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말을 끝낸 엄성찬은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거짓 보고서를 작성해 박기현을 외부로 풀어 준다는 거죠?”
“맞습니다!!”
“그것도 반정부를 잡기 위해?”
“해당 의견을 낸 건 접니다. 책임을 져야 한다면 제가 지는 게 맞겠지요.”
백우경의 시선이 엄태석에게 향했다.
“엄태석 부장님이 이런 의견을 주셨다고요? 하하. 정말 의외네요.”
백우경의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야! 너희들! 아까처럼 지껄여 봐! 왜 벙어리처럼 입 다물고 있냐? 부장님 봤죠? 이놈들이 이런다고요. 자기들 편들어 줄 땐 조잘조잘하더니 이것 봐요. 부장님이 책임 다 지게 되는데 가만히 있는 거.”
엄성찬이 팔짱을 낀 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는 배연우를 보며 넌 죽었다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드디어 홍보부가 반정부 꼬리를 잡긴 하네요. 아주 다행입니다.”
만족스럽다는 듯 백우경이 손뼉을 쳤다.
“잘해 보시죠. 결재가 필요한 사항은 이사장 파워로 다 넘겨줄 테니.”
엄성찬은 이사장이 홍보부와 깊게 관여된 사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니 저렇게 가서 백우경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잔뜩 하고 있지.
“이, 이사장님? 지금 그게 무슨.”
“엄태석 부장이 책임 같은 거 질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반정부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온다면 모든 책임은 제가 지도록 하죠.”
호은은 백우경과 배연우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는 엄성찬에게 손을 흔들며 자신을 쳐다보라 가리켰다.
‘너야말로 죽. 었. 어.’
엄성찬이 알아듣기 쉽게 입 모양을 크게 벌려 느리게 하나하나 바꿔 가며 문장을 만들었다.
새파랗게 질리는 엄성찬의 얼굴이 꽤 볼만했다.
“자. 그러면 이걸로 문제없는 거죠? 얼른 회의 마무리하시고 잠들 좀 자세요. 잠을 자야 작전을 잘 짜죠. 시간도 내일 하루밖에 없다면서요? 이거 참 바쁘겠네요.”
“……감사합니다.”
엄태석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런, 이런. 제가 한 게 뭐 있다고요. 이만 가야겠네요. 제가 있으면 여러분도 불편하시죠? 아 그리고 엄성찬 팀장? 가이드를 향해 모욕적인 말은 벌점입니다. 오늘 일은 뭐 피곤해서 그랬다고 이해해 주죠.”
“네??”
“일정 벌점이 쌓이면 진급이 내려간다는 사실 모르셨나요? 평소에도 이런 말투라면 아슬아슬하시겠네요.”
“…….”
“가이드 공단과 이능력자 협회를 따로 만든 이유를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어느 한쪽도 갑이 될 수 없습니다. 공존하는 방법을 배우세요. 소리만 지르시지 말고.”
엄성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한바탕 폭풍처럼 회의실을 휩쓴 백우경은 이제 가 봐야겠다며 회의실을 나갔다.
“씨발.”
엄성찬은 욕설을 내뱉긴 했지만, 이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회의하는 내내 가만히 있었다.
회의는 순조로워졌다. 엄태석과 배연우의 소통하에 어느 정도 작전이 짜지고 기절했던 박기현을 억지로 깨워 드래곤 아지트 내부와 소속된 직원에 관한 정보도 빼내었다.
“다들 피곤할 텐데 고생했네. 오늘 밤 10시 작전 시작하는 걸로 하고 회의는 이만 끝내지. 아가, 박기현에게 쓸 리무버 가져오게.”
“알겠슴다.”
강힘찬이 리무버를 가져오기 위해 회의실을 나가자 열린 문으로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
“박기현 집 원상태로 복구 및 주변 CCTV 정리도 끝났다고 연락 왔습니다.”
머리 숙여 인사한 직원은 다시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푸른색 뭔가가 담긴 병을 가져온 강힘찬이 병을 엄태석에게 건넸다.
“으으…….”
여전히 묶여 있는 박기현은 조금 폭력적으로 답변을 말하게 해서인지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턱이 빠질 기세로 덜덜덜 이를 떠는 그의 턱을 우악스럽게 벌린 엄태석이 병 뚜껑을 열어 박기현의 입에 부었다.
“저게 뭔가요?”
호은의 질문에 언뜻 귀찮은 표정을 지은 배연우는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정식 이름은 메모리 리무버. 기존 기억을 없애는 게 가능해. 이번 임무에서 박기현이 연기를 제대로 할 리는 없을 거 같으니까.”
