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프리실라 칼라일은 기억하고 있다.(1)
갑작스럽게 성사된 매치였음에도, 훈련장에는 상당한 숫자의 관객이 모여있었다.
오셀롯 아카데미 강자의 대표격인 화이트레이디와, S클래스의 중간고사 1위인 나의 승부가 펼쳐진다는 말이 입소문을 타고 트리니티 아카데미에 퍼진 것이다.
“박성진 생도?”
“클로에 이사장님?”
“지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저런 소리를 들으니까 급부담되네.
아카데미 이미지가 걸려있다 이건가.
아니면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트리니티 아카데미 이사장, 클로에 뤼미엘.
오셀롯 아카데미 이사장, 샤를 퐁텐.
둘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기로 유명하니까.
진심으로 사이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악우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제가 이기면, 샤를 이사장님한테 자랑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말하는 거 봐!”
클로에가 웃음을 터뜨린다.
자기가 생각해도 웃기겠지.
새파랗게 어린놈이 뭘 안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지 말이야.
“아, 역시 박성진 생도는 재밌다니까? 난 박성진 생도가 잘 됐으면 좋겠어.”
“감사합니다.”
“그리고, 샤를한테 자랑할 거냐고? 당연히 해야지! 트리니티 아카데미는 언제까지고 1등이여야 한다고! 아니, 영원히 1등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1등을 놓쳐선 안 돼!”
이런 사람이라니까.
클로에는.
나이를 그렇게나 먹고도 참 애 같은 면이 많다.
아니, 나이를 너무 먹어서 퇴행한 건가?
“근데, 저 솔직히 자신 없는데요.”
“왜 자신이 없어?”
“화이트레이디잖아요.”
“넌 르나르잖아.”
그건 또 뭐야.
“그건 또 뭐예요.”
“여우라고. 여우가 프랑스어로 르나르야. 아, 여우처럼 교활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고.”
“그런 이상한 별명은 언제 또 지어내신 건데요?”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던데? 여우라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이상한 별명이 생겼나 보네.
여우라니.
존나 약해 보이잖아.
차라리 늑대로 해주면 안 되나?
“약해 보이는 별명인데요.”
“왜? 사막의 여우, 롬멜도 있잖아?”
“사막의 여우는 멋진데, 그냥 여우는 폼이 안 살잖아요.”
“별명이 생긴 거에 감사해.”
그런가?
하긴, 아무런 별명이 없는 거보다야 나을지도.
“아무튼, 우리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여우가 얼마나 잘하나 지켜볼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 저 진짜 자신 없어요.”
“어허.”
잔소리를 박박 해대는 클로에를 뒤로하고, 나는 훈련실로 들어갔다.
[사용자가 인식되었습니다. 사상력을 동기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사용자 박성진, 프리실라 칼라일의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훈련을 설정해주세요.]
“이사장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어?”
“그냥, 이기라고 잔소리하시던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대충 알겠네. 그래서, 설정은 어떻게 할래?”
“바닐라로 하자.”
시가지는 이제 지겹다.
꼴도 보기 싫어 죽겠다.
“그래, 그럼 바닐라로.”
[훈련의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나에게 유리한 조건들을 덕지덕지 붙일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빈센트의 말대로, 지금의 나는 기본기를 길러야 했기 때문이다.
“준비됐어?”
“어, 시작해도 돼.”
[카운트 다운, 5, 4, 3, 2, 1, 0,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마나글레이브를 주머니에서 꺼내 작동시켰다.
하얀색의 검신이 빛을 발한다.
그래도 한결 낫네.
상대가 내구에 특화된 사상력을 가진 게 아니라서.
하얀색의 검신은, 사람의 살갗 정도는 너끈하게 베어낼 수 있지만, 조금만 내구가 튼튼해지면 거의 피해를 주지 못한다.
그러니, 프리실라가 방어에 유리한 사상력을 가지지 않았다는 건 내게 꽤 괜찮은 이점이지.
* * *
“포톤글레이브? 또 이상한 무기를 들고 왔네.”
“쟤가 검을 다룰 줄 알았나?”
“포톤글레이브는 일반적인 검과는 용례가 완전히 달라. 검술을 다룰 줄 안다 쳐도, 포톤글레이브용 검법은 따로 배워야 해.”
“그럼, 아이나 너도 포톤글레이브는 다룰 줄 모르냐?”
“몰라. 만져본 적이 없는 건 아닌데, 검보다 훨씬 다루기 어려워.”
아이나의 대답에, 모두가 침음을 내뱉었다.
아이나가 어렵다고 말할 정도라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원거리 견제 수단도 있는 녀석이, 왜 갑자기 저런 높은 숙련도를 요구하는 근접 무기를 들고 왔지?”
