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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이라 등장인물들이 심신미약이다-6화 (6/153)

6화.

***

나는 소파에 몸을 푹 기대앉으며 맞은편에 앉아 긴장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둘을 슬쩍 바라봤다.

다홍빛 머리에 같은 색 눈동자. 색채가 화사하다.

‘어딜 가나 눈에 띄겠는데?’

리엘리와는 정반대로 강아지처럼 크고 동그란 눈매가 순해 보이는 앳된 얼굴의 아가씨들이었다.

둘은 일란성 쌍둥이로, 같은 틀에 넣고 찍은 것처럼 똑같이 생겼다.

그러나 한 명은 머리를 가지런히 땋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뒤로 동그랗게 묶고 있었기에 일단 구별은 가능할 성싶었다.

‘머리 모양마저 같다면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어느 쪽이 에바야?”

누가 누구인지 몰라 물었다.

그러자 머리를 땋아 내린 아이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해 왔다.

“제, 제가 에바 튜나입니다, 아가씨!”

“…세바니 튜나입니다, 아가씨.”

“그래, 에바랑… 세바니.”

이름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겠니, 넘기며 괜히 한 번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흠, 만나서 반가워. 잘 알겠지만 리엘리 로베르야. 다른 게 아니라, 너희들을 내 전속 시녀로 쓰고 싶어서 보자고 했어.”

면접을 보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뽑기 위해 불러낸 만큼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네에?! 아가씨의 전속 시녀로요?”

“저… 저희들이요?”

“응, 그냥 나랑 같이 다니면서 잔심부름만 좀 해주면 돼.”

“하지만 아가씨… 저희는 아직 공작가에서 오래 근무하지도 않아서 모르는 게 많아요….”

“괜찮아.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 단순할 거야. 어려워할 것 없어.”

에바와 세바니는 생긴 것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비슷한 이들이었다.

당황하니 둘 다 하얗던 볼이 발그스름해졌다.

그게 꼭 볼 터치를 해놓은 것처럼 보여 풋풋하고 어리숙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둘은 내 권유가 내심 기쁜 듯, 걱정되지만 동시에 기대와 동경으로 반짝이는 눈빛을 가감 없이 내비쳤다.

어, 음. 근데 너무 기대하는 것 같다.

너희들 입장에서 전속 시녀라고 하면 엄청 프로페셔널하고 멋져 보일인지도 모르지만, 내 전속 시녀라고 해봐야 진짜 별것 없는데….

반짝이는 두 쌍의 눈동자가 심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당장 내일부터 내 전속 시녀로 배치될 거야. 아침에 이 방으로 오면 돼. 오늘은 나 혼자 있어도 상관없으니까 에이미랑 카렌한테 인수 인계받고, 내일 보자.”

“네, 알겠습니다. 아가씨…!”

“내일 뵙겠습니다, 아가씨.”

“응, 그래….”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인 것 같다. 시골 출신이라 적혀 있던 것을 봤는데, 순진해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둘을 등 떠밀어 에이미와 카렌에게 보내고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뭘까.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아직 오전인데도 유독 피곤하게 느껴졌다. 나른해….

똑똑-

그 상태로 막 잠이 들려는데, 누군가가 다급하게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어! 들어와….”

“아가씨!”

시녀장이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그녀는 답지 않게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

“카넬로웰 대공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그게 누군데? 이렇게 갑자기?

나는 급히 기억을 헤집었다. 카넬로웰, 카넬로웰 대공이라면….

‘아, 미래에 아몬의 검술 스승으로 나오는 사람이잖아.’

지금은 아직 만날 타이밍이 아닐 텐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대공? 카넬로웰 대공이 갑자기 왜 찾아와?”

나는 어안이 벙벙한 낯으로 물었다.

그러자 시녀장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오늘 가주님과 오찬 약속이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주님께서 아가씨와의 식사 이후 곧장 영지로 시찰을 나가셨었습니다. 본래 오늘 아침 귀환 예정이셨는데… 아직 돌아오시지 않고 계십니다.”

“아니, 그 아저… 아버지는 왜 아직도 안 돌아온 건데? 우리 영지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잖아.”

지금 나와 아몬이 머무는 곳은 수도에 위치한 로베르 가문의 저택이다.

로베르 영지는 수도를 기준으로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서쪽으로 바로 옆에는 카넬로웰 대공령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두 영지 모두 수도에서 가까운 부근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

공작은 주로 황성이나 수도의 저택에서 업무를 처리하지만, 간혹 영지에 시찰하러 가기도 했다.

지난번 식사 때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그게 이번이었나 보다.

“아직 이유를 파악 중입니다. 그런데 아가씨, 대공 각하께서 기다리신 지가 벌써 꽤 되셨습니다.”

“얼마나 기다렸길래?”

“10분, 아니 그보다 조금 더 기다리셨습니다. 이리 늦어지시리라 예상치 못해 미리 보고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러니까, 나보고 아버지 대신 대공을 상대하라는 거지?”

