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3화 〉 가벼운 승리, 무거운 뒤풀이. (83/173)

〈 83화 〉 가벼운 승리, 무거운 뒤풀이.

* * *

짐작했던 대로네.

나, 모용린, 로렌스가 각각 1승을 챙겨와 동점을 만들고, 최종전을 치른다.

최종전은 볼 필요도 없이 우리의 승리고.

형식 상 승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야, 그 로렌스가 나가는데, 누가 막겠어.

최종전의 진출 멤버는 팀 내 회의를 통해 선정하는 구조라곤 하나, 그건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상식적으로 최종전에 캡틴 이외의 멤버가 나가는 경우가 몇이나 있겠는가.

물론 상대 캡틴을 상대로 압도적 상성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해당 멤버가 출전하는 때도 있다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설령 상성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쳐도, 보통 캡틴을 맡는 이들과 일개 생도 간에 존재하는 갭의 차이는 상성 우위 정도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로렌스는 그 캡틴 중에서도 정점에 선 존재니,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다.

­이번 올림피아드 우승팀은 트리니티 아카데미 팀입니다!

우승이 확정되자, 모두가 옆의 사람을 얼싸안으며 포효했다.

다만, 내 옆에 있던 사람은 아이나가 아니라 세레나였던 관계로,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세레나의 흉포한 흉부 장갑에 의한 호흡곤란은 덤이었고.

그 고통에서 풀려나 대기실 밖으로 나가자, 기회를 잡았다는 듯, 프리실라와 아이나가 내게 안겨들었다.

안겨들었다기엔, 덮쳐졌다는 표현이 맞겠지만, 그건 어감이 조금 다르니까.

당연히 이 순간을 오래도록 만끽하고 싶다만, 아쉽게도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있고, 메달 수여식부터 인터뷰까지, 해야 할 일이 제법 많이 남아있었기에, 나는 양팔에 찰싹 붙어있는 두 송이의 꽃을 떼어냈다.

““우승 축하해!””

곧바로 S클래스 멤버들의 헹가래가 이어졌다.

어지간히도 기뻤나 보네.

내색을 잘 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 빈센트조차 대열에 합류할 정도였으니.

­트리니티 아카데미가 오랜만에 명예를 되찾는군요!

­그렇습니다.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분명히 강한 아카데미이고, 실제로 매번 올림피아드 상위권에 개근하고 있었지만, 우승을 못 한 지는 제법 오래되었거든요!

­게다가, 결승전 상대였던 매그놀리아 아카데미가 그렇게 만만한 상대도 아니고요.

­자, 이제 메달 수여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를 비롯한 아홉 명이 무대의 중심부에 나란히 줄을 지어 섰다.

한쪽에는 아홉 개의 메달이, 반대편에는 커다란 트로피가 놓여있다.

확실히 중간고사랑은 느낌이 다르긴 하네.

그것도 보는 사람이 많기는 했지만, 이런 실질적인 보상 같은 건 없었는데 말이지.

“축하합니다. 박성진 생도. 인상깊은 경기였어요. 다음 올림피아드에도 참가해서 좋은 모습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메달을 수여 받았다.

태어나서 내가 몸에 달아본 반짝거리는 것이라곤 돌반지, 군번줄뿐이었는데, 두 번째 인생에선 커플링도 껴보고, 메달도 목에 걸어보네.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군.

“준비해온 세레머니가 있으시다면, 하셔도 좋습니다.”

“나! 내가 할래!”

“…그러시죠.”

어디로 엇나갈지 모르는 세레나의 세레머니라니, 불안하다.

제발 적당한 것으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안돼.

이 먼 거리에서도 클로에의 경쾌한 웃음소리는 들려온다.

아니, 모두가 얼어있으니, 클로에가 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바로 옆에선 오스카가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저도 이해합니다.

학장님.

아무리 세레나가 미친년이라고 하지만, 설마 진짜로 우승 트로피에 샴페인을 부어 마실 줄은 몰랐으니까요.

심지어 원샷까지 때리네.

세레나가 들어올린 트로피를 자기 머리 위로 기울였다.

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진다.

마치, 잔이 비어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뭐해? 우승했잖아? 빨리 환호해! 소리 질러!”

다들 벙찐 얼굴로 세레나를 바라본다.

심지어 로렌스와 아이나조차도.

