까지 느껴졌다.

다들 지친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칼립소만이 즐거운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이미 에칼로트 제국을 정복하고 이곳에 온 칼립소는 진정으로 전쟁을 즐기고 있었다.

‘전쟁의 신’

피 묻은 갑옷을 입고 검을 쥔 그의 모습은 전쟁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쟁터에서 태어나서,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부터 칼을 만졌던 그에게 전쟁은 일상이었고, 피 냄새는 그에게 공포가 아닌 안정감을 주었다.

오히려 그는 평화로울 때 불쾌함을 느꼈다.

가만히 있어도 날뛰는 혈기는 무언가를 베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따라서 칼립소가 지배하는 케이타 제국은 오히려 평화가 공포였다.

조금만 잘못하거나 눈에 거슬려도 목이 달아나는 판국이었으니, 케이타 신하들은 오히려 전쟁을 간절히 바랄 정도였다.

“얼마나 남은 거 같아?”

“폐하, 곧 항복할 것 같습니다.”

칼립소의 심복인 윌리엄이 답했다.

“시시하군.”

칼립소가 못마땅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말대로 이곳 골로리암 성마저 케이타 제국에게 정복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문제는 시간일 뿐.

“아직 안 나타났나?”

칼립소가 매서운 눈빛으로 말했다.

오늘 전쟁에서는 특별히 칼립소가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지금쯤 나타나야 할텐데.’

이곳까지 함락되면 인접해 있는 가이아 제국도 위험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전투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칼립소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자 조각같이 생긴 그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역시 여우를 잡으려면 굴로 직접 들어가야 하나?”

그의 붉은 눈이 맹렬하게 빛났다.

“이곳을 함락시킨 후, 가이아 제국 본성으로 간다.”

“네. 폐하.”

윌리엄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칼립소가 기다리는 것은 ‘은빛 여우’였다.

가이아 제국의 제1황녀이자 기사인 그녀는 최근 케이타 제국의 돌풍에 발목을 잡는 존재였다.

장수로서 실력도 뛰어나지만, 그녀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가이아 제국 대대로 내려오는 치유력이었다.

전설로만 존재한 채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능력이었다.

가이아 제국의 3대 황제에게 치유력이 있었던 시기는 제국의 전성기였다. 그로부터 백 년 이상 끊겼던 치유력이 제1황녀에게 나타난 것이다.

황녀의 경우 황제에 올라도 직접 통치가 불가하기 때문에 일찍 혼인하여 반려자가 정치에 나서고, 대를 잇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은빛 여우는 달랐다.

먼저 은빛 여우라는 기사로서의 명성이 높아지고 가이아 제국의 황녀라는 것이 나중에 밝혀지자, 백성들은 열광했다. 게다가 치유력까지 있는 것으로 알려지자, 가이아 제국의 또 다른 부흥을 이끌어 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폐하, 드디어 은빛 여우가 나타났습니다!”

전방에 있던 병사가 막사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했다.

그 소리를 들은 칼립소가 눈을 번뜩였다.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군.”

칼립소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일어섰다.

은빛 여우의 소문을 들었을 때,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여겼다. 다 이긴 싸움도 은빛 여우가 등장하면 전세가 바뀐다고 했다.

칼립소가 낮게 웃었다.

“이곳에 온 보람이 있군.”

케이타족은 칼립소가 이끌기 전에는 그저 야만족에 지나지 않았다.

좋은 영토를 찾으면 약탈한 후 비싼 값으로 다른 나라에 팔았을 뿐 정착하는 민족이 아니었다.

용병에 지나지 않았던 케이타족을 모아서 국가로 만든 것이 바로 칼립소였다. 그가 황제에 오른 지금 케이타족은 무섭게 성장했다.

“가자, 은빛 여우를 사냥하러.”

가이아 제국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인물, 은빛 여우.

과연 그녀가 등장하면서 골로이암 성 군사들의 자세가 바뀌었다. 상처를 입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격하는 그녀를 보면서 사기가 높아진 것이다.

“그래봤자 여인에 불과한 몸.”

본디 약하고 여린 민족에서 태어난 여인이 발악해봤자 어느 정도일까.

치유력이 있다지만, 고작 방어 기술일 뿐.

칼립소는 느긋한 마음으로 전장에 나갔다.

하지만 칼립소의 예상과 달리 전쟁터에 고고하게 나타난 은빛 여우는 그 명성 그대로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은발이 찬란하게 나부끼는 옆에 함께 튀는 피는 장관이기까지 했다.

과연 소문대로 치유력이 상당한지 제대로 된 갑옷조차 걸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행동이 더욱 민첩해 보였고, 동작은 아름다웠다.

“꽤 볼 만하군.”

분명 검을 휘두르는데 춤을 추는 것 같았다.

“폐하, 두고 볼 때가 아닌 듯합니다.”

윌리엄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순식간에 전세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었다.

저 자그마한 은빛 여우 때문에.

“죽일까요?”

그의 말에 칼립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생포해라.”

칼립소의 말에 은빛 여우를 둘러싼 케이타의 군대들이 간격을 좁혀 들어갔다.

하지만 좀처럼 사로잡지 못했다.

