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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106화 (106/129)

106화

“이렇게 된 겁니다.”

타이거가 백우경이 진행한 실험의 피해자라는 것부터 2층에 있는 몬스터까지 이야기를 하자 무전기는 잠깐 정적을 유지했다.

[……역시. 잘 들어. 호은아. 백우경이 이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가 필요해. 그놈을 ─치지직, ─치직, 할 거니까.]

“차장님?”

분명 뒷말이 더 있던 거 같은데 무전기는 아까보다 심하게 지지직거렸다.

[치지직, 호은 형. 기다려요 ─치직, 치지직, 테니까.]

다급하게 무전기를 만져보던 호은은 다시 들린 도인호의 그리운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인호야…….”

더 도인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나더니 무전기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호은은 무전기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왼쪽 발목은 통증으로 아팠고 울었던 눈가는 따가웠다. 그래도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버려진 게 아니다.’

절망과 원망이 물밀듯 사라졌다. 나를 잊은 게 아니다. 버리지 않았다. 어째서 무전이 닿았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은은 도인호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릴게.”

부디 토끼 인형 속 도청 장치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해 주길.

***

“가이딩 때문에 이능력핵이 파괴됐다는 거네.”

산산조각 난 무언가를 발로 툭 친 한여름은 손으로 코를 막은 상태였다.

모습은 몬스터 같아 보일지 몰라도 이들은 한때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는 사람다운 생각을 하지 못할지라도 씻지 않으면 냄새가 났고 배가 고프면 허기를 느끼는 감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한여름은 건조한 눈으로 이것들을 바라봤다.

“방독면이라도 끼던지 해야지.”

바닥은 찢긴 살점과 핏덩어리로 가득했다. 감흥 없는 표정의 한여름은 더러운 부분을 피해 걸어 다녔다.

“확인해 본 결과 C급은 2년, D급은 3년까지 가이딩이 필요 없을 거 같습니다. 더불어 이정도면 A등급까지 커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흐응. S등급의 가이딩을 한계까지 넣었을 때 말이지?”

“맞습니다.”

연구 가운을 입은 직원은 한여름을 따라다니며 실험 결과를 전달하기 바빴다.

“분명 가이드 공단 S등급 리스트에는 권호은이 없었는데. A등급까지 커버가 된다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한여름을 본 연구원이 냉큼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샘플의 주인은 S등급 이상의 가이드입니다. 여태까지 채취했던 혈액 중 이만큼 가이딩이 채워진 적은 없습니다.”

“일부러 숨기기라도 한 건가.”

“가이딩 검사를 다시 진행할까요?”

콧잔등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훔친 연구원은 눈을 빛냈다.

“가이딩 검사를 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해서 안 돼.”

“아…….”

연구원은 입을 다물었다. 얼마 전 간부 한 명과 맞바꿔 온 가이드에 대한 소문은 연구실까지 퍼진 상태였다.

소문으로는 보스의 동창이라는 거 같은데. 날개가 꺾여 새장에 갇힌 새 꼴이라고 했다.

“앞에 경비는 제대로 하고 있지?”

폭발 소리에 구경이라도 난 듯 보초를 서던 타이거 말단이 2층에 몰려 있었다.

한여름 시선 한 번에 마치 강이라도 갈라지듯 말단은 서둘러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가이드를 데려온 뒤 타이거 보안은 기존보다 더 엄격해졌다.

“혈액은 얼마나 더 모아야 해.”

“앞으로 한 번만 더 채취하면 방에 있는 몬스터는 완성될 거 같습니다만.”

한여름은 더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닥거렸다.

“식사를 좀 더 잘 챙겨 먹어야 할 거 같습니다.”

연구원은 최대한 말을 돌렸다. 솔직히 자신이라도 납치당한 마당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거 같진 않았다.

“흐음 살도 좀 빠진 거 같던데. 식사 시중이라도 들어야 하나.”

바지 허리춤이 점점 남아도는 호은을 떠올린 한여름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밥을 못 먹지. 바뀐 환경이 문제인 건가?”

절대 자신이 문제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여름은 창고를 나왔다.

그는 곧바로 호은이 있는 방으로 돌아갔다. 처량하게 훌쩍이고 있을 줄 알았던 호은은 토끼 인형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자?”

발개진 눈가를 손으로 살살 쓸자 호은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너무하네. 분명 기다리라고 했는데 잠이나 자고.”

한여름의 손은 더 위로 올라가더니 땀에 푹 젖은 머리카락에 닿았다. 머리를 정돈해 주는 손길은 서툴렀지만 다정했다.

“…….”

시선이 거두어졌단 느낌이 들었을 때 호은은 눈을 떴다.

“안 잤네.”

한여름의 붉은 눈동자가 짧은 순간 번뜩였다.

마치 자다 깬 듯 잠긴 호은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어디 가…….”

호은은 떠날 채비를 하는 한여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그것에 묘한 표정을 지은 한여름이 느긋하게 입술을 뗐다.

“내 방에 가야지?”

“…….”

호은은 한여름의 옷자락을 잡았다. 일단 붙잡기는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호수가 했던 말이 있기에 사람들이 구하러 오는 동안 뭐라도 해야만 했다.

백우경과 타이거가 관련된 증거를 잡아야 한다. 이 방에 갇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첫 번째로 방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 생각해 보니까.”

“흐음?”

“너희가 이런 일을 저지른 건 어느 정도 협회 탓이 맞는 거 같아.”

“…….”

“그러니까 조금 더 자세히 알려줘. 내가… 타이거 편이 될 수 있게.”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온갖 물건을 던지며 싸우던 상대다. 심지어 한여름은 호은의 발목을 부러트리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꾸역꾸역 말을 꺼내는 게 더 이상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호은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실험에 관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한여름은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불안한 시선으로 한여름을 올려다본 호은은 기어들어 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착하게…… 기다렸잖아.”