“글쎄다. 일단 한번 보자고. 얼마나 잘 다루나.”
* * *
화이트레이디.
프리실라의 이명이다.
그녀가 화이트레이디라 불리게 된 데에는, 프리실라의 외모도 한몫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싱글 어빌리티, 백화가 원인이지.
프리실라의 사상력, 백화는 체내에서 백색 분말을 만들어 내는 능력으로, 이 백색 분말은 접촉한 유기물을 순식간에 괴사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분진에 닿은 조직이 괴사하고 나면, 그 조직은 세포가 완전히 죽어 끝내는 새하얗게 석화한다.
이 때문에 백화(白化)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분진의 입자가 무척이나 작다는 것.
바람을 타고 가루가 날아다니기 시작하면, 사실상 대처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분말에 닿은 세포가 괴사하는 과정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어서, 상대방의 전의를 상실시키기에도 매우 유용하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마땅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분말이 사방에 퍼지기 전에 선공을 하는 거겠지만, 쉽지 않다.
처음에는 선공권을 쥐기 위해 실 탄환이라도 사용할까 생각해보았지만, 금방 관두었다.
실 탄환 견제에만 의존하게 되면 전투의 기본기가 늘지 않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클로에 이사장님.
아무래도 이번 전투는 패배하더라도, 최대한 기본기를 익히는 방향으로 가야겠어요.
나는 천천히 프리실라를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일정 거리 내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숨결만으로도 백화 증상을 유발하는 가루를 퍼뜨릴 수 있으니까.
‘많은 양의 가루를 뒤집어쓰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건 오산이다.
백화는 몸에 전체로 퍼져나가는 증상이라, 극미량이라도 피부에 닿는다면, 접촉한 부위를 바로 도려내야 한다.
체내로 들어간다면?
해독이나 치유 관련 사상력이 없다면, 그대로 끝장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물론 임팩트 면에서는 아이나나 알프레드 같은 사람에 비해 부족해 보일 수 있으나, 실용적인 면에선 프리실라가 나은 점도 많다.
요인 암살 같은 데서 훨씬 유리하니까.
정말 상대하는 입장에서 더럽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사상력이네.
그렇게, 무의미한 대치 구도가 지속되던 중, 선공을 시도한 것은 프리실라였다.
손 위에 올려져 있던 백색 분말들이, 그녀의 숨결을 타고 공기 중으로 퍼진다.
나는 빠르게 그 공격에 반응하여, 좌측으로 몸을 굴렸다.
이제 오른쪽 방향으론 이동할 수 없겠네.
벌써 이 훈련실의 절반을 사용할 수 없게 되다니,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일단은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접근해야 하나?
백화가 무서운 증상인 건 사실이지만, 죽음에 이르는 데엔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된다.
백화 분진을 몸으로 받아내도, 어느 정도의 유예 기간은 있다는 말이다.
그 유예 기간 사이에 마나글레이브를 꽂아 넣기만 하면 내가 승리할 수 있는데….
문제는 내가 그렇게 날렵하지 않다는 거다.
육체파인 카타리나, 제이드 정도라면 어떻게 가능하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빈센트의 말을 열심히 들을 걸 그랬네.
여태까지 기동성을 그래플링에만 의존해온 게 조금 후회된다.
어쩔 수 없다.
리스크를 짊어지고 접근하는 수밖에.
* * *
“쟤, 왜 오늘은 안 하던 짓을 하냐?”
“그러게. 칼을 잡더니 갑자기 맛탱이가 가버렸네. 무슨 마검이라도 되나?”
“교수님의 말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거 같다.”
“뭐, 기본기가 없다는 그 말?”
“내가 보기엔 그렇다. 아무래도 한동안은 저 스탠스를 유지할 것 같군.”
비슷한 무투파인 제이드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머지는 다들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카타리나에게 되물었다.
“쟤가 굳이 근접전 실력을 늘릴 필요가 있나? 그럴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본인이 필요하다고 느꼈겠지. 지가 알아서 할 일 아니겠냐.”
“내가 보기에도 성진이는 근접전을 너무 못하긴 해.”
“뭐, 근접전을 늘리는 게 나쁜 건 아닌데, 잡은 무기가 포톤글레이브인 건 좀 그래. 나 같았으면 무난한 창 선택했을 거 같은데.”
“저건 마나글레이브야. 병신들아.”
잠자코 있던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마나글레이브라고? 포톤글레이브보다 더 좆같은 걸 골랐네.”
“마나글레이브는 포톤글레이브랑 뭐가 다른 거야?”