“…아무래도 가주님께서 도착하시기 전까지는 아가씨께서 대공 각하를 만나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대공이 기다리기 전에 미리 나한테 보고를 올리지.

슬쩍 미간을 찌푸렸지만, 소리 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공작을 믿고 기다렸던 거겠지.

공작의 부재로 가만히 잘 쉬던 나만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 됐다.

치솟는 짜증을 뒤로하고 시녀장에게 말했다.

“별수 없으니 급한 대로 그렇게라도 해야겠네. 그런데 아버지와는 무슨 일로 약속이 잡혀 있던 거야? 그걸 알아야 가서 뭐라 말이라도 꺼내지.”

“이번에 에시트 산맥에서 발견된 마정석 광산의 지분에 대해 논의하시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에시트 산맥이면… 분계선 근처에서 발견된 거야?”

“네, 그렇게 파악되고 있습니다.”

에시트 산맥의 마정석 광산이라면 나도 약간이나마 알고 있는 정보가 있었다.

이 마정석 광산에는 역대 발견된 광산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정석이 매장되어 있다.

그 때문에 원작에서도 로베르 영지 내의 가장 큰 주 수입원으로 꼽힐 정도였으니,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또한 에시트 산맥은 우리 영지와 카넬로웰 대공령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반은 로베르, 반은 카넬로웰의 소유인 에시트 산맥에서 발견된 마정석 광산은 하필이면 정확히 경계를 끼고 있었다.

내가 읽었던 원작 시점에서는 이미 한참 옛날에 진행된 협상이다.

별 중요하지도 않은 협상 내용까지 구구절절 적혀 있지는 않았던지라 실상 써먹을 만한 정보는 많지 않았다.

나는 드레스 룸에서 아무 숄이나 꺼내 대강 어깨에 두르며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시녀장에게 물었다.

“그건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하여튼 더 기다리게 할 수도 없으니 만나는 봐야겠네. 어디서 기다리고 계셔? 2층 응접실?”

“예,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바로 내려가지.”

“네, 아가씨.”

시녀장은 재빨리 방문을 열어주었다. 내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시녀장 역시 서둘러 발을 움직였다.

나는 응접실로 향하는 동안 카넬로웰 대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카넬로웰 대공은 아몬의 검술 스승으로 등장했었고, 중간에 그의 시점으로 과거에 대한 외전이 따로 올라온 적이 있었다.

원작의 과거에서는 여러 왕국과 벌어진 정복 전쟁으로 현 대공의 아버지이던 전 대공이 사망하게 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그런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 당시 대공자이던 지금의 대공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대승을 거뒀다.

그 뒤로도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연전연승을 거두어 제국민들에게 전쟁 영웅으로 추앙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게 되는 인물.

하지만….

똑똑-

“각하, 로베르 공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시녀장이 노크하며 고하자 안쪽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허락의 뜻을 밝혀왔다.

시녀장은 나를 돌아보았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응접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뒤에 기사나 보좌관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신경이 온통 눈앞의 남자에게 쏠려 다른 쪽으로 향할 정신이 남아 있질 못했으니까.

남자는 빙의한 이후 처음 보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머리 색과 같은 짙은 검은색 눈썹과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 높은 콧날, 굳게 다물린 모양 좋은 입술, 샤프한 턱선까지 모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잘생겼다, 혹은 아름답다는 단어를 형상화한다면 아마 저 남자와 같은 생김새이지 않을까 싶었다.

정말 순간적으로 내가 지금 뭐 때문에 이곳에 서 있었는지 망각할 만큼 남자의 외모는 파급력이 강했다.

특히 저 눈, 그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깊은 심해의 어딘가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아득한 느낌을 주는, 진한 푸른빛의 눈동자.

그 눈빛이 마치 내 심층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일게 만든다.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아 급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딱 벌어진 어깨와 촘촘한 근육으로 짜인 상체가 눈길을 끌었다.

노출이 전혀 없는 옷을 걸치고 있음에도 사람을 홀리는 탓에, 더 아래로 향하려는 시선을 의식적으로 막아내며 가늘게 숨을 토해냈다.

나도 모르게 숨까지 참아가며 남자를 관찰하고 말았다.

하지만 남자는 집요한 내 시선을 받으면서 단 한 치의 동요도 없었다.

잠시 실례라는 사실도 잊고 남자를 뜯어보고 말았다.

민망함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각하. 로베르 공작가의 장녀, 리엘리 로베르입니다.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르반 카넬로웰입니다. 저야말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녀.”

‘목소리도 좋네.’

딱 듣기 좋을 정도의 나지막한 저음이었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다독이며 애써 태연함을 가장해 웃고 있는 와중에도 내 시선은 남자, 아르반에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티 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내가 이렇게 외모를 밝히는 사람이었다니…!

조금 자괴감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이런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그렇게 열심히 그의 잘생김을 감상하는데, 문득 그의 왼쪽 팔이 눈에 들어왔다.

‘맞다, 이 남자 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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