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아직은 멀쩡히 붙어 있군.
그의 외모에 정신이 팔려 잠시 잊고 있었다.
원작에서 이 남자, 아르반은 왼쪽 팔이 없는 외팔로 등장한다.
원작이 시작하기 한참 전 어느 날, 느닷없이 에시트 산맥의 몬스터들이 폭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르반은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을 소탕하기 위해 휘하의 기사단과 병사들을 이끌고 에시트 산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처음 보는 몬스터와 조우하게 된다.
그 몬스터는 굉장히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제국 최고의 검사라 불리는 아르반마저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렇게 치열한 접전이 펼쳐지던 와중, 아르반의 검이 몬스터의 강철 같은 가죽으로 인해 두 동강이 나버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당연히 몬스터는 그가 새로운 검을 손에 쥐는 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렇게 아르반은 왼팔을 잃게 된다.
하지만 한 기사가 그에게 새로 들려준 검으로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에는 성공한다.
몬스터는 숨이 끊어지자 그대로 녹아내려 사라져버렸고, 그 몬스터가 녹아내리니 다른 몬스터들은 폭주 상태에서 벗어나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이 사건만 잘 넘어갈 수 있다면 아르반의 왼팔도 무사할 수 있다는 뜻인데….’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원작에서는 이 몬스터 폭주 사건의 장면만을 다뤘다.
고로, 이 사건이 정확히 언제 발생하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공녀가 제게 단지 인사를 하시고자 찾아오신 것은 아니실 테니, 공작께서 다른 중요한 용무가 있으신가 봅니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 있던 아르반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다시 아르반에게로 신경을 돌렸다.
단정하게 크라바트를 매고 정장을 갖춰 입은 모습이 절제돼 보이면서도 섹시하다.
하지만 일순 차오른 불순한 생각은 다시금 그와 시선이 교차한 순간 표백되어 깔끔하게 날아가 버렸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 그의 눈동자에 마력이 깃들어 있어 사람을 홀린다는 얼토당토않을 이야기를 속삭여와도 믿어 버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네, 맞아요.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버지께서 며칠 전 영지의 시찰을 나가셨고, 오늘 아침 귀환 예정이셨는데 아직 소식이 없으세요.”
“벌써 정오가 다 되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라…. 염려가 크시겠습니다.”
“네, 그러네요….”
나와 아르반은 공작의 무소식에 대해 떠들고 있었지만 서로 별다른 동요 없이 덤덤하기만 했다.
애초에 나는 공작이 멀쩡히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작이 지금 이 시점에 변을 당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작에 개입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다른 외부적 요인으로 정해진 미래가 바뀔 리가 없을 테니까.
뭐, 이건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판단일 뿐이었다.
사감을 얘기하자면, 공작은 내게 상처만을 남기고 떠나버린 아빠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어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또한 내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도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아이를 방치해 둔 자였다.
그가 리엘리에게 얼마나 애정을 주고 헌신했든지 간에, 그게 아몬을 방치한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는 못한다.
그러니 내가 공작을 걱정하거나, 친근하게 여길 일은 앞으로도 쭉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눈앞의 잘생긴 남자를 바라봤다.
공작보다는 오히려 이 남자가 더 신경이 쓰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르반이 팔을 잃게 되는 사건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르반이 아몬의 스승이 되는 시기가 아몬이 열일곱 살 때로 나오고, 그때부터 대략 팔 년 전쯤의 사건으로 다뤄지는 이야기였으니까.
피폐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정신적 문제를 안고 있는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정신적 결함이 아닌, 신체적 결함이 있는 인물이 바로 아르반 카넬로웰이었다.
원작에서 그나마 아몬에게 도움을 주는 유일한 인물이기에 호감이 갔었다. 비록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아마 별일 아닐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네, 저는 괜찮아요. 다만 오늘 예정돼 있던 일정이….”
아르반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네 왔다.
저렇게 무감한 표정으로 있으니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께서 소식이 없으신데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에시트 산맥에서 발견된 마정석 광산 건으로 방문하셨다고 들었는데… 후에 괜찮으신 시간을 말씀해 주시면 아버지께 전달해 드릴게요.”
대공을 헛걸음하게 만들었으니 없는 시간도 만들어 맞춰 줄 수 있을 것이다. 나 말고 공작이.
아르반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한 템포 늦게 입을 열었다.
“…열흘 후, 제가 이쪽에 볼일이 있으니 그때 다시 방문하도록 하죠.”
“그렇게 전해드릴게요. 같은 시간으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그때는 만찬을 함께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럼 열흘 후에 뵙는 것으로 알고 있을게요. 오늘 일은 정말 죄송하게 되었어요, 각하.”
“공녀께서 사과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죠.”
“배웅해 드릴게요.”
아르반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배웅이라도 하게 해주세요. 헛걸음하시게 만들어 죄송해서 그래요.”
