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인터루드.(4)
* * *
정말 새로 태어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줄곧 물밑에서만 살아오다가, 비로소 밖으로 나와 숨을 쉬기 시작한 사람의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마음에 들어? 몸은 잘 움직이고?”
“최고인데요. 구체적으로 뭐가 달라졌다고 설명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뭔가 좋아진 기분은 들어요. 몸도 훨씬 가뿐해진 기분이고요.”
“음… 그래? 조금 이상하네. 대부분은 한번 떠났던 영혼을 몸이 잘 받아주지 않거든. 그래서 적응하는 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뜨끔한 부분이 있었다.
이 몸은 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다른 영혼을 한 번 받아들여 봤던 몸이니, 별다른 이상 현상도 겪지 않는 것이겠지.
물론 나로서는 떳떳하게 말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너스레라도 떨 수밖에 없었다.
“제가 조금 특이 체질인가 보죠.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애초에 시술 경험 자체가 그리 많지는 않으니, 표본도 적고.”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는 겁니까?”
“가장 간단한 테스트부터 해보도록 하자. 우선, 마나를 움직여봐.”
흐릿하게 눈앞에서 아른거리기만 하던 그것은 더 이상 미지의 존재가 아니었다.
이젠 나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또 다른 생명이나 다름없게 느껴졌으니까.
따라서, 훈련실을 떠도는 이 거대한 기류와 마주하는 것에도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잠깐, 잠깐! 멈춰!”
“네? 왜요?”
“이건 또 다른 시술의 실패라고 해야 하나… 너무 잘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네. 따로 기록해둬야겠어.”
그렇게 말한 클로에는 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에 무언가를 빼곡히 적어 나갔다.
딱히 흥미는 없었다.
어차피 내가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로 가득할 테니.
저런 것은 단순히 탐구자의 영혼만 존재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때는 나도 천재들을 이해해보겠답시고 종종 그들의 필기장을 훔쳐보곤 했었는데, 내용이 너무 어려운 것은 둘째치고, 자신만의 추상적인 언어로 기록되어 있던 탓에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내가 세레나의 말을 곧이 곧대로 잘 듣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베아트릭스와 비견될 바보 근육뇌라고만 여겼는데, 그녀의 연구자료를 본 뒤로는 절대 내가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물론, 주먹이 두렵다는 비중이 더 크긴 했지만.
“그래서, 갑자기 왜 멈추라고 하신 건데요?”
“친화력이 너무 높아. 자칫했으면 영혼이 마나와 동화됐을 수도 있었어.”
“그러면 어떻게 돼요?”
“나도 정확히는 몰라. 사례가 너무 적어서. 대체로는 자아를 잃는 것 같았어. 광인이 된다거나, 뇌엽절리술을 받아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 같이 된다는 뜻은 아니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벗어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득도한 성인이라도 된 것마냥 굴더라고.”
뭔지 알 것 같다.
왓X맨에 등장하는 닥터 맨X탄 비스무리한 말을 하게 된다는 소리잖아.
‘나는 마지막으로 공포라는 감정을 느껴본다.’ 같은 대사나 치고.
절대로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다.
“참 다행이네요. 제가 그 꼴이 나지는 않아서.”
“아무튼, 방금 전의 그 행동으로 네 마나와 능력의 성질은 대충 파악했어.”
“뭔데요?”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이 정도로 들떠본 적은 디X루가가 용성군을 배울 때와 첫 월급을 받았던 날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정적, 고요, 침착. 처음엔 느껴지는 바가 없어서 성질 자체가 없는 건가 의심했지만, 과할 정도로 차분한 게, 그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네 성질은 부동(不?)이야.”
“부동이라, 잘 와닿지 않는데요.”
“간단하게 말하면, 주변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이야기지. 너 또한 남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고. 비슷한 경험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랬던가?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그랬더니, 한 가지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보라색 검신의 효과를 처음 깨달았을 때.
어쩐지 궁극의 경지에 오른 것치곤 다소 심심하더라.
고작 ‘상태이상 경감’이 뭐냐고.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건 사실 보라색 검신의 효과가 아니라, 내 마나와 사상력이 가진 성질이었다.
“네, 확실히 의심 가는 데가 있어요.”
“그래, 그럼 이제 그걸 단련하는 일만 남았구나.”
“이걸 무슨 방식으로 단련해요?”
“지금 여기엔 굉장한 양의 마나가 떠돌고 있지?”
“그렇죠.”
“이 마나의 주도권을 놓고 너와 내가 겨루는 거지. 쉽고 간단하지? 마나 조작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엔 이만한 방법이 없어.”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자신과 싸우라 이 말을 한 건가?
물론 진짜 싸움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갭의 차이가 너무 심하잖아.
“제가 이사장님이랑 어떻게 겨룬다고 그래요.”
“걱정하지 마. 봐주면서 할 테니까. 본래의 힘은 1푼도 쓰지 않을 거야.”
“그러면 조금은 낫긴 하겠지만,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은데.”
“여러 번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그렇다면야, 뭐.”
“그럼, 자리에 앉아서 마나의 움직임에 집중해보렴. 슬슬 시작할 테니까.”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아, 대기 중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는 마나를 끌어모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간신히 거머쥔 그것들은 순식간에 내 손에서 벗어나, 까마득한 하늘 너머에서 소용돌이치는 별빛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마치, 클로에의 부름에 응하기라도 하듯.
그 과정, 즉,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초 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항복의 의사를 전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클로에는 곧바로 그 행동을 제지하려 나섰다.
“아직 끝 아니다. 계속 집중해.”
이미 다 끝난 마당에 뭘 더 하려는 생각일까.
내 근처엔 마나 부스러기조차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마나의 급류가 나를 덮쳤다.