“그래서?”

평소라면 열 마디는 하던 한여름이 이상하게 단답형으로 답했다. 호은은 느리게 침을 삼켰다. 목에 사막이라도 있는지 아무리 침을 삼켜도 건조하게 메말랐다.

“발 아파서.”

“…….”

“치료해 줘.”

“아아. 사람 불러 줄게.”

“아니! 네 방에서.”

한여름의 옷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방에서 치료해 달라고. 착하게 기다렸으니까…….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줄 거지?”

목 끝까지 빨개진 피부를 흘긋 쳐다본 한여름은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흐응. 내 방? 오늘은 가이딩 필요 없는데.”

“…….”

“여기서 치료받고 바로 자는 게 편하잖아?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거야?”

호은은 고개를 숙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이 정도 나오면 옳다구나 하고는 방에 데려갈 줄 알았다.

평소에는 자는 사람 허락도 없이 자기 방에 데려다가 침대에 눕혀 놓을 때는 언제고 오늘은 또 이런 친절을 베푸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눈치챘나.’

하기야 자신이 한여름이어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거 같다. 아까 울고불고 꺼지라고 하던 상대방이 자기 방에 가겠다고 그러니.

호은은 자기 객관화를 끝내고 노선을 변경했다.

“너는 나 안 버릴 거지.”

이상하다는 걸 알더라도 약한 부분을 파고들면 어쩔 수 없을 거다. 마주치면 거북하던 붉은 눈을 똑바로 본 호은이 까끌까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했잖아.”

“하하.”

눈썹을 움직인 한여름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사냥감을 잡은 맹수가 배가 부르니 봐준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이불로 감싸진 호은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응. 난 네가 필요해. 호은아.”

“…….”

“그리고 절대 버리지 않아.”

호은은 손을 들어 한여름의 목에 둘렀다. 대답 대신이었다.

목 안쪽부터 만족스러운 소리를 긁어 낸 한여름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복도로 나갔다.

***

다친 발 치료를 받고 나자 한여름은 언제 준비한 것인지 모를 죽을 호은에게 내밀었다.

“지금 밤 아니야?”

“약 먹으려면 이거라도 먹어야지.”

내민 죽을 물끄러미 본 호은은 수저를 들었다. 돌팔이처럼 보이던 의사가 처음으로 약을 처방했다.

“왜. 또 내 얼굴 보니까 토 나와?”

한여름의 말에 호은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을 입에 넣었다. 생각보다 뜨거워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옆에 있던 물을 급하게 찾은 호은은 데인 혀를 식혔다.

죽이라서 그런 건지. 힘쓸 일이 생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호은은 간만에 그릇을 싹싹 비웠다.

“그만 봐.”

첫술을 뜰 때부터 마지막 입까지 한여름은 시선 한번 거두지 않고 호은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껄끄럽게만 느껴지던 한여름의 시선이 이제는 괜찮았다. 도인호의 목소리를 들은 탓인가. 호은은 긴장이 풀린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너튜브는 언제부터 안 거야.”

납치된 지 일주일 만에 두 사람은 부드러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호은이 고슴도치처럼 세우고 있던 가시를 숨겼기에 가능했다.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는 한여름에게 호은은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빵돌이의 댓글은 첫 영상을 올린 지 하루도 안 지났을 때 달렸다. 한여름은 기억을 더듬듯 앓는 소리를 내더니 탄성을 흘렸다.

“아~ 그거? 평소처럼 밥 먹으러 나간 줄 알았는데 핸드폰으로 촬영하면서 먹길래.”

물티슈로 입가를 닦아 준 한여름의 손길을 피하려다 멈춘 호은은 체념한 듯 얌전히 있었다.

“그럼 내가 가이드가 된 건?”

“그건 나중에 알았어. 우리가 딱 바쁠 때 취업했더라고. 그래서 63스퀘어에서도 전혀 몰라봤고.”

그땐 헬멧도 썼으니 한여름이 못 알아보는 게 당연했다.

“가이드 공단 영상에서 목소리 듣고는 취업한 곳이 여기인 줄 알았지.”

“…….”

“멀리서 지켜보지 말걸. 각성한 줄도 모르고 뺏기기나 하고 말이야.”

호은의 턱 끝을 들어 올린 한여름은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만큼 가까웠다.

“…….”

호은은 고개를 돌렸다. 명백한 거절 의사였다.

“유혹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뭐?”

“하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여름의 텅 빈 눈동자가 유난히 섬뜩하게 빛났다.

“그냥. 뭔가 목적이 있어서 태도를 바꾼 거 같아 보여서 말이야.”

저 정도 눈치는 있어야 반정부 보스를 할 수 있는 걸까. 호은은 말라 가는 입술을 축였다.

“그런 거 아니야. 그저 내 상황을 인정한 거뿐이야.”

말을 끝낸 호은은 고개를 숙였다. 타이거는 콘셉트를 지키려는 건지 뭔지 다들 한복을 입고 있었다. 호은 또한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생활 한복 같은 걸 입고 있었다.

여기다가 전통 탈을 쓰면 누가 봐도 타이거의 모습일 거다.

본인들이 이렇게까지 만들어 놓고 막상 저 타이거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니 저 바뀌는 태도는 뭔가 말인가.

“그래? 내가 괜한 생각을 했던 건가.”

“…….”

호은은 대답 대신 절뚝거리는 다리로 안쪽에 있는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씻고 올게.”

굉장히 어색해 보이는 동작이었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호은은 연기자가 아니다.

증거를 찾으라는 동료의 말에 상대방을 유혹해 기밀을 캐는 그런 연기 따위.

‘당연히 불가능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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