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05화 (105/129)

105화

“뭐야? 고백하기도 전에 나 차는 거야?”

“…….”

“너무해. 내가 그렇게 잘해 줬는데.”

월랑은 호은의 앞에 놓인 글라스 잔을 뺏어 들려고 했다. 술이라도 먹어야 기분 나쁜 게 풀릴 거 같다는 듯 말이다.

호은은 그녀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잔을 뺏어 자신의 입가에 갖다 댔다.

“월랑 씨는 취하면 안 된다니까…….”

끝말이 늘어난 호은은 가만히 앉아 있음에도 흔들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결국 옆으로 고꾸라지려는 걸 월랑이 가볍게 받았다.

“흥. 귀여우면 다인가.”

월랑은 술에 취한 호은을 안아 들고는 그가 갇혀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탁

“으악!!!”

꺼진 불을 켜자 언제 와 있던 건지 한여름이 굳은 얼굴로 호은이 누워 있어야 할 침대를 보고 있었다.

“보스…… 오늘 안 들어오는 거 아니었어?”

“슬슬 경고를 해야 할 거 같아서 말이야.”

“하아?! 뭐라는 거야! 나 건들지도 않았고!! 타이거를 동료로 생각할 수 있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있구먼!”

한여름은 월랑에게서 호은을 받아 자신이 안아 들었다. 그녀는 땅에 발을 구르며 억울하다는 듯 호소했다.

“아니 솔직히 오락거리 하나 없는 이곳에 종일 갇혀 있어 봐! 얼마나 재미없겠어. 나같이 놀아 주는 사람이라도 있어야 소속감이라도 생기지.”

월랑은 쏘아 대는 말과 다르게 혹시 몰라 한여름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공격하면 당장에라도 방 밖으로 빠져나갈 기세였다.

“그런 거 필요 없어. 외롭게 만드는 게 목적이거든.”

“누가 빠돌이 아니랄까 봐.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는 거 되게 싫어하네.”

월랑은 자신의 취향으로 가득한 호은을 보스가 먼저 찜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운명이라고 점찍은 상대의 경쟁자가 하필이면 직장 보스라니. 거기다 듣기로는 호은을 10년이나 지켜본 스토커란다. 도저히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었지만 호은의 얼굴을 보면 포기가 안 되었다.

“앞으로는 그냥 혼자 내버려 둬.”

“쳇. 치사해.”

월랑은 불만인지 입술을 씰룩거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월랑이 나간 문을 지켜본 한여름은 술에 취한 호은을 침대에 눕혔다.

“술독에 빠질 만큼 외로웠어?”

잠든 호은의 입은 굳게 닫혀있다.

“나한테 티 내지 그랬어.”

“으음.”

잠꼬대를 중얼거리는 호은의 몸 위로 이불을 정돈한 한여름은 아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외롭지 않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엉뚱한 사람을 붙잡고 있으니 섭섭하네.”

한여름은 잠든 호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몇 번을 탐해도 부족했다. 아직 완벽하게 갖지 못해서 그런 걸까.

젖은 입술을 손으로 쓸며 한여름은 호은을 지켜봤다.

***

호은은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정확한 시간은 몰라도 아직 새벽일 것만 같았다. 어두운 시야가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침대 밑으로 내려가 무전기를 꺼냈다.

“인호야.”

버튼을 누르고 무작정 이름을 부르긴 했지만, 일주일째 되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나 찾을 거지.”

-치직

“데리러 올 거지.”

-치지직

“버린 거 아니…….”

“버린 거라니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호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언제부터 있던 건지 한여름이 난폭한 동작으로 무전기를 빼내더니 벽에 던졌다.

“!!!”

박살 난 무전기에 호은의 심장은 마치 바닥으로 추락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호은아, 너 뒤에서 나 몰래 이러고 있었어?”

한여름의 목소리는 사나웠다. 그는 열을 삭히듯 한숨을 뱉더니 주저앉아 있는 호은에게 맞춰 자신도 다리를 굽혔다.

“내가 배신하지 말라고 했지.”