용광로에서 새어 나오는 열풍을 직격으로 맞은 듯한 작열통이 뼛속 깊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저항해! 네 걸로 만들어! 왜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고 있는 거야!”
왜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고 있냐니.
정신줄을 붙잡고 있는 게 고작이니까.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도 저런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결국, 내가 눈을 까뒤집고 쓰러지는 꼴을 보고서야 클로에는 그 고문 행각을 멈춰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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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채로 통구이가 되는 기분이라고요. 어떻게 버텨요. 그걸.”
“…미안해. 이건 정말 내 잘못이야.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어. 대부분은 숨이 막힌다거나, 엄청나게 덥다고 생각하는 선에서 끝나거든.”
“됐어요. 실수 정도는 할 수도 있죠. 특이 케이스라고 하셨으니까. 처음 겪는 상황인 거잖아요.”
클로에가 이렇게 안절부절해하는 모습은 처음이다.
항상 여유롭고 나른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사람인데.
“안 되겠어.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는 걸로 하자. 훈련은 다음으로 넘기고.”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방금 같이만 하지 않으면, 버틸 만할 것 같은데.”
“그게 잘 안되거든. 연습을 좀 해야 할 것 같아. 개미가 밟혀 죽지 않을 정도로 살살 걸으라는 거랑 비슷한 느낌이야.”
그래, 개미 따위에 지나지 않는 내 죄지.
어쩌겠냐.
여러모로 씨발같은 과정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하게 만들어준 건 분명 사실이니, 그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클로에도 나쁜 의도를 가지고 내게 이런 짓을 한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고요.”
“나도 연습해올 테니, 너도 마나 조작의 숙련도를 키우고 와. 이건 널 훈련시키는 거지. 내가 훈련하는 게 아니잖아.”
“당연히 그래야죠.”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솔직히 별로 자신은 없다.
세레나의 강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물론, 다시 태어난 이 몸이 잘 받쳐준다면 또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그나저나, 저 담배, 분명 스트레스받을 때만 핀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딱히 피울 이유가 없지 않나?
“그건 또 왜 피우고 계신 거예요.”
“어제 한 개비 피우니까 자꾸 생각이 나더라. 이사장실이야 다른 교수들이랑 생도들이 오가는 자리니 자중할 수밖에 없지만, 여기는 나와 오스카만의 공간이거든. 속 시원하게 피워도 아무런 상관이 없단 말이지. 내 공간에선 내 마음대로 피워도 되지 않아?”
“마음대로 하십쇼. 그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정정하신데, 그까짓 담배 좀 피운다고 일찍 돌아가시진 않겠죠.”
“이 자식이!”
위기를 감지한 나는 재빠르게 클로에에게서 도망쳤다.
확실히 반응이 격해서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아이나는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기만 하고, 프리실라는 무덤덤하게 받거나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편이라, 이런 장난을 치기가 어렵다 보니.
만일 클로에가 친구였다면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사이였을 텐데.
조금 아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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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박성진 생도한테 시술 이후로 외모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는 걸 말 안 해줬네. 뭐, 별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 * *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모퉁이에서 코끝을 쫑긋거리던 세레나와 마주쳤다.
그런데,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이상할 정도로 매섭다.
아니, 세레나의 눈이 무서운 건 당연한 거지만, 이번엔 그 느낌이 조금 달랐다.
진짜 적의가 깃들어 있었으니까.
“너, 대체 누구야.”
“네?”
“누구냐고.”
“교수님이 가르치는 박성진이죠. 누구긴요.”
“거짓말하지 마, 진짜를 돌려내!”
세레나의 어깨가 잠시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실신하는 일이 많은 날이네.
참 이상한 날이었다.
* * *
“…그러니까, 외모도 조금 달라지고, 실력도 갑자기 확 는 듯한 분위기에다, 안 나던 담배 냄새까지 나서 그랬다, 이거죠?”
“응… 진짜 미안해.”
세레나는 나를 꽉 껴안은 채로 놓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러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고.
저항?
그런 게 무의미하다는 것쯤은 진작 알아차린 지 오래다.
대화는 애초에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힘으로 이기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이야기였으니까.
즐기는 자가 되기로 마음 먹은거지.
이 이상야릇한 향기도, 부드럽고 탱탱한 흉부 장갑도, 경주마도 울고 갈 탄탄한 하체도.
“근데, 웬일로 네가 뭐라고 안 하네? 분명 떨어지라고 그럴 줄 알았는데.”
“포기했습니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까칠한 맛이 없어진다니 아쉽네. 그래도 순종적인 것도 나쁘지 않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온몸을 내게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동물들이 영역표시를 위해 자신의 냄새를 묻히는 것처럼.
아무리 봐도 악마라기보단 짐승 같단 말이지.
요사스러운 생김새는 악마가 맞지만, 행동거지는 사특하다기보단 그냥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은 전 남자친구한테도 이러고 지내셨어요?”
“그런 거 없는데? 좋아했던 남자조차 없는데 무슨.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짓 절대로 안 하지.”
참 다행이군.
나한테만 이런다는 이야기니까.
“그래요.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짓 하면 잡혀가니까 하시면 안 돼요.”
“그럼, 너한테는 앞으로 해도 된다는 소리지?”
세레나는 이걸 유도했다는 눈치였다.
삐뚜름하게 말려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 사이로 빛나는 날카로운 이빨이 그 증거였다.
역시 짐승 같아 보여도 악마는 악마라는 건가.
제대로 말렸네.
여기 와서 없는 이야기라고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네… 좋을 대로 하세요.”
그 말을 후회하게 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슨 사람을 장난감 가지고 놀 듯이 그렇게 만지작거릴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