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프리실라 칼라일은 기억하고 있다.(2)
내가 봤던 그 색은 분명히 자홍색이었다.
확실히 기억한다.
하지만, 마나글레이브의 검신 색상 중에 자홍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붉은색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이렇게 쉽게?
이 몸에 내재 된 세컨드 어빌리티의 잠재력이 어마어마한가 보네.
극도로 짧은 순간이었다곤 하지만, 첫 번째 사용만으로 붉은색의 한계를 뛰어넘다니.
서드 어빌리티가 뭔지 기대될 정도군.
부푼 기대와 기쁨을 안고 훈련실에서 나오자, 클로에가 날 맞이했다.
“역시, 전 박성진 생도가 이길 줄 알고 있었어요.”
“간신히 이겼는데요.”
“이겼으면 된 거죠.”
그렇긴 하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그러지 않았던가.
“그나저나, 박성진 생도는 오늘도 꽤 특이한 선택을 하셨네요.”
“뭐가요?”
“마나글레이브를 사용하셨잖아요? 인기 없는 무기인데.”
“뭐, 그렇죠. 아직 잘 다루지도 못하고.”
“그래도 마지막에 보여준 움직임은 꽤 괜찮았어요.”
클로에가 괜찮다고 할 정도라니, 같은 생도 수준에서 보면 급이 다른 수준이었겠는데?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사상력이라 제대로 사용하지는 못했지만, 이 세컨드 어빌리티 사용에 숙달만 되면 꼼수 같은 걸 쓰지 않아도 다른 S클래스와 비빌 수 있겠어.
“감사합니다.”
“세컨드 어빌리티 사용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그 움직임이 몸에 자연스럽게 익을 거예요.”
역시 클로에는 바로 알아차리네.
비장의 카드 같은 느낌으로 숨겨두고 싶었는데, 아쉽다.
“아직은 감이 잘 안 잡히네요.”
“괜찮아요. 누구나 똑같으니까. 많이 쓰다 보면 자연스레 익숙해질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열심히 해보세요.”
클로에는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훈련장을 떠났다.
나와 대화하던 클로에가 사라지자, 같은 S클래스 녀석들이 몰려와 그 자리를 차지한다.
“뭐냐, 박성진? 마지막에 그거, 어떻게 한 거냐?”
“그렇게 잘할 수 있었는데 왜 피해 다니기만 한 거야?”
얘네가 보기에도 많이 신기했나 보다.
그렇게 대단했나?
솔직히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녹화라도 해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설정해두지 않은 게 아쉽네.
“그냥, 갑자기 감이 오길레.”
“그래서, 무기는 마나글레이브로 정했고?”
“어, 그러려고.”
“쓰기 어려울 텐데 괜찮겠냐?”
확실히, 마나글레이브는 쓰기 어렵다.
보통의 검과는 감각 자체가 달라서 그런가.
세컨드 어빌리티의 힘이 있다곤 해도, 마나글레이브 검법을 따로 익혀둬야만 제대로 된 위력을 발할 수 있어 보였다.
문제는, 내게 그걸 가르쳐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
비주류 무기 중에서도 극단적인 비주류 무기라 그런지, 어지간한 분야의 전문가는 다 모여있는 트리니티 아카데미 내에서도 마나글레이브를 사용하는 교수는 없다.
포톤글레이브를 사용하는 교수가 있긴 한데… 그 사람한테서라도 배워야하나?
“나도 모르겠다. 따로 배워야할 것 같기는 한데… 마나글레이브를 쓰는 사람이 없어서.”
“마나글레이브는 아니어도, 피터 교수님이 현역 시절에 포톤글레이브 쓰지 않았나? 그분한테 가서 가르쳐달라고 해보든지.”
“그럴까 생각 중이야.”
“…내가 가르쳐 줄까?”
아이나가 마나글레이브를 다룰 줄 알던가?
미츠루 가문의 명검 중에 특이한 성질을 가진 검들이 많다고 듣긴 했지만, 그 중 마나글레이브는 없었던 거 같은데.
“너 마나글레이브 쓸 줄 알아?”
“포톤글레이브라면 조금.”
“흠, 나야 모르는 사람한테 배우는 것보다 아는 사람한테 배우는 게 좋긴 한데.”
일면식도 없는 피터 교수한테 포톤글레이브 검법을 알려달라는 것보다야, 약간이라도 친분이 있는 아이나에게 배우는 게 편하긴 하다.