“……보내 줘.”

목소리를 떨고 싶지 않았지만, 끝부분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딜 보내 달라는 거야. 가이드 공단이 너 버렸다니까.”

“아니야…….”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 호은아.”

“아니야!! 도인호한테 갈래.”

“씨발!!! 결정체 이식자는 되고 왜 나는 안 된다는 건데?!”

도인호의 이름을 듣자 한여름은 호은의 어깨를 거칠게 내리눌러 바닥에 눕혔다. 거친 숨소리가 그의 분노를 가늠케 했다.

“왜 걔만 불쌍하게 여겨? 왜 그놈만 찾냐고!!! 내가 먼저잖아. 네가 영웅처럼 구해 준 사람도 나고!!! 좆같은 실험을 당한 것도 내가 먼저라고!!!!”

“으윽.”

“네 처음은 다 나라고.”

호은이 도망치려는 듯 다리를 버둥거리자 한여름은 다친 왼발을 억세게 잡았다. 똑바로 걸을 수 있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으윽!!! 흑.”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습관처럼 눈물이 나왔다. 얌전해진 호은을 본 한여름은 음산하게 웃었다.

“네가 동정해야 할 건 나야.”

일주일 동안 한여름은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씩 꺼냈다.

타이거 간부 다섯 명은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했다. 두 사람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은 낮은 확률로 에스퍼이면서 몸 안에 가이딩이 있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안 건지 백우경은 본격적으로 멀티 실험을 준비했다고 한다.

수백 번의 실험이 있었고, 마침내 어린 나이에 에스퍼로 각성한 실험체가 나왔다. 처음엔 이능력이 불안정하긴 했으나 시간이 흘러 완벽하게 각성하고 난 뒤로 그들은 가이딩 없이 이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험은 그리 쉽게 성공하지 못했다. 이들은 몸 안에 가이딩을 축적하고 태어났을 뿐이지 스스로 가이딩을 만들 수 없었다.

축적된 가이딩으로 몇 년을 버티는 게 고작인 실험체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일반 에스퍼처럼 가이드가 필요해지는 몸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협회가 원하던 ‘멀티’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해당 실험체들의 등급은 S급으로 많은 양의 가이딩이 필요했다. 실험에 실패한 것과 가이딩하기 버거운 존재라는 이유로 해당 실험은 중단. 실험체는 폐기 처분이 내려졌다.

“내가 처음에 세상에서 버려진 날.”

한여름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던 사념은 그의 목소리에 멈췄다.

“살아남은 애들과 다짐했어. 우린 절대 서로를 버리지 말자고.”

“…….”

“그리고 우릴 태어나게 만든 세상에 복수하자고 말했지.”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한여름은 뭔가를 회상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복수의 대상에서 권호은 넌 제외야.”

“…….”

“유일하게 먼저 손 내밀어준 사람이니까.”

한여름은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그 시절의 날씨와 온도 그리고 향기까지 다 기억났다. 어떻게 잊을까. 거지 같다고만 생각한 세상이 처음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줬던 그날을.

“호은아. 그때처럼 다시 내 손 잡아 줄래? 나랑 같이 쓰레기를 처단하는 거야.”

한여름에게 들은 이야기로만 타이거를 바라본다면 악당은 틀림없는 협회다. 강제로 생명을 만들고 또 그 생명을 손쉽게 없애버리려고 하고. 이런 쓰레기 같은 짓을 하는 협회에는 이미 옛날에 진저리가 난 상태다.

한여름의 과거사를 들으면 지금 상황과 상관없이 측은한 마음이 들긴 했다.

결국, 이들도 희생자였다.

하지만 백우경에게 복수하기 위해 일반 에스퍼를 납치해 저런 괴물로 만든 걸 정당화시킬 수 있을까?

“그래도 이건 아니야.”

“왜? 당한 걸 돌려주는 거뿐인데.”

“이건 아니야. 뭔가 잘못됐어.”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어 호은아. 봐 봐. 너도 버림받았고 나는 이미 예전에 버림받았고.”

