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문 닫히는 소리가 나고 호은은 도인호가 줬던 목걸이를 꽉 쥐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저 끔찍한 괴물의 출처가 정말 백우경이 맞을까?
애초에 에스퍼이자 가이드인 ‘멀티’라는 게 뭔지 모르겠다.
이능력이 없는 사람을 위해 이능력 결정체 실험을 진행했던 것처럼, 에스퍼 또한 가이딩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고 싶어 백우경은 저런 실험을 진행했던 걸까.
“회사가 미쳤어.”
도대체 과거에 무슨 짓을 했길래 타이거가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란 말인가. 질문을 해도 답해줄 사람이 없다. 그 사실이 호은을 힘들게 만들었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어째서 이런 거지 같은 회사에 취업하게 된 걸까.
“어째서…….”
이불을 내린 호은은 한여름이 떠난 방에 홀로 남아 있었다.
방은 자신이 갇혀 있던 곳보다 훨씬 컸다. 물건들도 이것저것 들어차 있는 게 한여름이 쓰는 개인 방처럼 보였다.
“윽.”
호은은 왼발을 절뚝거리며 힘겹게 문으로 걸어 나갔다.
“잠금장치가 없어…….”
아까 전에 있던 곳과 다르게 한여름 방 손잡이는 잠금 열쇠가 달리지 않았다.
심호흡하고 문을 열자 밖은 조용했다. 어떻게 생긴 건물인지 창문 하나 없는 게 지금이 밤인지 아침인지 알 수 없었다.
‘한여름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반정부가 실험체라는 증거가 없다.’
한여름은 연기를 잘하니까 이번에도 거짓말이라면? 호은은 실낱같은 희망의 한줄기를 잡기로 했다. 설령 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안 그러면 호은은 지금 이 자리에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으니까.
조용한 복도에 덩그러니 선 호은은 앞으로 나아갈지 말지 고민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타이거가 도인호처럼 실험의 피해자일까 봐 두려웠다. 나쁜 짓을 저지른 것에 대한 정당성을 자신이 혹시라도 부여할까 봐 겁났다.
“난 도대체 뭘…….”
뭘 확인하려고 하는 거지?
“옴마야!!! 진짜 왔네?!”
멀리서 들려오는 여자의 쩌렁쩌랑한 목소리에 호은은 반사적으로 벽에 몸을 붙였다.
계단이 있는 뻥 뚫린 공간에서 나비처럼 뛰어오른 여자는 민원부 현장에서 봤던 월랑이었다.
“꺄아. 진짜네!! 진짜로 왔어!!”
호은의 앞에 사뿐히 내려온 월랑은 뒤늦게 머리를 정돈하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권호은 맞지?”
“…….”
“나 누군지 기억해? 응? 내 품에 안겼잖아!”
누가 들으면 오해할 거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월랑에 호은은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안으신 거겠죠. 월랑…… 씨?”
“어떡해. 와 대박. 내 이름 기억하고 있어!”
기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호은을 와락 껴안은 월랑은 “윽”하고 신음을 내뱉는 목소리에 혼자서 신이 나 주제하지 못하던 몸짓을 멈췄다.
“다쳤어?”
“…….”
“이상하다. 보스가 오면 잘해 주라고 그랬는데. 상처도 내지 말고.”
“됐으니까 좀 떨어지세요.”
월랑은 호은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에스퍼는 본인들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는 거 같다. 아마 내일이면 월랑의 손 크기에 맞게 어깨에 자국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아핫. 미안, 미안. 너무 반가워서 그렇지.”
“…….”
“그나저나 정말 운명인가? 어떻게 우리가 다시 만났지? 응?!”
“여긴 운명론자가 많네요.”
호은은 슬그머니 월랑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운명 좋잖아! 얼마나 낭만적이야.”
호은은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월랑을 피해 힘겹게 복도를 걸어 나갔다.
“잠깐만!! 나 아직 얘기 안 끝났는데?!”
“죄송합니다만 머리가 아파서.”
“그래? 그래도 그쪽으로는 가지 마. 설아가 너 엄청 싫어해!”
앞으로 걸을수록 찬 바람이 분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반설아가 있는 쪽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그럼 전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응?”
