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 Happy Hour. (84/173)

〈 84화 〉 Happy Hour.

* * *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빌런은 누구였어요?”

“크리스토퍼가 가장 까다로웠던 거 같아.”

“난 클로에와 조금 다르게, 천마가 가장 힘들었네.”

“크리스토퍼는 죽었고, 천마는 지금 디스트럭트 오비탈 7에 있죠?”

“그렇지.”

디스트럭트 오비탈은 우주의 정지 궤도에 위치한 13개의 기지다.

자라탄, 파이톤, 그리폰에도 수감 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빌런들을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지로, 기지마다 단 한 명의 빌런만 수용하고 있다는 점만 봐도 얼마나 강한 녀석들인지 알 수 있다.

“근데, 천마같은 녀석들은 바로 죽이는 게 낫지 않나요? 왜 굳이 그런 위험한 녀석들을 잡아두는지 모르겠어요.”

“디스트럭트 오비탈에 수용된 녀석들은 대개로 그러한 녀석들이지. 위험함도 위험함이지만, 죽였을 때의 손해가 더 큰 녀석들.”

“왜 그런 거죠?”

“천마는 계승되게 되어있다. 그 녀석을 죽이더라도, 다른 제자 중 누군가가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되어있어. 당장은 죽이는 게 이득 같아 보이겠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아. 천마를 두 번이나 상대하는 건 우리에게도 고행에 가깝다.”

뭐, 자신이 천마라고 지칭할 뿐, 실제 무협지에 등장하는 천마 같은 존재는 아니다.

그냥 타성(??)이라는 힘을 다루는, 무지막지하게 강한 빌런일 뿐.

“크리스토퍼나 천마를 제외하곤 또 누가 있어요?”

“역시 그 녀석이려나?”

“일곱 개의 검좌 중 제 1좌이자 창세의 좌라 불리던 놈을 말하나 보군. 확실히 그 녀석은 강했다.”

“아포칼립토는… 고전했었지. 우리가 그 놈을 몇 번 정도 죽였더라?”

“정확히 서른일곱 번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군.”

제 1좌면 자색기사단의 수장 격인 인물이란 이야기인데.

패배하긴 했어도, 오스카와 클로에를 동시에 상대할 정도라니.

아무리 제 1좌에는 못 미치는 3좌라지만, 새삼 니힐리스의 강함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군.

“근데, 우리는 현장에서 뛰지 않은 지 워낙 오래돼서, 최근 빌런의 트렌드는 잘 몰라.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발렌타인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그럼, 세레나 교수님은 상대했던 빌런 중에 누가 제일 까다로웠어요?”

“난 강한 빌런은 잘 몰라. 나도 한때는 빌런이었잖아? 그래도 굳이 상대했던 사람 중에서 가장 강했던 사람을 꼽자면, 그리폰 교도소의 교도소장이었던… 까먹었다. 아무튼 그 사람이 가장 강했던 거 같아.”

“그리폰 교도소 생활은 어때요?”

“오지 한복판에서 노숙을 해도 그거보단 좋을 것 같더라.”

클로에와 오스카를 향한 질문 세례가 계속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 둘은 조금의 귀찮은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지금 저 둘의 기분이 좋다는 점도 한몫했겠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니었으리라.

아마도 우릴 배려해주는 거겠지.

클로에와 오스카가 기본적으로 친절한 사람이라곤 하나, 지위가 지위인 만큼, 고작 생도에 불과한 우리가 저들과 독대할 일은 좀처럼 흔치 않다.

그래서, 다른 생도들이 이렇게 들뜬 것이다.

전설적인 히어로에게 묻고 싶었던 것들을 잔뜩 질문할 기회니까.

클로에와 오스카는 그런 우리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거고.

“근데, 이사장님이랑 학장님이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절엔 엄청 힘들었다면서요.”

“말도 하지 마. 나 때는 말이야….”

이 대사만 등장하지 않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 * *

세레나는 괴물이었다.

악마를 닮은 그녀의 외모를 비하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로.

술고래로 유명한 카타리나와 오스카조차 맥을 못 추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마당에, 오직 그녀들만이 취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물론 클로에는 능력으로 자신의 취기를 조절하고 있는 것이니, 이 파멸적인 연회장의 한복판에서 살아남은 이는 사실상 세레나 하나뿐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뭐, 엄밀히 따지면 세레나도 악마화란 능력 덕에 취하지 않고 있는 것에 가깝긴 하지만….

악마화는 일반적인 능력과는 조금 다르니까, 클로에와 놓고 비교하기엔 어폐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레나, 정말 악마가 아닌가 의심되는 주량이네요.”

“평소보다 좀 많이 마시긴 했는데, 이 정도면 버틸 만해요.”

“슬슬 놀 만큼 놀았으니, 이제 해산할까요.”

“그래요. 살아있는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부축해서 방에 데려다주도록 하죠.”

뭐야, 가볍네.

아, 지금 내 몸은 예전의 그 몸이 아니지.

이 새끼들을 질질 끌고 갈 생각에 시발시발거리고 있었는데.

가끔 내가 초인이 됐다는 사실을 종종 잊고는 한다.

술에 절어 주검 같은 꼴을 하고 있는 알프레드를 등에 업으려던 순간, 아이나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따 새벽에 수영장 풀로 와.”

“뭐?”

“그냥 와.”

5성급 호텔인 만큼, 이 호텔에는 대형 풀이 하나 있다.

