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일단 최대한 단순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복잡하게 고민해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원작에서 아르반은 자신의 팔을 날려버린 몬스터를 제 손으로 제거한다.
그리고 그의 팔이 잘리는 것은… 그래, 검. 검만 부러지지 않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원작에서 아르반이 사용하던 검. 그 검이라면 절대 부러지지 않으리라.
‘성검.’
아르반이 몬스터를 처리한 이후 발견하게 되는 샤루스 제국의 초대 황제가 사용했다는 여신의 성검.
아르반은 팔이 잘린 채로 전투를 마치고 몬스터들의 폭주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에시트 산맥을 샅샅이 조사하던 중, 한 절벽 인근에서 어떤 통로를 발견하게 된다.
통로랄까, 상당 부분 파괴된 땅굴과 같은 곳이었다.
그곳의 하부에서 성검을 찾아낸다.
아르반이 성검을 손에 쥐고 이것을 먼저 발견했다면 검이 부러질 일은 없었겠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지하 통로가 원래는 신전의 일부였고, 그곳으로 들어갈 방법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
원작에서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세세한 설정 짜는 것을 좋아하시던 작가님이 SNS에 남기신 여러 글 중에 숨겨진 통로에 대한 부분을 읽었었으니까.
‘그 작가님 팔로우해둔 게 이렇게 도움이 되네.’
특이한 설정이라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성검만 미리 들려주면 검이 부러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팔이 잘릴 일도 없겠지. 어차피 훗날 그의 손에 들어갈 물건이기도 하고.
‘그럼 이제 문제는 어떻게 성검을 찾아서 아르반의 손에 쥐여주느냐인데….’
성검이 매몰된 위치가 참 애매했다.
이걸 설명한다 한들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뭐라 말해야 그 남자가 순순히 믿고 따라줄까.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하, 살다 살다 내가 이제는 이런 고민까지 하고 있다니….”
혼자 끙끙거리며 궁리를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묘수가 없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나중에 다시 고민해 보기로 하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점심도 안 먹고 날 기다리던 아몬과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다음부터는 내가 일이 있으면 혼자라도 잘 챙겨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애한테 말한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혹여라도 또 날 기다린다고 배곯는 일이 없도록 시녀장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애들은 꼭 제때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는 법이다.
식사를 마치고 아무도 없는 방에 늘어져 있으니 고요한 정적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똑똑-
그때 정적을 깨고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을 노려봤다.
막 누웠는데 또 무슨 일이지?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시녀장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다가와 간략히 용건을 전달했다.
“아가씨, 가주님께서 귀환하셨습니다.”
그 양반 타이밍하고는.
“생각보다 빨리 왔잖아.”
감감무소식이라길래 며칠은 더 소식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는데.
안 그래도 아몬 문제로 늦든, 빠르든 한 번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나서 해야 할 말도 있고, 보기는 봐야겠네. 지금 어디 계셔?”
“집무실에서 업무 중이십니다.”
과연 워커홀릭. 아무리 바쁘다지만 돌아오자마자 업무라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장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갔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더 있으면 저녁 시간이었다.
그때 찾아간다면 분명 저녁 식사라도 같이하자고 권할 텐데… 함께 식사할 마음은 없으니 지금 가야 했다.
‘근데 진짜 가기 싫다….’
침대에서 발버둥 치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켰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억지로 등 떠밀려 가는 기분이었다.
***
“저 리엘리예요. 들어갈게요.”
문을 열어주려는 하인을 제지하고 직접 문을 열어젖혔다.
“오, 우리 리리 왔구나. 이쪽으로 앉으렴. 차 한잔 내오라고 할까?”
들어온 사람이 나라는 것을 확인하자 만면에 미소를 띤 공작이 만사를 제쳐두고 반겨주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보다 오늘 무슨 일 때문에 대공 각하와 하신 약속도 못 지키신 거예요?”
직설적으로 던진 질문에도 공작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답해왔다.
“아, 우리 영지에서부터 여기까지 통하는 길 중에 에시트 산맥을 끼고 있는 곳이 있잖니. 그곳이 갑작스러운 산사태로 길이 봉쇄돼서 뚫릴 때까지 시간이 걸렸단다.”
공작은 이내 흐뭇해하는 표정으로 아르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듣자 하니 우리 리리가 아빠 대신 대공과 만나 다음 약속을 잡아 줬다던데, 역시 후계자 교육을 받은 보람이 있구나. 그래, 대공께서는 잘 돌아가셨고?”
나는 공작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후계자 교육? 이게 무슨 말이지?’
공작은 리엘리에게 작위를 넘길 생각이었나? 그럼 원작에서는 왜 타국으로 시집을 갔던 거야?
순식간에 오만 가지 의문이 떠올라 머릿속이 혼잡해졌다.
하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네, 뭐. 열흘 후에 다시 방문한다고 하셨으니까 그때는 어디 가지 마시고 저택에 계세요.”
나는 동요한 사실을 들키지 않게 뜸 들이지 않고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보다 제가 이번에 아몬의 방을 바꿔줬다는 거, 알고 계시죠?”
“그래, 시녀장에게 보고는 들었다. 리리, 네가 그 아이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내가 갑작스레 아몬의 이름을 언급하자 단번에 안색이 굳어진 공작은 말끝을 흐리며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명백히 불편해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내가 하고자 했던 말을 뱉어냈다.