그녀들의 사전에도 이런 세레머니는 없었던 모양이다

클로에와 오스카에겐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이 어수선함을 참지 못한 사회자가 제지에 나섰다.

“어… 그럼 우승자 대표, 박성진 생도, 모용린 생도, 로렌스 생도와 인터뷰를 진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박성진 생도입니다. 지금 어떤 기분이신가요?”

“약간 좀 현실감이 없네요. 저는 이런 자리랑 연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의외의 답변이네요. 중간고사 공개 토너먼트에서는 굉장히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많이 하셨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두 번째 질문입니다. 큰 대회라서 긴장을 많이 하셨을 거 같은데,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이셨습니다. 차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는지?”

“솔직하게 말하면, 지는 게 불가능한 엔트리라고 생각해서, 당연히 우승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조금 편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노력이야 누구나 하는 거고.”

누군가가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누군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지만.

하지만 그게 사실인데 어쩌라고.

이 멤버로 우승 못 했다?

아마 이번 올림피아드를 담당했던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교원들은 죄다 경질당했을걸.

“솔직한 답변 감사합니다. 그럼 마지막 질문하고, 모용린 생도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경기를 봐주신 시청자분들이나, 박성진 생도에게 애타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을 다른 히어로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내년에도 좋은 모습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좋게 봐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그 뒤의 인터뷰 내용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모용린이야 원체 바른 생활 소녀로 유명한 캐릭터다 보니 재밌는 답변 따위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고, 로렌스는 대외적으로 이미지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스타일이라, 상투적인 답변만 내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시커먼 속내는 어떨지 모른다만.

“알겠습니다. 모두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승 진심으로 축하하고요. 다들 큰 박수로 환호해주시길 바랍니다!”

무대에서 내려와 익숙한 장소로 돌아왔다.

장소가 익숙하다기보단, 장소에 있는 사람들이 익숙한 거겠지만.

“이제 우리 축하 파티하러 가?”

“그렇겠지.”

“어디로 가는데?”

“이사장님이 예약해두셨대. 가 보면 알겠지.”

“하여튼 저년은 처먹을 생각밖에 안 해.”

* * *

과연 통이 큰 게 클로에답다.

미슐랭 3스타 짜리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리다니.

“이건 좀 짜네.”

“죄송합니다. 다시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얘는 맨날 다 짜다고 하는 애니까 무시하세요. 그냥.”

평행세계의 한국인이라도 입맛은 똑같구나.

나만 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네.

그걸 입 밖으로 낸 것은 천현우였지만, 나도 솔직히 조금 짜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백성연도 표정에서 그것이 드러나고 있었고.

물론 그녀 딴에는 저게 열심히 연기하는 거겠지만, 내 눈에는 실망한 게 다 보인다.

‘미슐랭 3스타치곤 뭔가 실망스럽네’라는 게 다 보인다고.

물론, 이건 백성연의 연기 실력이 형편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내 눈치가 과하게 좋은 거다.

사실 나와 같은 생활을 하면 누구나 눈치가 과하게 좋아질 수밖에 없지.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가 한번 생각해보라.

프리실라를 제외하면, 하나 같이 어딘가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들 뿐이지 않은가.

목석이나 다름 없는 아이나.

뇌까지 마나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니힐리스.

상식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광인, 세레나.

친한 사람이라는 게 다 이 모양이니,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그들의 심경 변화를 잘 예측해야 했다.

“그래도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라서 다행이네요. 유럽으로 휴가를 나갈 때 자주 오는 식당인데, 제법 괜찮죠?”

“너는 아카데미에 있는 날보다 휴가를 나가는 날이 더 많지 않나?”

“할 일을 다 하고 노는 게 뭐가 나빠?”

클로에의 황당무계한 대답에 오스카가 실소했다.

그래, 이건 내가 봐도 클로에가 너무 양심 없긴 하다.

“네가 할 일을 나한테 죄다 떠맡겼으니, 당연히 너는 할 일이 없겠지.”

“그러게, 누가 내기에서 지랬어? 네가 이겼으면 됐잖아. 그럼 적어도 한 달은 너도 휴가를 떠날 수 있었을 텐데.”

“후,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군.”

내기?

둘이 무슨 내기라도 했나?

클로에가 자기 일을 오스카에게 떠맡기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니까 놀랍지 않다만, 클로에가 자진해서 오스카의 일을 해주는 경우는 드문데.

