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숙련도.(1) (50/173)



〈 50화 〉숙련도.(1)

어제 보았던 자홍색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아무리 세컨드 어빌리티를 계속 사용해봐도, 검신이 푸른색에서 변하지 않는다.

자홍색 검신은 각성 직후의 일시적인 사상력 폭주로 인한 현상이었던 건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우선은 마나글레이브의 초식을 익히는 데에 집중했다.

고작 수직베기와 수평베기밖에 하지 않는 검법이라니.

지루하기 짝이 없는 훈련이었지만, 어쩌겠는가.

2식이나 3식을 배우기 위해선 필수적인 행동이라는데.

그렇게 머리를 비우고 마나글레이브를 휘두르는 것에만 한나절을 소비하고 나니, 어느덧 방 안 시계의 초침이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기 전에 서둘러야겠네.

* * *

분명 약속 시간인 여섯 시보다 일찍 도착했으니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프리실라는 나보다 일찍 서문에 도착해있었다.

에이, 몰라.

약속 시간에 늦지만 않으면 된 거 아냐?

…아님 말고.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그냥, 할 게 없어서?”

아닌 거 같은데.

“그래서, 저녁은 뭐 먹으려고?”
“너 먹고 싶은  사 줄게. 생각해둔 거 있어?”

뭘 먹을까.

배는 그다지 고프지 않은데.

프리실라의 고향 음식이라도 소개해달라 할까?

내가 아는 스코틀랜드 음식은 로스트비프뿐이라.

아, 연어도 유명했었나?

“훈제 연어는 어때?”
“연어? 나쁘진 않은데… 너무 금방 물려.”

잘못 골랐네.

연어 정도야 고향에서 원 없이 먹을 수 있었을 테니.

내가 실수한 게 맞네.

“네가 먹고 싶은  먹자.   생각이 별로 없어서.”
“그럴까? 그럼 라자냐 먹으러 가자.”
“그래.”

용궁, 아니, 영국 요리를 먹으러 가자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무난한 선택을 하네.

그렇다고 이탈리아 요리를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본토 고장의 이탈리안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맞지만.

내가 살던 세계에서야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가도 한국인 입맛에 개량된 이탈리안 요리가 나오지만,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음식점은 아니다.

거의 모든 음식점이 본토 고장 출신의 요리사를 고용하니까.

문제가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반도 국가나, 섬나라 음식의 특징은 미친 듯이 짜다는 것.

그래서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처음 갔었을 땐, 음식을 대부분 남겼다.

너무 짜서.

지금이야 그 맛에 익숙해져 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지는 않는다.

“괜찮은 이탈리안 레스토랑 알아?”
“아.”

이걸 잊고 있었네.

트리니티 아카데미를 다니는  나지.

그때 갔던 포르노 나폴리타노나 가야겠다.

다른 맛집은 전혀 모르는 터라.

“몰라?”
“아냐, 알아. 가자.”

오랜만에 들린 포르노 나폴리타노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았다.

때문에 우리는 10분 정도의 시간을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여기 맛있나 봐?”
“꽤 유명한 곳이지? 피자로 더 유명한 곳이긴 한데, 다른 이탈리아 요리도 팔아.”
“그럼 피자도 하나 시킬까?”
“너 좋을 대로 해.”

원래 이런  사주는 사람 마음이다.

얻어먹는 주제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

아무튼, 적당한 잡담으로 시간을 대충 때우자, 시간은 금새 지나갔다.

“빈치스그라시 하나랑, 마르게리타 피자 하나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라거 두 잔 추가해주세요.”
“라거  잔 추가요.”

종업원은 금방 라거 두 잔을 가지고 왔다.

어, 이 라거, 생각보다 맛있다.

페로니랑 맛이 비슷한데.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에는 뭐 했어?”
“나? 별   했는데.”
“그냥 평범하게 한국에서 살다가 입학한 거야?”
“그랬지. 사상력도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응?”

