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허억.”
호은은 심장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아직도 꿈의 잔상에 헤어 나오지 못해 횡설수설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런 끔찍한 일을 하러 간 게 아니었어. 나는…… 도인호를 구하기 위해서.”
호은은 습관적으로 발을 침대에 내려놓았다가 왼쪽 발목에 올라오는 통증을 느끼고 굴러떨어졌다.
그러나 아파할 틈도 없이 침대 아래로 손을 뻗어 무전기를 꺼냈다.
“제 목소리 들리는 분 누구 없나요?”
-치지직
“인호야…… 배연우 대리님…… 남운수 팀장님…….”
-치직
“저…… 여기 있어요. 잡혀 있어요.”
무전기를 든 손이 힘없이 추락했다. 호은의 어깨는 사정없이 떨렸다.
“왜 아무도 안 찾는데.”
무전기는 침대 밑으로 굴러간 지 오래였다. 호은은 두 다리를 모으곤 얼굴을 숨겼다.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나서 그런 거겠지. 무전기는 거리가 닿아야 연결될 테니까 여기가 먼 곳일 수도 있고.’
연락이 안 닿는 이유를 하나하나 붙여 보지만 자기 위로밖에 안 됐다.
“굿 모닝~ 아?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전자음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가장 듣기 싫은 한여름 목소리가 들리자 호은은 무릎에 눈물을 닦아 냈다.
“호은아? 얼굴 들어 봐.”
“가.”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아침 식사라도 가지고 온 건지 쟁반을 내려놓은 한여름은 호은의 얼굴을 강제로 들게 했다.
“우네?”
“…….”
“너 우는 거 처음 봐.”
눈가는 발갛고 뺨은 눈물로 얼룩져 엉망인 호은이 얼굴을 가리듯 팔을 올렸다.
그러나 한여름의 손이 먼저였다. 호은의 양쪽 뺨을 손으로 감싼 한여름이 부어 있는 호은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하하. 이러니까 정말 악당이 된 기분이네.”
“…….”
“너랑 있으면 나도 영웅이 될 줄 알았는데.”
몇 초 동안 입술을 갖다 대던 한여름이 턱을 뒤로 당겼다. 그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것도 나쁘진 않다.”
우는 사람 앞에서 저따위로 지껄이는 놈이라니. 호은은 한여름이 단단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울어, 호은아. 그래야 힘 나서 다시 울지.”
“너 같으면 납치범 얼굴 보면서 밥이 넘어가겠어? 네 얼굴만 보면 구토 나올 거 같거든.”
한여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정말 토라도 해서 그 면상에 쏟아 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나도 그래. 너 보면 막 심장이 목구멍으로 나올 거 같아. 너도 나 좋아하는 거 아냐?!”
“하.”
호은은 고개를 돌렸다. 저 미친놈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뭐. 혼밥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잠깐 나가 줄게.”
“…….”
“먹고 나면 씻자? 혼자서 못 씻잖아.”
“혼자 할 수 있어.”
“그래? 그럼 한쪽을 더 부러뜨리면 못 하려나.”
“…….”
호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아하하. 농담이야! 밥 맛있게 먹어.”
한여름은 호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밖으로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한여름의 손을 호은이 급하게 붙잡았다.
“어제 보여 준 괴물…….”
“응? 멀티 몬스터?”
“그거…… 내 혈액 채취해서 만든 거 아니지.”
호은은 절박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던 자신이 저런 끔찍한 존재를 만드는데 가담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눈썹을 한 대 모은 호은의 얼굴은 누가 봐도 괴로움에 헐떡이는 모양새였다. 저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아래쪽에 힘이 들어가는 한여름이었다.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호은을 달랬다.
“내가 말하면 밥 못 먹을 거 같은데. 시간은 많아. 보채지 않아도 넌 곧 진실에 도달할 거야.”
의뭉스러운 대답을 한 한여름은 호은이 잡은 손을 쳐냈다. 그는 비밀번호를 입력한 후 밖으로 나갔다.
“…….”
내가 지금 저딴 놈한테 뭘 물어보려고 했던 거지. 다시 올라오는 설움을 꾹 삼킨 호은은 밥 냄새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에는 어제 놓여 있던 음식은 싹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한여름이 갖다 놓은 쟁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한식류였다.
먹고 힘내서 울라는 말에는 동의 못 했으나 상처라도 빨리 나으려면 먹어야 했다.
일회용 수저를 들어 찌개를 한 입 떠먹은 호은은 다시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배달 음식이네.”
아침마다 정성껏 만들던 그 음식이 아니었다. 억지로 밥을 크게 한술 떠 목구멍에 밀어 넣었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
호은은 다친 발을 절뚝거리며 급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통을 부여잡고 헛구역질했다. 얼마 먹지 않은 음식을 게워 내고 나자 나오는 것은 위산이 다였다.
멀쩡한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놓고 밥이나 먹는 자신에게 혐오감이 들어 토기가 올라왔다. 역겨운 건 한여름이 아니라 나인 건가.
***
이곳에서의 시간은 단조로웠다. 매시간 음식이 나오면 먹으면 됐고, 기력을 차리려고 하면 율형제가 찾아와 가이딩을 취했다.
식사를 끝내고 나면 한여름이나 그의 부하로 보이는 자가 와서 호은의 수발을 도와줬다. 찝찝했던 몸을 씻겨 주고 벌어진 상처를 소독해 줬다. 마치 사육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몸 정돈을 다 하고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주변이 추워지는데 이는 반설아가 왔다는 소리였다.
“…….”