외부로 트여있어, 프라하의 전경도 한눈에 들어오는 데다, 작은 바까지 딸린, 최고의 풀이지.

단점이라면, 좋은 만큼 사람들이 바글거린다는 거.

그래서 두 번 다시 들리지 않던 곳인데.

늦은 새벽인 지금에는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 좀 이따 보자.”

오, 다시 생각해보니 굉장히 가슴 뛰는 일이다.

아이나의 수영복 차림을 볼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건 못 참지.

이 개새끼들은 대충 침대에 집어 던져놓고 빨리 수영장으로 달려가야지.

* * *

원래 히로인의 수영복을 처음 마주하는 시기는 보통 여름방학이다.

아주 흔한 클리셰지.

하지만, 나는 그 중요한 시기를 괴로운 수련으로만 보냈다.

아, 이것은 그에 대한 보답인가?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 도착하니, 하얀 머리칼의 소녀와, 검은 머리칼의 소녀가 바에 앉아있었다.

둘 다 카디건을 걸친 뒷모습이라 어떤 수영복 차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길게 뻗은 맨다리로도 내 리비도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한 잔 어때?”

허리케인 글라스에 담긴 그랑 미모사를 프리실라가 요염한 표정으로 흔들어 보였다.

전체적으로 순둥순둥하고 활기찬 프리실라의 이미지엔 다소 맞지 않는 행동이지만, 뭐 어때.

귀엽잖아.

이럴 때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주절먹이지.”

“그건 또 뭐야.”

“주면 절하고 받아먹는다는 뜻.”

두 명이 피식하고 웃었다.

나는 그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듯, 넙죽 엎드려 그 잔을 받았다.

“그래, 우승 축하하는 의미로 건배하자.”

유리잔이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내었다.

당연히 나의 시선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사팔뜨기가 될 것 같은 기분이군.

카디건 아래라곤 하나, 한쪽에는 아이나의 보라색 비키니가.

반대편에는 프리실라의 검은색 비키니가 있으니, 당연한 거다.

이런 광경은 반드시 한눈에 담아야 한다고.

“눈 찢어지겠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네.”

“근데, 웬일로 너희들이 이런 기특한 짓을 다 하냐?”

“우승 축하한다는 의미로 이벤트를 해볼까 했지.”

이런 이벤트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좀 더 자주 해달라고.

“근데, 프리실라도 같이 온 건 무슨 이유였어?”

“프리실라가 낸 아이디어였으니까.”

“둘이 어쩌다 그렇게 친해진 거야?”

“과거 이야기를 들었거든.”

이런, 모르는 이야기다.

유감스럽게도, 난 과거의 내가 프리실라에게 어떤 플래그를 꽂았는지 모른다.

그냥, 입학 시기에 어떤 일이 있었다 정도만 알 뿐.

“무슨 과거?”

“봐봐, 얘는 기억 못 한다니까.”

“얘한테 너는 그 정도였나 봐.”

“아니,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걸 기억 못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분위기가 살짝 차갑게 변한다.

물론, 둘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도,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손가락을 빠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때 기억 안 나? 내가 너한테 하소연하던 거. 입학 탈락 소식에 화난 부모님이 귀국 비행기를 취소해버렸다고 하니까, 네가 선뜻 그냥 표를 예매해 줬잖아. 넌 괜찮다면서. 그래서 나중에 꼭 보답하겠다고, 연락처라도 달라고 했더니, 그냥 지나가는 일인 셈 치라고, 만약에라도 다시 만날 일이 생기면 그때 갚으라며.”

아무래도 과거의 나는 상당히 대담했던 모양이네.

아니, 대담했다기보단,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으니까 한 소리였으려나.

어차피 자신의 죽음을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으니, 다시 볼일도 없었으리라 생각했을 거고.

그러니까 그 비싼 비행기 표를 그냥 줬겠지.

과거의 나에게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괘씸하기도 하다.

프리실라 같은 미녀와 안면을 트게 해줬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쁘지만, 그 비행기 표만 아니었어도 내가 두 달을 굶주리며 살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서, 이렇게 갚으러 왔지.”

“기억날 거 같아.”

“이자까지 쳐서 후하게 갚았으니까, 만족하겠지?”

“뭐로 갚았는데?”

“이걸로.”

그녀가 카디건을 벗었다.

수정처럼 하얗고 맑은 그녀의 머리칼, 피부, 눈색에 대비되는 검은 색 비키니가 눈에 들어온다.

물개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밤이 늦은 관계로 가볍게 세 번 정도만 손뼉을 마주치기로 했다.

“그래. 씨게 갚았네. 고맙다.”

“…나는 어때?”

아이나의 보라색 비키니는 천의 면적이 더 넓었다.

하지만, 수줍어하는 모습의 갭 덕에, 꼴림만큼은 절대 프리실라에게 지지 않았다.

최고라고 말하려던 순간.

­쾅!

개방된 수영장 풀인 이곳은, 호텔의 위층들과 바로 연결된 구조다.

즉, 호텔 옥상에서 떨어지면, 바로 수영장으로 다이빙하게 되어있다.

풍덩 같이 귀여운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을 낸 대상의 정체는 바로, 옥상에서 다이빙을 시도한 세레나였다.

“어… 미안하다. 좋은 분위기를 방해한 것 같네?”

나는 오늘 처음으로 아이나의 안색이 붉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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