프리실라가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가?”
“아니, 그런 것치곤 입학 시험 때는 사상력을 상당히 잘 다루던 것 같아서. 시험, 되게 빨리 끝냈잖아?”
“아, 뭐 그거야 더미니까.”
“그래?”

프리실라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더 캐묻는다거나 하진 않았다.

다행이네.

그 뒤론, 뭐, 평범한 이야기만 오갔다.

대부분은 프리실라가 내게 질문을 하고, 나는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형식의 대화뿐이었지만.

“주문하신 빈치스그라시, 마르게리타 피자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빈치스그라시, 맛있네.

여전히 짜긴 하지만.

“여기 맛있다.”
“그러게. 피자는 맛있는 거 알긴 했는데, 라자냐도 맛있는 줄은 몰랐네.”
“다 먹고 나면, 아이나 만나러 가는 거지?”
“그래야지.”
“재미없지 않아?”
“재미없지.”

재밌을 리가 있나.

예틴지 에틴지 하는 초식은 수평베기랑 수직베기 밖에 안 하는데.

훈련을 시작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됐는데도, 소설에 등장하는 문하생들이 왜 나가떨어지는지 알  같은 기분이다.

기초를 다지는 게 중요하다고는 해도, 단순 반복 노동만  달,   하고 있으면 누구나 그만두고 싶기 마련이겠지.

아, 그렇다고 정말로 그만두고 싶은 건 아니다.

아이나와 친밀도를 쌓기 위해서라도, 훈련은 하는 게 좋으니까.

“그럼, 오늘은 훈련 안 하고 나랑 놀지 않을래?”

이게 그 애프터 신청인지 뭔지 그거냐?

마음같아선 바로 그러자고 대답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하루라도 훈련을 빼먹기 시작하면 다음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훈련을 빠질지도 모르는 노릇인데다, 아이나가 지금까지 내게 보여준 호의를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않는 게 현명했다.

“아냐, 훈련은 열심히 해야지.”
“아쉽네. 같이 놀고 싶었는데.”
“나중에 시간 나면 연락할게.”
“진짜지? 그럼 트아카 앱에 내 프로필 친구로 등록해줘.”
“그래.”

나는 앱을 실행하고 프리실라의 프로필을 등록했다.

믿을 수 없네.

내 핸드폰에 여자 연락처가 생기다니.

“근데, 한동안은 계속 훈련만 하는 거야?”
“응, 아직은 초식도 제대로  다루거든. 적어도 2식 정도까진 다룰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들은 바에 의하면 식의 숫자가 올라간다고 해서 더 강한 검법인 건 아니라, 초식을 배운 뒤에는 자신의 스타일에 맞는 검법을 찾아야 한다고 듣긴 했지만.”
“그렇구나. 난 검은 안 다뤄서,  몰라.”
“나도 마나글레이브를 잡은 지 얼마  됐어. 일주일도  됐으니까. 그렇다고 그전에 검을 다뤄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무기를 다루는 게 어색하더라고.”

프리실라의 사상력은 검 같은 근접 무기를 필요로 하는 사상력이 아니니까, 굳이 검을 익힐 이유는 없긴 하다.

물론, 여러 가지 무기를 다룰 줄 아는 편이 낫긴 하겠지만, 작중에서 프리실라는 무기 없어도 잘 싸웠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무기 없이 활동하는 영웅들도 많잖아?”
“응, 그래서 난 라이나 릴케가 좋아. 무기 없어도 잘 싸우잖아?”
“라이나 릴케가 대단하긴 해.”
“근데, 넌 진짜로 좋아하는 영웅이  명도 없어?  한 명도?”
“없는데?”
“왜?”

왜냐고 물어도, 난 다른 영웅들에 대해 그리 빠삭하게 알지 않기 때문이다.

다카포 드림의 서사는 어디까지나 S클래스의 주인공, 천현우와 베아트릭스 발데크를 기준으로 흘러가니까.