다만, 아이나는 어디까지나 생도다.
영웅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는 교수진들에 비하면, 그 실력이 한참 모자랄 것이 당연했다.
“결정되면 말해줘. 난 아무 때나 상관없어.”
“어, 그렇게 할게.”
아이나는 새침한 표정을 하곤, 훈련장을 떠났다.
서운했나?
아이나 정도의 미녀한테 개인교습을 받을 수 있다는 건 분명히 좋은 기회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중대사가 걸린 문제라, 곧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미안해, 아이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와중, 아까부터 주위를 맴돌던 프리실라가 내게 다가왔다.
“무슨 생각해?”
“그냥, 마나글레이브 검법을 익혀야 할 것 같은데, 적당히 알려줄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어.”
“음, 고민이 많이 되겠네.”
“어, 그냥 피터 교수님한테 알려달라 할까 생각 중이야.”
아, 갑자기 후회되네.
지금이라도 아이나를 붙잡을까?
아이나한테 배울 만큼 배우고 나서 피터 교수한테 가르침을 받아도 별 문제는 없잖아.
어제 아이나랑 분위기도 좋았는데, 그냥 가르쳐달라할걸.
안되겠다.
지금이라도 아이나한테 가서 부탁을…
“어디가?”
조금 당황했다.
그 화이트레이디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손목을 잡다니.
프리실라라는 캐릭터의 원래 특성이 저런 느낌은 아닐 테고, 뭐지?
나와 아는 사이라고 말했으니, 빙의하기 전의 내가 플래그라도 세워 뒀나?
이 세계의 나는 인싸였단 말인가.
조금 화가 나려고 하네.
“아, 급한 볼일이 생겨서.”
“그래? 알았어. 잘 가.”
프리실라는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에 휘둘려 마음이 변할 뻔했지만, 나는 얼른 생각을 고쳐먹고 아이나의 뒤를 쫓았다.
저 멀리에 아이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걸 보니, 새삼 나도 아이나에게 관심이 많았다는 게 느껴진다.
검은 장발, 생도복, 평범한 키.
특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여느 동양계 생도들과 똑같은 뒷모습을 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나를 한눈에 알아봤다는 점이 그러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아이나를 부른다.
“아이나.”
“벌써 생각을 정했어?”
“어, 포톤글레이브 검법 좀 알려줘.”
“그래, 좋아. 언제부터 할래?”
대답하는 그녀의 표정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항상 치켜뜬 것처럼 날카로운 눈매는 조금 유순해 보였고, 미동도 없는 입꼬리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호를 그리고 있었다.
기쁜 건가?
너무나 옅은 표정이라, 잘은 모르겠다.
“네가 시간이 되는 대로?”
“그럼, 저녁 먹고 만나자.”
“알았어. 이따 봐.”
그 자리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하나의 그림자가 더 있었다.
* * *
“포톤글레이브의 가장 기본적인 검식부터 알려줄게. 이 검식의 이름은 ‘에티’야.”
“수직베기, 수평베기가 끝이야?”
“제일 기본적인 초식이니까, 그거 말곤 없어. 우선 검을 수직으로 세워 봐.”
“이렇게?”
나는 대충 영상 매체에서 등장한 검사들의 자세를 흉내 냈다.
물론 그 배우들처럼 멋있지는 않겠지만.
“왼발… 아니지, 넌 왼손잡이였지, 일단 오른발을 좀 더 뒤로 빼야 해. 그리고, 검은 조금 더 낮춰.”
“높게 드는 게 수직베기에 더 유리하지 않아?”
“상대의 공격에 유연하게 대처하려면 검은 중간 위치에 있는 게 좋아. 물론 2식을 배우고 나서는 검의 위치가 변하겠지만, 일단은 네가 배우는 에티는 초식이니까. 좋아, 그 상태로 더미를 베어 봐.”
마나글레이브로 더미를 베어 가른다.
검의 위치가 낮았기에, 더미에 남은 상흔은 옅다.
어차피 머리를 공격당하면 죽으니까 상관은 없나?
“음, 나쁘지 않아. 그럼 이렇게, 검을 옆으로 쥐어 봐.”
“이 수평베기 자세는 왜 있는 거야? 상대방의 공격에 바로 노출되지 않나?”
“포톤글레이브의 가장 큰 장점은, 높은 위력이 아니라, 검신을 자유롭게 조종할 수 있다는 거야. 네 수직베기가 막혔을 때, 검을 거둬들일 필요가 없이, 그냥 포톤글레이브의 전원을 꺼버리면, 검을 바로 회수할 수 있지.”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그녀가 나를 비켜 세운다.
