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 새로운 무기.(1) (85/173)

〈 85화 〉 새로운 무기.(1)

* * *

전생을 포함하더라도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았었던 적은 없었지.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내가 이렇게 들뜬 까닭은, 당연히 어제 내 눈에 새긴 그것에 있다.

심지어 그 광경을 목격한 게 나뿐이라니.

다시 볼 기회가 생긴다면,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다시 보고 싶다.

그래, 어제 보았던 그 세 미녀의 수영복 차림 말하는 거 맞아.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레나였지.

…아이나와 프리실라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물론 그녀들도 결코 어디 가서 꿇린다고 할 몸매는 아니지만, 세레나에 비할 바는 아니다.

우월한 기럭지, 알맞게 잡힌 근육, 그와 대조되는 풍만한 가슴과 골반.

그리고 거기에 마침표를 찍는 대담한 모노키니까지.

고등학생과 성인의 차이가 이렇게까지 역력한가 싶었다.

아이나와 프리실라에게도 풋풋함이라는 무기가 있긴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는 아직 세레나와의 간극을 좁힐 수 없지.

후, 아직도 그녀들의 모습에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세레나 교수님을 바에서 다시 마주칠 줄이야.

뭐, 재밌는 우연이지만, 놀랄 필요까진 없으리라.

모두가 잠든 조용한 시각에 홀로 잔을 홀짝이는 일은 애주가들에겐 흔하디흔한 일에 불과하니 말이다.

“가볍게 한잔만 하고 있었죠. 잠이 안 와서.”

솔직히 이렇게 좋은 날에 일찍 잠드는 건 아깝지.

잠이야 아카데미로 돌아가서도 얼마든지 잘 수 있고.

물론 많이 취했더라면 술기운 때문에라도 꿈나라로 떠났겠지만, 내 정신은 아직 멀쩡하거든.

“나도 옆에 앉아도 될까?”

“그럼요.”

“러스티 네일 한 잔이요.”

“알겠습니다.”

넘겨받은 잔 속에서 금빛 아지랑이가 이리저리 넘실댄다.

녹슨 못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고풍스럽다’라는 의미를 가진 러스티 네일.

말괄량이 같은 기질을 가진 세레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의외로 그것은 세레나와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였다.

기행을 일으킨다는 점만 제외하면, 세레나도 잘빠진 제복핏의 함장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외관의 소유자였으니까.

“수고 많았어.”

“교수님도요.”

“그리고, 정말 고마워.”

“뭐가요?”

“날 믿고 따라와 줘서.”

세레나가 내게 고마워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건 내 쪽인 것 같은데.

이번 올림피아드 우승에 내 공이 혁혁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을 나의 원맨캐리라고 치부하긴 어렵다.

일등 공신은 당연히 로렌스고, 이등 공신은 모용린이며, 나는 삼등 공신 정도에 그칠 뿐이니.

물론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한 공을 세운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 공은 오롯이 나의 역량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기에.

특히나 이번 올림피아드에서 일취월장한 내 모습을 선보인 데는 세레나의 공이 크다.

이번 올림피아드에서 선보인 그물 함정을 생각나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세레나였으니까.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교수님한테 고마워해야죠. 교수님이 잘 지도해준 덕이니까요.”

“너랑 로렌스가 아니었으면 난 계속 조교수 자리에서 눈칫밥이나 먹다가 이렇다 할 성과도 못 내고 짤렸을 걸.”

“저나 로렌스 회장이 아니었어도 교수님은 알아서 잘하셨을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해? 단순히 내가 클로에 이사장님이 뽑은 교수라서?”

“아뇨, 세레나 스튜어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런가.”

세레나는 말없이 잔을 홀짝였다.

그녀답지 않게 진중한 표정이었다.

의외로 자신에 대한 자신이 없는 걸까?

나는 세레나가 자신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여전히 그렇게 보이기도 하고 말이다.

뭐, 그래도 이따금 의구심 정돈 들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한다.

조금 괴짜 같은 면이 있기는 해도, 세레나 스튜어트는 분명히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렇다면, 너는 어때.”

“제가 뭐요?”

“너는 너 스스로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전혀 아니지.

나는 숨기는 것도 많고, 누군가가 동경할만한 자질을 지니고 있지도 않으니까.