“좀 쉬고 싶은데.”
“방 들어가면 되잖아?”
“…….”
한여름의 냄새가 가득한 방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월랑까지 마주치고 나니 모든 것이 지쳤다.
이제는 조용한 곳에 가서 머리 좀 식히고 싶었다.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하든 타이거가 백우경과 어떻게 관계된 건지 생각하든. 어쨌거나 혼자 있을 공간이 필요했다.
“흐음. 좋아 점수 딸 기회네. 내가 안내해 줄게.”
월랑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지친 표정의 호은의 뒤로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발바닥이 땅에서 떨어져 두둥실 올라가더니 가장 높은 꼭대기 층 복도로 이동했다.
“여기 타이거 간부 아지트인데 지금 비어 있어.”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문을 열자 칵테일 바가 나타났다.
일부러 천장을 높게 빼기라도 한 것인지 다른 방보다 층높이가 높게 트여있었다. 칵테일 바 뒤에 있는 장식장에는 가지각색의 술이 채워져 있다.
의자에 앉자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고 있으니 꼭 현장에 돌아간 것만 같았다. 드래곤의 아지트. 거긴 마무리가 잘 됐으려나….
“월랑 씨도 간부인 건가요.”
자꾸만 늘어나는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호은은 누군가를 붙잡고 아무 말이라도 내뱉어야 했다.
월랑은 술을 제조하고 있었다. 잔에다가 술을 따르고 식용 꽃을 예쁘게 배치한 월랑은 얼굴을 붉히며 그것을 앞으로 내밀었다.
“맞아! 기존 멤버는 아니지만, 간부 자리로 스카우트됐거든.”
월랑이 준 칵테일의 내용물은 진한 파란색이었다. 도인호 청염도 이 정도 밝기였던 거 같은데.
“있잖아! 이렇게 예쁜 숙녀가 눈앞에 있는데 자꾸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턱에 손을 받친 월랑이 삐뚜름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이전에 봤을 땐 가면을 쓰고 있어 몰랐지만, 생각보다 앳된 얼굴이었다.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목소리라 조금 전 마주쳤을 때 단번에 월랑인 걸 알았지만, 밖에서 마주쳤다면 김세희와 비슷해 보이는 명랑한 사람이라고 지나쳤을 거다.
“뭐라고 그랬죠?”
“흐음. 스카우트됐다고.”
“스카우트요? 월랑씨는 그럼 원래 어디 소속이셨던 건가요.”
“나는 미국 용병 출신이야! 한국 에스퍼는 무조건 정부 소속이어야 하지만 미국은 정부 소속과 민간 소속으로 정할 수 있거든.”
월랑은 손을 들어 돈 모양을 만들었다.
“머니 따라 움직이는 거지.”
“반정부가 돈을 많이 줬나 보군요.”
호은은 앞에 있는 칵테일을 들어 입 안에 머금었다. 도수가 높지 않은 달달한 맛이었다.
“돈도 많이 주고. 여기서 하는 일도 관심 있었고.”
“2층에 있는 괴물 말인가요.”
“와. 보스가 벌써 거기까지 보여 줬어? 2층에는 데려가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구시렁거리는 월랑은 폴짝 점프하더니 테이블 바에 걸터앉았다.
“저 괴물은 언제부터 있었나요.”
“만들어진 건 얼마 안 됐어. 약이 늦게 구해졌거든.”
“약?”
1층에서 무언가 제조하는 듯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흐응. 왠지 보스가 이런 얘기하는 거 안 좋아할 거 같은데.”
월랑은 가느다란 흰 손가락을 들어 빠져나온 머리를 귀로 넘겼다. 비밀을 공유하면 친해진다. 어디선가 봤던 문구에 월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말해 줬다는 거 비밀이야.”
“…….”
작은 머리통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걸 보자 월랑은 당장에라도 호은을 껴안고 싶었다. 하지만 본능을 누르며 그녀는 목소리 톤을 낮췄다.
“2층에 있는 에스퍼들은 C등급 이하의 에스퍼야. 멀티를 만들려면 기본적으로 해당 에스퍼보다 높은 등급의 가이딩이 필요했거든.”