그리고, 시연 동작을 보여줬다.
아, 저런 식으로 쓰는 거구나.
“봤지?”
“어, 그렇게 쓰는 거구나.”
“수평베기로부터 측면을 방어하려 할 때, 포톤글레이브의 전원을 잠깐 끄면 검신이 일시적으로 사라지니, 상대의 방어와는 관계없이 너는 검을 휘두를 수 있어. 그리고 다시 전원을 작동시키면, 공격에 노출된 몸통에 검을 꽂아 넣을 수 있지. 즉, 이 자세는 공격에 더 유리한 자세야.”
그것 이외에도 아이나는 꽤 다양한 포톤글레이브의 응용 방법을 알려주었다.
고작 초식뿐인데도 이렇게 많은 바리에이션이 있다니.
2식이나 3식은 얼마나 어려운 거야.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긴 아이나가 손수 내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그 과정 중, 그녀의 손이 이따금 내 맨살에 맞닿았는데, 나는 아이나의 손이 차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그래, 이 자세를 유지해. 그 상태로 수평베기를 하라고.”
“전원을 끄라니까? 자꾸 방어에 검이 막히잖아!”
“에티의 수직베기는 막혀도 리스크가 적은 공격이라고 말했지. 왜 자꾸 막혔다고 검을 옆으로 꺾는 건데? 그 자세 그대로 유지하라고.”
“아니….”
당연히 처음엔 변명도 해보았다.
그래봤자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폭언뿐이라는 걸 깨달은 뒤론,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하게 됐지만.
“하아… 생각보다 가르치는 데 오래 걸리겠는데.”
“죄송합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여기서 끝?”
감이 잡힐락 말락 했는데 여기서 끝이라니.
조금 아쉬운데.
“내가 진이 다 빠져서 못할 거 같아.”
“미안.”
“다음엔 좀 잘해봐. 난 간다.”
“가르쳐줘서 고마워. 잘 가.”
아이나는 곧장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반면,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고, 스카이라운지로 향했다.
그곳으로 향한 데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냥 나 자신에게 답답해져서, 바람이 쐬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스카이라운지에는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프리실라였다.
“여긴 왜 왔어?”
“그냥, 답답해서.”
“아이나랑 있던 거 아니었어?”
“맞아. 어떻게 알았어?”
“그냥, 훈련실에 있는 걸 봤어.”
뭐,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고, 봤어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길게 배울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둘이 훈련실에선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대련을 하는 거 같아 보이진 않던데?”
“포톤글레이브 검법 좀 알려달라고 그랬지. 정확히는 마나글레이브긴 해도, 검법 자체는 비슷하긴 하니까.”
“아, 그냥 그거뿐?”
“그렇지? 뭐 다른 게 있나?”
“그래?”
프리실라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그럼, 넌 여기 왜 무슨 일로 왔어?”
“음, 그냥? 오셀롯 아카데미의 스카이라운지는 풍경이 별거 없었거든.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멋지다고 들어서 와봤어.”
“아, 확실히 여기 경관이 좋긴 해.”
“그러게. 자주 와야겠다.”
갑자기 담배가 땡기네.
골초였던 건 아니지만, 답답할 때 한 두 개비 피면 참 좋았는데 말이야.
아쉽게도 피울 수 없다.
이세계도 담배는 미성년자에게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아쉽네.
“있잖아, 너 내일 시간 나?”
“내일? 아이나 만나기 전까진 날 거 같은데?”
“그럼 저녁이나 같이 먹을래?”
“갑자기? 왜?”
“그냥, 그때 커피 받은 거에 대한 답례?”
그때?
아, 내가 빙의하기 전의 이야기구나.
내가 한 일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공짜밥은 못 참지.
존나 비싼 거 먹으러 가자고 해야겠다.
“그러지 뭐.”
“그럼 내일 강의 끝나고 6시에 서문에서 보자.”
프리실라는 스카이라운지를 떠났다.
내가 여자가 사주는 밥을 먹는 날도 오는구나.
드디어 내 인생에도 봄날이 오나?
* * *
아무런 관계도 아니란 말이지?
그럼 두고 볼 이유가 없잖아.
내가 더 먼저 알았고, 내가 더 먼저 이야기했고.
이젠 내가 더 친해질 일만 남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