“검신이 마나지. 포톤글레이브보다 출력이 더 높아. 근데 박성진은 마나 다루는 능력이 별론가 보네. 저건 포톤글레이브보다도 출력이 낮을걸. 마나 밀도가 너무 낮다.”
“마나글레이브를 선택한 건 나로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가까운 길을 놔두고 왜 먼 길을 가려는지 잘 모르겠군.”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하고 있었지만, 한 명만은 생각이 달랐다.
‘쓰는 법이라도 알려줘야 하나?’
* * *
지랄 맞네.
백화 증상이 몸을 좀먹는 게 느껴진다.
이제 정말 한계다.
도망칠 곳도 없다.
접근 자체는 몇 번 성공했지만, 제대로 된 유효타를 먹인 것은 한 번뿐.
그마저도 프리실라의 손목을 잘라낸 것으로 그쳤다.
아무래도, 이번 공격에 사활을 걸어야겠네.
직선으로 달려 나간다.
그것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
측면으로 돌자니, 양쪽이 백화 분진이라 이 선택을 했을 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게 느껴진다.
백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분진과 접촉한 부위를 마나 세이버로 도려냈으나, 그것이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걸 안 뒤엔 그냥 이대로 놔두는 중이다.
이미 백화 분진이 전신에 달라 붙었으니까.
이미 몸의 말단 부위는 백색의 돌이 되다 못해 바스러지고 있었고, 다른 신체 부위라 하여 온전한 것은 아니었다.
남의 눈엔 표백제로 빤 것같이 허여멀건 모습을 하고 있겠지.
프리실라와 나의 거리가 열 발자국 정도 남았을 즈음, 새로운 시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렁거리는 아지랑이 같은 것이, 처음에는 그저 주마등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프리실라와 나의 거리가 다섯 걸음 남았을 즈음이 되고서야 나는 그것이 주마등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마나다.
마나의 움직임이 보인다.
나는 곧바로 정신을 마나글레이브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대기에 흘러 다니던 마나가, 나의 마나글레이브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아니, 나만 보았을 테지.
마나글레이브의 검신이, 일순간 자홍색으로 물드는 것을.
그리고, 검로(劍路)가 내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을.
나는 확신했다.
저 길을 따라가면, 승리할 수 있노라고.
검로는 시야에서 사라졌음에도, 아직도 나의 뇌리에 똑똑히 박혀있다.
기억에 의존하여 길을 따라간다.
갑작스레 달라진 나의 움직임에, 프리실라가 당황하는 눈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백화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이 승부를 매듭짓겠다는 일념 하나만 있었으니까.
마지막 발걸음을 내딛음과 동시에, 프리실라를 베어 갈랐다.
마나글레이브는 검신에 물리적 실체가 거의 없었기에, 베는 맛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피격체의 반발력과 저항이 없으니, 내가 검에 휘둘린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그래도, 무언가를 베었다는 감각은 확실히 익힐 수 있었다.
[승자, 박성진. 훈련이 종료됩니다.]
* * *
딱히 분하진 않았어.
그 어려운 S레벨 테스트도 단숨에 끝마친 사람인데, 나라고 이길 리는 없었으니까.
그냥, 다시 보고 싶었을 뿐이야.
너의 진심을.
네가 시험을 마치고 나왔을 때,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분명히 봤어.
자홍색 눈을 한 모습을.
그래서, 난 알 수 있었어.
너는 진심을 발휘할 때만 그 눈을 한다는 걸.
그런 점에서, 이번 트리니티 아카데미의 중간고사는 어딘가 꺼림칙하다고 느꼈었지.
분명히 전력을 다하는 것 같은데도, 네 눈은 한결같았으니까.
S클래스를 상대로도 진심을 낼 필요가 없다니.
도대체 넌 어느 경지에 있는 걸까, 궁금했어.
그래서, 이 트리니티 아카데미로 전학 오길 결심했지.
반드시 너의 진심을 다시 보고 말겠다고 말이야.
나, 처음엔 실망할 뻔했다?
그래도, 너의 진심을 다시 볼 수 있어서, 괜찮았어.
너는 눈치 못 챌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꽤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서.
네 검과 눈이 자홍색으로 물드는 순간을, 분명히 봤거든.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이 그렇게 변할 수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니까?
역시, 넌 남다른 사람이 확실해.
그래도, 너의 진심을 두 번이나 본 건, 나 뿐이겠지?
아니면, 그마저도 진심은 아닌 걸까?
언제쯤 되면 너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너는 이렇게 수준 낮은 곳에서 놀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뭐, 언젠가는 볼 수 있겠지!
여기서 유일하게 네 진심을 끌어냈다는 것으로, 오늘은 만족할 거야.
* * *
뭐지, 이 오싹한 기분은.
누가 날 저주라도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