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인터루드.(2)
* * *
“하아… 골치 아픈 사건을 떠맡았구나.”
“저도 이렇게까지 될 줄 알았으면 한다고 안 했죠.”
사건의 진행 상황을 들은 클로에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귀찮은 일을 맡기 싫어서 일선에서 은퇴하고 아카데미 이사장직이나 일임하고 있었던 건데.”
“죄송합니다.”
“아냐, 네가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히어로가 되고 나면 비슷한 일을 계속 경험하게 될 텐데, 예습이라고 생각하면 돼. 단지, 이번 사건 같은 경우는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내가 된 게 마음에 안 들 뿐이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계획에 대한 이사장님의 생각도 궁금하고요.”
그녀는 말없이 펜만 빙글빙글 돌려대고 있었다.
답답하겠지.
까마득한 후배, 그것도 인턴이나 다름없는 녀석이 초대형 폭탄을 들고 나타났으니까.
공식적인 지원이라도 가능했다면 또 몰라.
물 밑에서 은밀하게 도와줘야 하는 일이다 보니,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가 많아질 수밖에.
“진조를 처치하는 것 자체는 내 생각에도 불가능한 일이라곤 생각되지 않아. 세실리아, 에스메랄다의 조력까지 있다면 승산은 충분해. 프리실라도 있고.”
“역시, 머큐리 쪽이 문제인 건가요?”
“전부 다 문제지! 이 천치 같은 놈아!”
클로에는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책 하나를 집어 들어, 곧바로 내 머리를 후려쳤다.
그것도 진심을 실어서.
나도 모르게 빼액 하는 신음을 내지를 정도로 아팠지만, 나는 그 고통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무어라 항변이라도 했을 텐데, 이 일은 전적으로 나에게 책임이 있는 사건이다 보니.
“죄송합니다.”
“머큐리 쪽이 훨씬 골치 아픈 일인 건 맞아. 하지만, 스티븐과 전면전을 치르는 것도 그렇게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야. 정말 자신 있어?”
“저는 이미 각오했어요. 성진이랑 함께하겠다고.”
먼저 대답한 쪽은 프리실라였다.
그리고, 그녀는 결의를 다진 눈으로 나와 클로에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였다.
부디 허락해달라는 듯이.
확실히 이걸 보니, 나약했던 예전 시절과는 달리, 물심양면으로 많이 성장했다는 느낌이 드네.
분명 감동적이고 흐뭇한 장면이었지만, 묘하게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의미라서 그런지, 나로서는 부끄러움에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진심이라는 이야기구나.”
잠자코 먼 산만 바라보던 클로에가 돌연 서랍을 열어 작은 종이곽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피우기만 해도 폐암에 걸릴 것 같아 보이는, 굵직한 시가 몇 개비가 들어있었다.
저런 걸 도대체 어떻게 피우는 걸까 잠시 고민도 들었으나, 이내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술이랑 비슷한 맥락이겠지.
어지간한 담배 따위론 이 몸에 진딧물만 한 자극조차 주지 못할 테니까.
특히나, 클로에의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더더욱 강한 자극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그런 담배는 왜 가지고 계신 겁니까?”
“예전에는 오스카를 따라 종종 피우곤 했거든. 그 녀석은 여전히 피우고 있지만, 나는 손을 뗐지. 그래도, 담배는 끊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욕구를 참는 거라는 말처럼 완전히 끊지는 못하겠더라. 스트레스를 왕창 받은 날에는 나도 모르게 피우게 되더라고.”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죄송한데요.”
“됐어. 너보다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닌 녀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너희들도 피울래? 이거 돈 주고도 못 피우는 건데.”
아무리 이 아카데미가 자유를 추구하는 공간이라곤 하지만, 이사장이 먼저 나서서 생도들에게 담배를 권유하다니.
근데, 그게 클로에라고 생각하니 또 이해가 간단 말이지.
기왕 주는 거, 한 번 피워라도 볼까.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 여기 불.”
클로에는 손끝에 작은 불씨를 만들어 내게로 내밀었다.
하지만, 나는 섣불리 입에 문 담배를 가까이 댈 수 없었다.
옆에서 프리실라의 따가운 눈총이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생각해보니, 저 심장이 안 좋아서 못 피울 것 같네요.”
“그럴 거면 진작 말했어야지. 아깝게 한 개비 버렸잖아.”
진짜 많이 아까웠던 모양이다.
그놈의 담배 한 개비가 뭐라고 한참을 꿍얼거리는지, 원.
그래도 클로에의 잔소리를 듣는 편이 프리실라의 원망을 사는 것보단 나았기에,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유혹에 넘어가서 담배를 입에 물은 내 잘못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사장님께선 마땅히 생각나는 게 있으신가요?”
“조용히 있어 봐. 지금 생각 중이니까.”
등받이를 뒤로 돌린 그녀는 매캐한 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그리고, 불씨의 끝자락이 완전히 닳아 손마디에 걸쳤을 즈음, 클로에는 방향을 다시 틀어 우리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좋아, 이번 일은 내가 해결해주도록 하지. 그런 목적으로 설립한 동아리라는 걸 알고도 허용해준 내 불찰이니까.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괜찮겠니?”
“따를 겁니다. 어떤 것을 내 걸더라도.”