내 잘못은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은 존재했다. 그보다 큰 사심이 뒤를 따르고 있었지만.
내가 당신 같은 미남을 또 언제 보겠어? 열흘 후에 보겠지만 사소한 건 넘어가고.
미안해하는 나를 무안하게 만들면 안 되지, 어서 대답해라.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재차 권하자 이번에는 그도 순순히 대답해왔다.
그에 미소로 응답하며 함께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보다 다리가 짧은 나를 배려하는지,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걷고 있는 아르반을 힐끔 바라봤다.
앉아 있을 때도 느꼈지만 걷는 모습도 절도 있고 우아하다.
누구나의 모범이 될 만큼 바른 자세였다.
나는 꽤 신경 써서 행동하고 있는데, 아르반은 몸에 배어 있는 습관 같아 보였다.
하긴, 그는 한평생을 귀족으로 살아왔고 나는 고작 며칠 전에 빙의했다. 사실 비교 자체가 웃기는 일이었다.
“…근데 아깝긴 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이 남자의 팔이 곧 날아갈 예정이라니….
‘좀만 덜 잘생겼어도 이렇게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모른 척 외면하기에는 너무 잘생긴 얼굴이었다.
여태껏 얼굴 뜯어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남자 정도의 미모라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가 말입니까?”
말하는 나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중얼거렸는데, 들렸나 보다.
대체 얼마나 귀가 좋은 거야?
하지만 태평하게 그의 청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이제 좀 있으면 잘려 나갈 당신 팔이 아까워서요.’라고 말해 버릴 수도 없고….
열심히 말을 고르는데 옆에서 시선의 압박이 느껴졌다.
결국 난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어버렸다.
“음… 각하를 이렇게 그냥 보내기가 아깝다고나 할까요….”
“…….”
“…….”
아르반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그의 침묵에 나 또한 동참하여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는 겉모습과 달리 머릿속에서 혼자 온갖 난리를 쳐대고 있었다.
‘미쳤어, 미쳤어! 생각 없이 말하는 것도 유분수지! 진짜 정신머리 어디 갔니!’
그의 입이 열린 것은 내가 의식의 흐름에 정신을 맡겨버린 나 자신을 한창 욕하고 있을 때였다.
“…공녀는 참 솔직한 분이신 것 같습니다.”
“하, 하하…. 제가 솔직한 편이긴 하죠.”
배웅한다고 하지 말걸….
자유분방하게 입을 놀린 대가가 너무 컸다. 크윽…!
쓸데없이 넓은 저택을 원망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앞뜰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가 보였을 때는 무겁게만 느껴지던 공기가 다시 가벼워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후우… 나는 아르반 몰래 숨을 돌리며 해방감을 만끽했다.
근데 사람이 참 간사한 게, 막상 진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아쉬움이 슬금슬금 밀려오는 것이었다.
나 자신이지만 정말 어이가 없어서….
그래도 이미 마차 앞에 도착한 이상 붙잡아 둘 명분도 없었다.
어차피 열흘만 있으면 다시 볼 사람이기도 하니까.
나는 아르반을 올려다보며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각하, 방문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살펴 가세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로베르 공녀. 다음에 뵙도록 하죠.”
나지막하게 인사를 건넨 아르반이 내게 손을 내밀어 왔다.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의아했지만 별생각 없이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그러자 아르반은 내 손을 들어 올리고는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마차에 올랐다.
“……!”
놀란 내가 입을 뻐끔거리는 사이 아르반을 태운 마차는 멀어져 갔다.
나는 한동안 못 박힌 듯 우두커니 서서 자리를 지켰다.
‘…뭐야, 방금 뭔데?!’
영화에서나 보던 손등 키스를 받게 될 줄이야.
그가 입을 맞춘 손등을 반대 손으로 슬쩍 감싸 쥐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다. 아니, 솔직히 좀 설렜다.
그리고 한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 남자의 팔이 잘려 나간다라.
“그건 싫은데….”
물론 아르반에게 팔 하나 없어진다고 그 미모가 달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멀쩡한 편이 좋지 않은가.
나는 힐끔 내 왼팔을 내려다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쓸데없는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있었다.
이렇게 우연히 호감을 갖고 있던 캐릭터, 아니, 이제는 아르반이라는 사람과 안면을 트게 됐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지 중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게 내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 후에 아르반과 마주했을 때 그의 팔이 잘려 나가 있다면….
‘분명 자책하게 되겠지.’
내가 도와서 멀쩡할 수도 있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는 그런 쓸데없는 죄책감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몸이 고단한 편이 마음고생보다는 나은 법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이런 자기방어적인 이유보다는, 그저 잘생긴 한 남자의 인생을 구한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마음 편하니까.
그저 그렇게만 여기기로 했다.
아르반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는 팔을 잃지 않아도 되고, 나는 마음 편히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