때로는 나 자신도 의아하게 느껴서 아이나에게 물었던 적도 있었다.

날 믿는 이유가 뭐냐고.

그랬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주변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길로 달려 나가는 모습이 믿음직스럽다고.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나는 수많은 길 중 나만의 길을 달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치의 엇갈림조차 없는 하나의 직로(??) 위를 달리는 거지.

심지어 그 길이 어디로 향하는 길인지도 알지 못한다.

즉, 나는 단지 도망치지 못해서 이 길에 선 것 뿐이다.

이런 내게서 믿음을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아뇨.”

“그럼 기쁘게 받아들이면 되겠네.”

“뭘요?”

“나는 너를 믿는다는 걸?”

“제가 믿을만한 구석이 어딨어요.”

“꼭 누굴 믿는 건 믿을 구석이 있어서 믿는 건 아니야. 그냥 믿고 싶은 사람을 믿는 거지. 그리고 보통 그 사람은, 자길 믿는 사람이고.”

그렇게 말하곤, 세레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음만 남은 컵 아래엔 지폐 몇 장이 끼워져있다.

“난 이만 자러 갈게. 마시고 싶었던 술도 마셨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다 했으니까.”

“들어가세요.”

“적당히 마셔.”

세레나의 이글거리는 염안이 시야에서 사라진다.

예전에는 저 눈에서 타오르는 광기와 뜨거운 열망만이 느껴졌었지.

하지만, 그곳에는 내가 알지 못한, 다른 한 가지 감정이 더 숨어있었다.

바로, 온정 말이다.

어쩌면, 그녀의 눈에는 아직 찾지못한 다른 감정이 더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 * *

묘한 위화감이 계속 내 잠을 방해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착각이겠거니 했는데, 몇 차례나 지속되는 것을 보면, 착각은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긴 한데….

뭐였더라?

아, 그래. 니힐리스가 마나를 사용할 때 내게 이런 감각을 주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위화감은 니힐리스가 날 부르고 있다는 소리인가?

대체 여긴 왜 온 건지 이해가 안 되네.

날 감시라도 하는 건가.

마음 같아선 이 시그널을 외면하고 계속 잠을 청하고 싶다만,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쉽다.

여태껏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갑자기 프라하에 등장하여 날 찾는 걸 보면, 꽤 중요한 소식인 듯하니.

대체 무슨 일로 날 찾는 걸까.

나쁜 소식만 아니면 좋겠는데.

* * *

어슴푸레한 새벽녘.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호텔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내게 보내지는 이 신호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감지되고 있었다.

다만, 그 위치가 으슥한 골목길 사이라는 점은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다만….

어쩔 수 없지.

니힐리스도 일단은 빌런이니까.

신호를 역추적해 도착한 곳에는, 내가 알던 니힐리스가 있었다.

커다란 키.

괴상하게 생긴 가면.

의수 따윈 쓰지 않겠다는 꿋꿋한 신념이 묻어나는 외팔.

마지막으로, 특유의 마나 패턴까지.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니힐리스다.

“오랜만에 보는군. 그동안 잘 지냈나?”

“보다시피요. 그런데, 이렇게 신호 보내면 클로에 이사장님한테 걸리지 않나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라.”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뭐, 이 정도되는 인간이라면 그 정도 대비책은 당연히 다 마련해뒀겠지만, 그래도 불안한 것은 사실이다.

클로에가 뭐 어디 보통 사람도 아니고, 우리와 같은 마나 사용자이기까지 한데.

물론, 마나를 단순히 소모 자원으로밖에 쓰지 않는 클로에보다야 니힐리스 쪽의 마나 감지와 제어 능력이 훨씬 뛰어나긴 하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천경의 대삼각이니까.

“제법 많이 성장했더군. 그동안 뺀질거리기만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설마, 제 경기를 직접 보셨어요?”

“안 될 이유도 없지.”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점에서 느낌이 싸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내 경기를 봤을 줄이야.

좀 쪽팔리네.

니힐리스가 보기엔 얼마나 한심했을까.

되지도 않는 가오를 잡는 내 모습이.

내가 전과 비교해 많이 강해졌다곤 하지만, 그건 생도 레벨 선에서 하는 이야기다.

니힐리스 정도 되는 사람에겐 다 똑같은 좆밥이나 다름없어 보이겠지.