“…….”

“우린 같은 처지야!! 서로가 필요한!”

한여름의 텅 비어 버린 눈동자 안에 담긴 건 처량하게 떨고 있는 호은이었다.

“그 녀석이랑 각인은 안 한 거 같던데.”

“…….”

“이번에도 처음 나 줄 거지?”

“하지 마…….”

“도인호한테 안 준 각인 나한테 줘.”

귓가에 더운 숨결이 닿았다. 순식간에 퍼지는 불쾌함에 호은은 있는 힘을 다해 손에 잡히는 물건을 들어 던졌다.

“하지 마!!! 인호야!! 도인호!!”

마지막으로 던진 토끼 인형이 한여름의 얼굴에 맞았다.

“그 새끼 이름 부르지 말라고…!”

-콰아아앙!!!!

한여름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폭발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흔들릴 만큼 진동이 울렸다.

“하하. 뭐야 그 얼굴은.”

기대에 찬 호은의 얼굴을 내려다본 한여름이 입매를 뒤틀었다.

“보스. 2층에 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2층은 왜.”

문을 열고 들어온 타이거 말단 직원은 엉켜 있는 두 사람을 보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는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멀티 몬스터 중 한 명이 폭발한 거 같습니다.”

“폭주가 아니라 폭발?”

“네.”

할 말을 끝낸 남자는 문을 열어 둔 채 나갔다. 복도에서 흘러나오는 조명이 어두운 방 안을 밝혔다. 그 덕에 희망에 물들었다가 다시 절망으로 물드는 호은의 얼굴이 더욱 잘 보였다.

한여름은 차오르는 웃음을 삼켰다.

“안됐네? 누가 침입해서 생긴 폭발음이 아니라서.”

“…….”

“처리하고 올 테니까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마치 볼 일이 있어 나가기 직전 반려동물을 달래는 듯한 말투였다. 호은은 고개를 돌렸다.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다. 한여름은 나가면서 문을 닫았다. 문을 잠그는 잠금장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치직, 치지직

벽에 부딪혀 파편을 튀긴 무전기는 고장이 났는지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은은 잘못 꺾이기라도 했는지 고통을 호소하는 왼쪽 발목을 조심히 움직이며 무전기 앞으로 다가갔다.

위쪽 부분이 완전히 깨졌다.

“어차피 연락도 안 닿았는데.”

무전기를 들고 있는 호은의 손이 떨렸다.

[권호은, 응답해라.]

“?!!!”

무전기를 통해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 들리냐? ─치직,]

호은은 버튼을 누르고 떨리는 목소리를 최대한 억눌렀다.

“차, 차장님?”

[아. 제대로 들리네. 그런데 왜 이렇게 ─치지직, 들려?]

무전기를 소중히 가슴에 품은 호은은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여러 번 깨물어야만 했다.

“무전기가 고장이 난 거 같습니다…….”

[몸은.]

목소리가 끊겨 들리는 건 호수도 마찬가지인 거 같았다. 최대한 짧게 말하는 모습에 호은 또한 대답을 간결하게 뱉었다.

[호은 형. 조금만 기다려요. 우리 ─치지직, 아니니까.]

[절대 버린 거 ─지직.]

“인호야? 도인호?!!”

가장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리자 심장이 요동쳤다. 혹시라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됐을까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한 도인호였다. 무전기를 들고 있던 호은은 조금 전 한여름과 나눈 대화를 들은 것처럼 대답하는 도인호에 무언가 생각났다.

“도청……!!!”

바닥에 굴러다니는 토끼 인형을 서둘러 주웠다. 한여울을 감시하기 위해서 줬던 이 인형에는 도청 장치가 들어 있었다.

[눈치도 참 빠르다. 그래. 우린 그걸로 들을 ─치지직, 그동안 있었던 일 말해 봐.]

무전기는 망가졌지만, 인형 안에 들어 있는 도청 장치는 괜찮은 모양이다. 호수와 도인호가 같이 있는 건지 궁금했으나 언제 한여름이 들어올지 몰라 서둘러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