“넌 오늘부터 나한테서 직접 훈련을 받게 될 거다.”
“네? 이사장님이 직접 가르치시겠다고요?”
“그래.”
갑자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지 모르겠네.
밥 먹는 것도 귀찮아서 거르는 인간이 몸소 나를 가르치겠다고 하다니.
애초에 이 사람,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이나 있을까 의문이다.
“저, 무례한 이야기라는 건 알지만, 솔직히 이사장님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건 상상이 안 가는데요.”
“그러고 보니, 저도 클로에 이사장님이 누군가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네요.”
이렇듯, 이것만큼은 프리실라조차 인정하는 이야기였다.
원작에서도 클로에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캐릭터는 몇몇 늙어빠진 노인네들을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는데, 다른 이들이라고 다를까.
의심이 갈 수밖에 없지.
“야, 돈 주고도 못 받는 내 가르침에 의심을 품다니. 어처구니가 없네. 너희가 알고 있는 전설적인 원로 히어로들 중에서 내 가르침을 받은 게 몇 명이나 되는 지는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니?”
“아니, 그 공로는 물론 저도 인정하죠. 근데, 제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이사장님이 누군가를 가르친 지 오래되다 보니, 아무래도 감을 많이 잃지 않았을까, 그 이야기죠. 게다가, 그 사람들은 날 때부터 천재였던 걸 이사장님이 조금 다듬어 줬을 뿐이지만, 저는 진짜 둔재인걸요.”
길길이 날뛰기 시작한 클로에를 달래주는 데엔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온갖 추어올리는 말에도 삐졌다는 티를 계속 내고 있었으니까.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애 같아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구나 싶었다.
“마지막 기회야. 나한테서 배울 거니, 말 거니.”
“암요. 당연히 배워야죠. 천경의 대삼각 중에 스피카를 맡고 계신 분이잖습니까. 이런 영광이 또 찾아올 리가 없죠.”
“그래, 내일부터 훈련장에서 보자.”
“그게 전부예요? 뭔가 훈련 방향에 대해서 알려주거나 그런 것도 없이?”
“귀찮으니까 빨리 나가. 나 잘 거야.”
등받이를 기울인 그녀는 어느샌가 안대와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런 사람의 뭘 믿고 가르침을 받겠느냐고.
물론, 클로에가 절대강자이자, 이 세계의 지존과도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사람을 가르치는 재능이란 건 따로 있잖아.
내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를 가르치려고 든 사람들은 죄다 천재지만 미치광이였거든.
니힐리스, 세레나만 보아도 그렇다.
교육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자신의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날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했던 걸 보면 니힐리스도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고, 강의 시간조차 아닌데 사랑과 교육을 빙자하여 내게 폭행을 일삼던 세레나 역시 정상일 리가 없었다.
그런 마당에, 클로에까지 합류한다고 치면,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는 나로서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 둘보다 나쁘면 어떻게 되겠냐고.
곡소리도 못 내본 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안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는 없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조합과 밸런스가 너무 좋았으니까.
마나글레이브 검술은 니힐리스, 체술은 세레나, 마나 컨트롤 능력은 클로에.
이걸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절대 없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대신, 그만큼 많이 고생하게 되겠지만.
* * *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정말로 괜찮겠어?”
“쉽지 않기는. 나한테는 가장 쉬운 결정이었는 걸.”
프리실라는 일말의 지체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말려선 안된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존중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사실 나도 그래.”
나는 자신 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는 살짝 내려온 내 앞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며 말했다.
“됐다.”
“뭐가?”
“잘 보이는 지금이 더 보기 좋다고. 처음 만났을 때는 아예 눈을 가리고 다니다시피 했잖아?”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는 둔감한 나조차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응, 웃으니까 더 좋네.”
“누구나 웃는 모습이 보기 좋기는 하지.”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른 것 같기도. 아이나는 무뚝뚝한 표정이 더 매력적이고, 세레나 교수님은 웃을 때 살짝 무섭거든.”
“그런가? 뭐, 단순히 행복해한다는 것에 의의를 둬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웃는다는 건, 행복하다는 뜻이잖아.”
“글쎄, 나는 행복보단 기쁨에 더 가깝다고 생각해. 물론, 기쁨도 행복의 갈래 중 하나인 건 맞아. 하지만, 그게 행복의 전부는 아니잖아? 내가 생각하는 행복이 완성되는 순간은,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었을 때야.”
뭔가 철학적이네.
‘기쁨만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라.
그런 것 같기는 하다.
기왕이면 기쁨을 나누는 쪽이 더 낫기는 하지.
하지만, 프리실라의 말마따나, 슬픔조차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더 진솔한 사람 같이 느껴지는 건 분명하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나는 아직 많이 미숙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누군가를 기쁘게 만들어 주겠다는 1차원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으니까.
아픔을 나눠 갖겠다는 생각은 거의 해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너랑 있는 순간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거야. 아, 조금 전에 담배 꼬나물고 있었을 때는 빼고.”
프리실라가 미소 지었다.
분명 잔잔하고 옅은 표정이었으나, 묻어나는 감정만큼은 여느 때보다도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약속했다.
앞으로도 계속 저 미소를 짓게 해주겠노라고.
그래,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