“길게 말하지는 않을게요. 애가 아무리 보기 싫었어도 그렇지, 치졸하게 그런 창고 못한 방에 박아두고 싶으셨어요? 하물며 공작이라는 분이?”
대공과 후에 약속을 잡아뒀다는 것은 미리 보고를 받았으리라 예상했었다.
그런데도 공작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그를 보러온 것은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리리, 아빠도 그 애가 그런 곳에서 지내고 있는지는 몰랐단다.”
“…네?”
“레이먼드에게, 그러니까 아빠의 보좌관에게 적당히 눈에 띄지 않는 방을 주라고만 했지.”
아몬이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표정이 사라졌던 공작은 다시 내게 웃어 보이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서 제 행동을 후회하고 있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내가 따지고 드니 설명을 해준다는 식의 변명.
‘더구나 뭐? 저렇게 지내는 줄 몰랐다고? 보좌관을 통해 전달만 해서?’
그래,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지 간에 결과적으로 아몬은 방치되어 자라났다.
그 아이가 영특하니 지금까지는 잘 자라주었지만, 원작의 아몬을 보면 공작의 저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발언인지 알 수 있었다.
공작이 아주 작은 관심만 기울였더라도 아몬이 그렇게 방치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인이 된 아몬이 엇나갈 일도 없었겠지.’
공작은 그저 제 아이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린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어른에 불과했다.
“핑계 대지 마세요. 어쨌든 지시는 아버지가 내렸고, 아몬은 그동안 골방에 처박혀 지냈어요. 그 어린애가 제대로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
“저도 그동안은 아몬에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를 거예요.”
비단 그 아이가 소설 속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윤리적인 문제였다.
아마 내가 아닌 그 누구라도 눈앞에 불행한 아이가 있고, 그를 구제할 능력이 있다면 손을 뻗었을 테지.
“그 애는 제 동생이고, 로베르 공작가의 공자라는 위치에 있죠.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줄 거예요.”
그래, 본래 그 아이가 정당히 누려야 할 권리를 돌려주려는 것뿐이다.
공작은 아몬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심기가 불편한지 손톱을 세워 반대 손톱에 탁탁 부딪혀 댔다.
“아버지가 아몬의 보호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니까, 저라도 그 자리를 대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내 의사를 전달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아몬을 돌볼 마음이 없으신 것 같으니… 제가 대신 책임지고 돌볼게요.”
아몬을 돌보겠다는 내 선언에 공작의 얼굴이 구겨졌다.
“…네가 그 아이를 돌보겠다고?”
“네. 저도 제가 아이를 보살피기에 부족한 사람이란 것 정도는 알아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를 몇 년간 골방에 방치한 분보다는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이건 공작 본인에게도 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원작이 진행되기 직전 사망한 공작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하지만 그 부고 소식을 전해 들을 당시 아몬의 의미심장한 심리묘사를 고려했을 때….
‘아몬이 죽인 거겠지.’
그러니 공작 본인은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아몬을 보듬는 일은 결국 그의 수명을 늘리는 데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었다.
“앞으로 교육에 필요한 가정교사도 구해야 하고, 제대로 된 물건이 없어서 돈이 좀 들어갈 것 같은데. 금전적으로는 지원해 주실 수 있겠죠.”
공작은 내가 아몬을 돌보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침묵에 나는 미약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해주시지 못하겠다면, 좋아요. 그럼 제 앞으로 남아 있는 어머니의 유산, 지금 받아 갈게요.”
내 입에서 나온 어머니의 유산이란 소리가 튀어나오자 공작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앞으로는 제 생활비도 지원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그 아이가 눈에 띄는 게 그렇게 싫으시다면… 저랑 아몬은 따로 나가 살도록 하죠.”
나중에, 사망한 공작의 서재를 정리하며 아몬이 발견하게 되는 공작부인의 유서가 있다.
그 서류에는 그녀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재산을 양분하여 상속한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때 아몬은 유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그 문장 한마디, 한마디를 눈에 새겨 넣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머니만큼은 자신을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내며….
사실 아몬의 과거를 서술하는 부분은 항상 관찰자 시점이었기에 당시의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명쾌하게 보여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부분을 읽으며 마음이 참 아팠다.
그의 어머니가 죽지 않았다면, 아니, 하다못해 아버지가 그를 방치하지만 않았다면 아몬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부서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지금에 와서는 도움이 되는 정보가 되었지만… 입이 썼다.
공작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 굳어진 그의 얼굴과는 달리, 어느 틈엔가 찢어져 상처 난 손끝에 피가 맺혀 있는 게 보였다.
그렇게 손톱을 부딪쳐 대더니, 결국 저 꼴이 났다.
“손은 왜 그래요. 피나잖아요.”
“아… 신경 안 써도 된다. 돈? 돈이 필요하다고? 돈이야 많이 있지. 리리가 필요한 만큼 얼마든지 가져다 쓰렴.”
내가 손에 대해 지적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공작이 어딘가 핀트가 어긋난 대답을 해왔다.
“아뇨. 어머니가 남기신 유산,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잖아요. 이제 저도 성인이니 상속받을 자격이 되니까, 넘겨달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분가….”
“리리,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꺼내지 말렴. 저택 밖은 너무 위험해.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도 말거라.”
분가라는 내 말에, 공작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