주사기를 들고 있는 그녀는 냉한 얼굴이었다. 팔에 주사를 꽂으려는 걸 초반에는 몇 번이고 막았다. 하지만 싸늘한 표정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얼려 버리는 반설아에게 반항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호은의 팔은 어느새 바늘 자국으로 지저분해졌다.
무전기는 한여름 몰래 몇 번이고 도전해 봤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없었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네?”
한여름과 같이 자지 않는 밤이면 월랑이 방에 들어와 몰래 칵테일 바로 데려가 줬다.
술을 건네는 월랑에게 호은은 무료하게 눈을 깜빡였다.
“일주일…….”
호은이 납치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아니 느리게 지났다고 해야 하나. 맨정신인 날에는 한여름이 떠드는 이야기를 듣다 잠이 들었고, 그것이 아니면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
“일주일이면 우리도 제법 친해졌는데. 나는 언제쯤 같이 자 주려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던 월랑이 수척해진 호은을 흘긋 쳐다봤다.
호은은 일주일 사이 제법 살이 빠졌다. 그래서인지 예전의 밝은 느낌보다는 어딘가 건들면 위험한 향기를 내뿜을 것만 같은 인상으로 변했다.
피로가 쌓인 듯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이나 처음에 왔을 때보다 더 창백해진 피부나.
그녀는 빨간 혀를 내밀어 마치 호은의 입술을 핥듯 자신의 입술을 적셨다.
보스가 가이딩을 허락하긴 했으나, 어린아이 수준의 접촉만 허용이라 기회를 노리고 있던 월랑이었다. 이대로 호은과 친해져 자신이 아닌 호은이 먼저 덤벼들면 그걸 핑계로 가이딩을 진행할 계획이었다.
“아! 잠깐만. 내가 네 방문 닫고 왔던가? 열려 있는 거 누가 보면 큰일인데.”
일반 가이드는 어떤 취급을 당하던 신경조차 쓰지 않는 보스였으나, 유독 호은에게 만큼은 소유욕이 강했다.
덕분에 지금 같이 은밀한 만남도 한여름이 없는 순간만 노리던 월랑이었다. 그녀는 호은과의 밀회를 들킬까 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 씨. 실수했네. 나 금방 갔다 올게!”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 월랑을 보며 호은은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일주일 안에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희망은 사라지고 하루하루 절망만 남았다.
호은은 죽어 가는 눈으로 테이블을 바라보다 숨을 삼켰다.
월랑이 핸드폰을 두고 갔다,
호은은 누가 볼세라 핸드폰을 빠르게 집어 들었다.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심장이 요란하게 뛰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식은땀이 흐르고 손끝이 떨렸다.
호은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고는 손을 움직였다.
“!!!”
잠금도 안 해 놓는지 바로 배경 화면이 보였다. 월랑의 핸드폰 화면은 꽃밭에 뛰어놀고 있는 나비 사진이었다. 배경을 확인한 호은은 전화 앱을 눌렀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지? 머릿속이 새하얬다. 에스퍼가 있는 곳에 경찰을 불러 봤자 도움이 될까 싶었다.
“…….”
불안한 듯 입술을 말아 물던 호은은 결국 인터넷을 켰다. 전화번호는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 시대에 가족을 제외한 핸드폰 번호를 외우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차라리 인터넷에 들어가 가이드 공단을 검색하고 거기에 있는 메인 번호에다가 전화를 거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인터넷 화면에다 가이드 공단을 입력한 호은은 사이트를 누르려던 손이 멈췄다.
[특종 : 반정부 체포 성공한 가이드 공단&이능력자 협회]
호은은 홀린 듯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는 일주일 전에 올린 거였다. 드래곤 조직원 전원과 반정부 한 명을 체포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끝까지 봤지만, 그 어디에도 납치된 가이드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
기사의 메인 사진에는 인사부 직원들이 있었다. 자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고 완벽해 보였다. 호은은 의지를 잃은 듯 핸드폰이 원래 있던 곳에 내려놓았다.
“내 예상이 맞았어. 진짜 문 안 닫고 왔더라고.”
때마침 월랑이 칵테일 바로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통통 튀는 목소리로 큰일 날 뻔했다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월랑 씨는…….”
“응??”
“왜 저한테 잘해 주세요?”
문득 든 의문이었다.
타이거에는 가이드가 있긴 했으나 보통 등급이 낮은 부하들과 어울렸다. 간부들은 호은의 혈액으로 만든 가이딩 약을 이용하거나 방사 가이딩을 받으러 방으로 찾아오는 것이 다였다.
월랑도 그중에 하나였다. 그녀는 밤에 몰래 칵테일 바로 데려오곤 했으나 낮에는 주로 방사 가이딩을 핑계로 호은의 방을 찾아왔다. 그녀는 반정부 중 유일하게 호은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야. 첫눈에 반했으니까!”
호은은 글라스 잔에 담긴 양주를 손으로 흔들다가 시선을 돌렸다. 월랑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호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이드라 잘해 주는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답이었다.
“잘 보이고 싶어서 잘해 주는 건데?”
“…….”
호은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가 금방 없앴다. 글라스에 담긴 얼음이 흔드는 대로 움직였다. 일주일 동안 도인호에 대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월랑을 볼 때마다 호은은 마치 꼭 자신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를 돌봐주고 싶고, 챙겨 주고 싶어 하고, 또 안타까워하는 게.
자신이 도인호에게 하던 것과 다를 게 없었다.
“그럼 전 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건가 보네요.”
술기운이 살짝 올라왔다. 한 입만 더 마시면 잠들 거 같아 호은은 글라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