“그게 무슨 말이죠?”

“아, 세레나 교수를 놓고 내기를 했거든. 원래 세레나 교수는 S클래스나 U클래스의 담당 교수를 맡고 싶어 했는데, 오스카가 극렬하게 반대해서 못했어.”

이해는 간다.

세레나는 전과자니까.

보수적이고 FM대로 처리하는 걸 좋아하는 오스카 입장에선 반대하고 싶겠지.

“그래서 내기를 했어. 세레나 교수가 올해 안으로 그럴듯한 성과를 내면 직급을 교체해주고, 아니면 내가 오스카가 할 일을 한 달 동안 대신해 주는 걸로.”

“그건 원래 네가 할 일이었다. 말은 정확하게 해야지.”

“알 게 뭐야. 승자는 나잖아.”

아, 이번 올림피아드 선출 대표를 맡은 게 세레나였지.

하긴, 그 정도 공로라면 누구나 충분히 인정해 줄만 하지.

“아무튼, 그래서 세레나 교수는 내년부터 너희를 가르치게 될 거야.”

“축하합니다! 세레나 교수님! 당연히 S클래스로 오실 거죠?”

역시 제임스다.

누구보다 빠르게 기는 거 봐.

모든 남자가 여자에 미쳐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제임스 저 새끼는 좀 과해.

“축하합니다. 세레나 교수님. 앞으로도 잘 가르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이면 금방이겠네요. 저도 전부터 세레나 교수님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잘 부탁드립니다.”

“축하합니다!”

역시 세레나는 인기가 많네.

정신이 조금 이상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성격도 좋고, 많은 선남선녀 중에서도 군계일학 급으로 뛰어난 외모를 가진 세레나니, 그럴 법도 하다.

“모두 고마워. 다시 인사하자면, 아직 정식으로 부임하진 않았지만, 아마 내년부터 너희 중 일부를 가르치게 될 세레나 스튜어트야. 나도 잘 부탁해.”

“그래서, 어떤 클래스를 가르치게 될지는 정하셨나요?”

“아직 정하지 못했어. 정해지는 대로 알려주도록 할게.”

뭐, 보통이라면 S클래스를 선택하겠지.

급여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일은 훨씬 힘든 U클래스를 선택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나는 내년에 U클래스로 진급할 테니, 세레나를 볼 일이 적어지겠군.

“근데, 세레나 교수님,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요?”

“뭔데?”

“맨날 쓰고 다니는 그 모자. 어디 거예요? 저도 그거 사고 싶어요.”

“이거? 원래 그리폰 교도소의 교도관들이 쓰는 건데, 멋있어서 쓰고 다녀. 달라고 몇 년을 부탁했는데 안 주더라고. 그래도 친해진 교도관 중의 한 명이 출소 때 선물로 주더라.”

분명히 제복 모자처럼 생겨서 멋있는 건 맞는데….

그런 모자였어?

아니, 모자의 정체는 둘째치고, 저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해도 되는 건가 싶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그래서 세레나답다고 해야 할지.

“…못 구하겠네.”

“나 그 교도관 연락처 아직 있어. 하나 더 달라고 해볼까?”

“아뇨. 됐어요. 애초에 그걸 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왜? 나 두 번인가 잃어버렸었는데, 그때마다 걔한테 달라고 했어.”

클로에는 거의 울고 있었다.

오스카는 이미 자리를 떠나 발코니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빈센트는 이쑤시개가 자신의 잇몸을 찌르고 있는 지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세레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왜 이렇게 조용해? 우승한 기념으로 오늘 밤은 불태워야지! 레이브 업 몰라?”

오스카가 현명한 거였네.

…아무래도 이 자리를 몰래 빠져나가야겠어.

나는 주방으로 향하는 척하며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디가? 승리의 주역이나 다름 없는 사람이 빠지면 안 되지.”

전과자에게 검거당하는 모양새라니.

이런 건 있을 수 없어.

나는 급박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하지만….

오스카는 눈길을 돌린 채 담배만 뻑뻑 피워댔고, 클로에는 아예 즐기라는 답변을 내놓았으며, 아이나와 프리실라는 이미 포기한 모양새였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클로에의 말마따나 즐기는 수밖에.

조금 이상한 소리를 좋아한다는 점을 빼면, 세레나도 좋은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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