피가 튀는 가운데 은빛 여우는 탈출로를 기가 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안 되겠군.”

칼립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전신의 피가 들끓었다.

“이럇!”

칼립소의 출전에 병사들의 고함 소리가 커졌다.

순식간에 적진 안으로 뛰어 들어간 칼립소가 그대로 은빛 여우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쨍그랑-!

오랜만에 만난 호적수였다.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인 칼립소에 비해 백마의 은빛 여우가 대조되어 하얗게 빛났다.

피 튀기는 승부에 주변의 군사들이 저절로 물러섰다.

눈부신 장관 속에 다들 전쟁이라는 것도 잊고 둘의 전투만 바라보고 있었다.

초반에 대등하던 승부는 순식간에 칼립소 쪽으로 기울었다. 아무래도 체력 면에서 은빛 여우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칼립소가 다 잡은 승기에 미소를 짓는 순간, 암기가 칼립소의 허리에 닿았다.

“이런. 잔재주도 부릴 줄 아는군.”

날카로운 암기를 피한 칼립소가 칼등으로 은빛 여우의 팔을 쳤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격통에 그녀는 저로 모르게 검을 놓쳤다.

“아!”

놓친 검이 바닥을 뒹굴었다.

서둘러 은빛 여우가 말에서 내렸지만 검을 다시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비록, 뛰어난 검술이지만.”

칼립소가 느긋하게 말에서 내리며, 은빛 여우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그 정도론 내 상대가 안 되지.”

“날 죽여라.”

살벌한 퍼런 눈이 기세등등하게 칼립소를 쏘아보았다.

‘파란색? 아니 보랏빛인가?’

잠시 그녀의 눈동자를 유심하게 보던 칼립소가 실소했다.

“여인치곤 제법 검을 쓰더군.”

“네놈한테 그런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죽여라.”

“너는 죽이기가 쉽지 않다던데.”

칼립소가 입매를 비틀었다. 죽을 위기에 처했음에도 당당한 그녀의 태도가 퍽 흥미를 끌었다.

“날 죽이려면.”

그녀가 갑자기 자신의 옷을 끌어 내렸다.

파란 핏줄이 보일 정도로 새하얀 목덜미가 시선을 바로잡았다.

“여기를 끊어놓아라.”

“진정으로 죽기를 바라는 거냐?”

칼립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새하얀 목덜미가 햇빛에 반짝였다. 은빛 여우가 가리킨 곳에서 정확히 파란 맥박이 팔딱대며 뛰고 있었다.

칼립소가 망설임 없이 칼날이 휘둘렀다.

새하얀 살갗이 그어진 순간, 피가 튀었다.

“이……!”

그러나 놀란 쪽은 은빛 여우가 아니었다.

분명 피 냄새인데 향긋했다.

물론 전장에서의 피 냄새는 칼립소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이건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뭔가 몽글몽글하면서도 자신의 깊숙한 곳을 건드리는 느낌.

달콤하면서도, 사람을 빨아들이는.

왜 저 목덜미를 핥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그 순간, 은빛 여우가 그의 허리로 달려들었다.

체격 차이로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으나, 급습인 탓에 방심하고 있던 칼립소가 뒤로 넘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피가 흐른 채로 달려들 줄이야.

‘치유력이 있다더니.’

순식간에 목에 흐르던 피가 깨끗하게 스며들며 상처가 아물었다.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보는 찰나, 오히려 칼립소의 목이 위협당했다.

손 안에 또 다른 암기를 숨기고 있었는지, 칼립소의 목덜미에 상처가 났다. 그나마 급소를 공격당하기 직전에 가까스로 손목을 꺾을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지, 조금만 늦었다면 오히려 그의 목숨이 달아날 위기였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은빛 여우가 몸을 공처럼 말아 웅크린 후, 다시 달려들었다.

“봐주면 안 되겠군.”

칼립소는 자신의 검을 내동댕이쳤다.

여인이라 얕봤던 처음의 생각은 넣어두었다.

크게 휘두른 주먹이 은빛 여우의 복부를 가격하려고 하자, 그녀는 재빠르게 몸을 굴려 피했다. 역시나 움직임 하나는 끝내주게 빨랐다.

칼립소는 은빛 여우가 자세를 갖추도록 기다려줬다.

그리고 다시 주먹을 날리는 순간, 놀랍도록 유연하게 그녀의 허리가 젖혀지더니, 순식간에 몸을 돌려 그의 턱을 가격했다.

“이런.”

입술 끝에 살짝 피를 맺혔다.

‘내가 피를 볼 줄이야.’

칼립소는 다시 태세를 정비한 채, 본격적으로 은빛 여우와 맞붙었다.

노을이 지도록 두 사람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대등해 보이던 결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칼립소에게 유리해졌다. 그녀는 날렵한 움직임과 유연한 자세를 지녔지만, 체력 면에서는 칼립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지친 은빛 여우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칼립소는 이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잡은 후, 무릎으로 걷어찼다.

본능적으로 상체를 꺾은 은빛 여우의 등을 내리치니, 결국 그녀의 무릎이 꺾였다.

“으…….”

무력으로 몸은 숙였지만, 고개를 드는 은빛 여우의 눈빛만은 꺾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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