그나마 이긴 게 다행이네.

졌으면 어떤 수모를 겪었을지 상상도 안 간다.

“뭐, 아무튼 내가 널 찾아온 건 단순히 널 보려고 그런 게 아니다. 원래는 네 경기만 보고 돌아가려고 했어.”

“그럼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는데요?”

“최근 경기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껴본 적 없나?”

“잘 모르겠는데요?”

그랬었던 적이 있나?

잘 모르겠다.

애초에 내가 출전한 언더그라운드 레벨에선 나와 비빌만한 녀석이 거의 없으니까.

하다못해, 호적수라고 할만한 녀석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게 체감 많이 됐을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나?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보고 말해라.”

뭐지.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면 뭐가 있었다는 소린데.

뭐였지?

아, 그래.

샤를린이 내 마나글레이브를 쳐낸 건 확실하게 이상했다.

낙린참이야 내 기술 완성도의 부재, 컨디션의 차이로 위력이 자주 오락가락한다지만, 맨 몸으로 푸른 검신의 마나글레이브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낸다는 건 확실히 이상했지.

“마나글레이브의 위력이 평소보다 조금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 이제야 눈치챘군. 네 마나글레이브는 망가졌다. 작동시켜봐라.”

뭐야, 진짜 작동 안 하잖아.

언제 고장이 난 거지?

“어떻게 아셨어요?”

“시제품으로는 붉은 검신조차 오래 유지하지 못한다. 한데 자홍색 검신을 주로 다루는 영식을 어떻게 버틸 수 있겠느냐.”

“그럼, 전 고장 날 때마다 매번 새로운 마나글레이브를 사야 하는 건가요? 이거 엄청 비싸다던데.”

“받아라.”

그가 내게 던진 주머니 속에는, 투명한 보석같이 생긴 물건이 두 개가 들어있었다.

하나는 프리즘 형태를, 하나는 렌즈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육방주석(???) 형태의 크리스털이나, 브릴리언트 컷의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들과는 제법 거리가 멀었지만.

“이게 뭐죠?”

“마나글레이브의 왜곡 수정이다. 프리즘은 마나의 분산, 렌즈는 마나의 밀집을 담당하지. 자홍색까지 너끈하게 버틸 정도의 최상급 수정은 좀처럼 드물어서 공수하는 데 제법 애를 먹었어.”

“저 주시는 겁니까?”

“그럼 뭐하러 줬겠나. 네놈 쓰라고 준 거지. 물론 마나글레이브는 현대의 주력 병기가 아닌 만큼, 이 정도의 물건을 가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트리니티 아카데미라면 내부에 한 명 정도는 있지 않겠나.”

알고 있지.

확실하게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애물단지에 불과한 물건이겠지만, 나는 이 물건을 가공할 수 있는 사람을 잘 알고 있다.

앨리스 교수.

아티팩트 제작이 주 사상력인 그녀라면 이것으로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다.

“적당한 사람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운이 좋았네요.”

“그럼, 네 실력도 보았고, 전해줄 물건도 전해주었으니, 난 이만 가 보마. 부디 좋은 검이 완성되었으면 좋겠군. 그렇게 훌륭한 소재를 가지고 싸구려 검이나 만들어 오진 않겠지? 혹여 그러기라도 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 같군.”

“아마 스승님의 검보다 좋을걸요.”

“그렇게 말하니 상당히 기대를 멈출 수가 없군. 이건 내가 살면서 만든 것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품질을 자랑하는 물건이거든. 아마… 겨울 때쯤이면 완성이 되어있겠지?”

“그럴걸요?”

“그렇다면 두 번째로 눈이 오는 날에 다시 보지. 첫눈이 오는 날 정도야 네놈의 연인에게 얼마든지 양보해주마.”

니힐리스는 내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신속하게 골목 사이로 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대답 정도는 듣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어차피 그렇다고 할 거라 쳐도 말이지.

뭐, 그래도 크게 섭섭하진 않았다.

원래도 떠나고 싶으면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나버리던 인간이라서.

사실, 섭섭함을 느끼지 않은 데에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바로 새 마나글레이브에 대한 기대감.

최강의 검사가 보증한 최상의 재료.

그리고 그걸 가공하는 이 또한 최고의 명인이라니.

아카데미가 이토록 그리워진 적은 처음인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