월랑의 말에 호은은 불현듯 텔레비전을 통해 S등급을 달라고 협박한 타이거가 떠올랐다.
“그래서 정부랑 딜하고 S등급 가이드를 찾던 거 같은데. 내가 듣기로는 완전히 망했다고 들었거든?”
월랑이 무엇을 말하는지 호은은 단번에 이해했다. 63스퀘어 현장에 S등급 가이드는 없었다. 그렇다면 타이거의 계획은 실패해야 했던 거 아닌가?
“그런데 현장에 재발로 기어들어 온 가이드가 S등급이었나 봐.”
호은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월랑이 말한 가이드는 분명 자신이다. 하지만 S등급이라니. 등급 결과로는 분명 D등급을 받았다. 63스퀘어에서 혈액을 채취당한 게 나 말고도 더 있던 건가?
무슨 말이냐고 되묻고 싶었으나 월랑은 샘플의 주인이 눈앞의 남자인 걸 모르는 듯 보였다. 호은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덕분에 해당 혈액으로 S등급의 가이딩 약을 만든 거지. 너도 에스퍼였다면 한 알 먹여 줬을 텐데. S등급 혈액으로 만든 약은 차원이 다르거든.”
월랑은 어느새 호은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호은의 귓가를 손바닥으로 가리고는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C등급 이하의 에스퍼에게 S등급 가이드 혈액을 투여하면 어떻게 될까?”
“…….”
“넘치는 가이딩에 가이드가 필요 없는 에스퍼가 되는 거야! 그래! 바로 멀티! 하하. 근데 인간의 모습은 포기해야 해서 난 거절이지만 말이야.”
호은은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저 괴물을 만든 것에 사용된 게 내 혈액이라고? 말도 안 된다. 자신은 고작 D등급 가이드일 뿐인데.
“낮은 등급의 가이드가 높은 등급의 에스퍼를 가이딩하면 안 되는 것처럼 높은 등급의 가이드가 낮은 등급의 에스퍼를 가이딩 해도 안 되나 봐. 저런 멀티 몬스터가 만들어진 거 보면.”
가까이 붙었던 몸을 뗀 월랑은 뭐가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반대로 호은의 얼굴은 점점 핏기가 사라졌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의 중심에 자신이 관련됐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호은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 저기 보스가 아끼는 양주 있다!”
이능력이 바람이라서 그런지 월랑의 행동 하나하나가 가벼워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양주를 꺼낸 그녀는 아직 남아 있는 칵테일 잔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술 약해?”
“아니요…….”
호은은 남아 있는 칵테일을 단번에 마셨다. 점점 맨정신으로 있는 게 힘들어졌다.
글라스 잔에 얼음을 두어 개 넣은 월랑은 양주를 반 정도 따라 호은에게 건넸다.
“월랑 씨. 미성년자 아니신가요.”
“응? 아냐! 올해 스물!”
잔을 하나 더 꺼내려는 월랑의 손을 호은이 제지했다.
“둘 중 한 사람은 멀쩡해야죠.”
“으잉?”
“저……. 취하면 방에 데려다주세요.”
호은의 모습은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일반 남자에 비하면 절대 가녀려 보이는 인상은 아닌데 오늘은 정말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거 같았다.
단숨에 들이킨 호은의 잔이 비자 월랑은 냉큼 양주를 채워 넣었다.
흰 피부가 붉게 물들어 가는 게 재미있었다.
“어떡해. 벌써 날 믿고 내 앞에서 취하겠다고 그러는 거야?”
몰라 몰라! 손을 들어 뺨을 가린 월랑은 몸을 비비 꼬았다.
-쿵
술이 약하지 않다고 한 호은이었지만 양주 두 잔에 녹다운됐다. 월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양주에 적힌 도수를 확인했다.
“40도…….”
월랑은 혀를 내밀고는 실수했다며 코끝을 찡그렸다.
***
‘너 때문이야.’
‘네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날 네가 안 왔더라면!’
그날 밤, 잠든 호은은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괴물로 변한 에스퍼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들의 원망 섞인 말들이 호은의 정신을 더 아득하게 만들었다.
꿈인 줄 알지만 깨어나질 못했다. 길고 긴 악몽 속에서 호은은 괴로움에 끝내 인상을 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