다른 영웅들이 얼마나 대단한 활약상을 가졌는지, 어떤 미담이 있는지 잘 모르니, 그럴 수밖에 없다.

단역 중에 몇몇 멋진 캐릭터들도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단역이고.

“다른 영웅들한테 그렇게 관심이 없거든.”
“그럼, 누구한테 관심 있어? 아이나?”

갑자기 치고 들어온 프리실라의 공격에, 식도를 타고 내려가던 피자가 목에 턱하고 걸렸다.

나는 다급하게 맥주를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맞나봐?”
“관심이 아예 없다는 건 거짓말이긴 하지.”
“왜 아이나를 좋아해?”
“음, 그냥, 오래 알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졌다고 해야 하나?”
“고등부 입학이라며?”

아.

나는 필사적인 변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S클래스 중에선 아이나랑 같이 지낸 시간이 가장 기니까.”
“그래?”
“응.”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고.”

내가 생각해도 그다지 좋은 변명은 아니었음에도, 프리실라는 순순히 넘어갔다.

문제는, 프리실라가 넘어갔다 해서,  묘하게 갑갑한 분위기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불편하다.

이 분위기만이 불편한 것이 아니다.

프리실라의 과한 호의도 불편하고, 나와 아이나의 관계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가를  수 없다는 점도 불편하다.

그렇게, 우리는 말없이 식사만 하다가, 헤어졌다.

* * *

훈련장에서 아이나를 기다린다.

초조함에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다.

그녀에게 딱히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마음 한 켠이 불편해져 온다.

“일찍 왔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의 표정을 잘 읽지 못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아이나는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캐릭터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그녀의 표정을 꽤 잘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은― 기대, 기대였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냐, 아무것도.”
“그래, 아까 연습하는 거 보니까 그래도  좋아졌더라.”

내 실력이 갑자기 늘어난 것은 아니다.

세컨드 어빌리티의 각성 덕분이지.

당연히 자홍색 검신 때만큼은 아니지만, 마나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읽게 되고 나선, 제법 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내 실력이라고  수 있겠으나, 노력의 산물은 아니니, 순수하게 내 기량이 늘었다고 보긴 조금 미묘한 감이 있다.

“그래서, 오늘은 나와 대련을 하면서 초식의 실전 사용법을 익혀볼까 해.”
“벌써?”
“나도 초식만 사용할 거니까, 너무 걱정은 안해도 돼.”
“그래도 아직은 이른 감이 있지 않나?”
“괜찮아. 지금 바로 시작할 거니까, 자세 잡고.”

대련은 빠르게 시작되었다.

빛나는 검신이 맞닿는다.

아이나의 조언대로, 이 교착 상태를 유지하려는 순간.

아이나의 검신이 사라진다.

포톤글레이브의 전원을 꺼버린 것이다.

당연히 내 몸은 균형을 잃고, 앞으로 쓰러진다.

“같은 마나글레이브나, 포톤글레이브의 소유자를 만났을 때는, 이런 트릭을 걸 수도 있으니까, 유념해둬야 돼. 어차피 포톤글레이브 같은 비주류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이것도 초식에서 익혀야 하는 거야?”
“당연히 아니지. 그냥 장난 좀 쳐본 거야. 같은 포톤글레이브 사용자의 상대법은 2식인 카데르부터 익혀. 방금 그것도 카데르에서 가르치는 가장 기초적인 교착 상태 해결법인데, 이것도 다 대처법이 있어.”

이번에 그녀의 표정에서 스쳐 지나간 것은, 기쁨.

기쁨이다.

“일어서. 이제 진짜 초식인 에티만 쓸게. 다른 건 안  거야.”
“그래.”

초식으로만 이뤄지는 루즈한 대련임에도, 그렇게 재미없다고만 느껴지진 않았다.

그것이 포톤글레이브라는 무기의 특수성에서 오는 것인지,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아이나도 나와 같은 감정일까.

언젠가는, 그 답을 알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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