“하기야. 이번 작전에서 드래곤과 반정부를 속여야 하는데. 박기현 상태가 이상하면 바로 들키겠네요.”
호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모리 리무버를 다 마신 박기현은 의자에 늘어지더니 두 눈이 굳게 감겼다.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한 폴은 박기현을 묶은 줄을 풀어 줬다.
“집 복구됐다고 하니 갖다 놓고 오겠습니다.”
박기현의 멱살을 쥐어 잡은 폴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회의 끝났죠?”
박기현이 사라진 자리를 물끄러미 보던 엄성찬은 질문에 대한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끝까지 재수 없네요.”
호은이 배연우의 귓가에 속삭였다가 에스퍼에게는 아무 소용 없다는 걸 깨닫고 엄태석의 눈치를 봤다.
“허허. 괜찮다네. 맞는 말이지 않은가.”
엄태석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호은이 뒷덜미를 매만지며 죄송하다는 고개를 숙였다.
폴이 회의실에 돌아온 것까지 확인하고 회의는 마무리가 됐다. 다시 자동차를 타고 언제 인천 지사에 가나 했더니 다행히도 폴의 이능력으로 인해 홍보부 전체와 자동차가 몇 초 만에 인천 지사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긴장이 풀린 호은은 하품을 뱉었다. 잠을 자지 못해 피곤했다.
“얼른 들어가서 자요.”
“여울이 도청도 들어야 하는데.”
“인사부에서도 확인하고 있을 거니 괜찮을 겁니다.”
도인호의 말에 어쩐지 안심이 된 호은은 졸린 눈을 비볐다.
“맞네…….”
도인호는 숙소에 들어가면 숙면에 좋은 향이라도 방에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
4시간 정도 눈을 붙인 호은은 간단하게 씻고 나서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 앉아 있는 도인호는 분명 같이 침대에 눕긴 했으나 숙면을 한 건 아닌지 자기 전 모습과 동일했다.
“뭐 하고 있어?”
핸드폰 화면을 응시하고 있던 도인호를 본 호은이 옆으로 앉아 고개를 내밀었다.
[쉿, 이미 늦었어.]
“!!”
호은은 자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핸드폰을 거칠게 뺏어 들었다.
“이거 버, 벌써 나왔어?”
“편집본이라고 보내 준 거 같습니다.”
핸드폰 화면 속 호은은 멋진 표정과 함께 총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도인호는 호은이 들고 있는 핸드폰을 잡아, 놓친 부분부터 영상을 재생했다.
“유치하지? 그런 콘셉트로 가야지 기억에 남는다고 해서.”
“……이번 건 얼굴까지 다 공개된다고 했죠.”
“응 그렇지.”
올려다본 도인호의 표정은 어딘가 서늘해 보였다. 역시 지난번에 괜찮다고 풀었어도 아닌 걸까?
조용히 눈치 보고 있자 커다란 도인호가 호은의 품으로 쓰러졌다.
“??”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감각이 느껴졌다. 도인호는 호은을 품에 안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뱉었다.
“다음에는 저도 가서 볼래요.”
“으응?”
“영상으로 전달받는 건……, 생각보다 별로네요.”
“그, 그래? 똑같지 않나.”
“안 똑같아요.”
도인호가 말하는 바가 정확히 뭔지 이해 안 가는 호은이었으나 그래도 화를 내는 건 아닌 거 같아 안심했다.
“그나저나 영상을 왜 너한테 보낸 거야?”
“저한테만 보낸 게 아닙니다. 홍보부에게만 먼저 보내 준 거 같습니다.”
호은은 자느라 확인하지 못했던 핸드폰 알림을 급히 확인했다.
도인호의 말처럼 메일로 영상이 보내졌으며 참조인은 홍보부와 김세희, 류윤재가 걸려 있었다.
“보시겠습니까?”
영상을 처음부터 돌리려는 도인호에게 호은은 고개를 여러 번 저었다.
“아니야. 나는 확인 안 해도 될 거 같아. 으응. 정말로.”
반정부만 아니라면 이런 흑역사가 될 만한 건 절대 찍지 않았을 거다.
호은은 도인호의 품을 살며시 밀었다. 위에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으나 호은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여울이 하교 시간이겠네?”
호은은 천장을 향해 팔을 뻗으며 어깨를 늘려 줬다. 좌우로 팔을 움직이며 자느라 뭉친 몸을 풀어 주자 찌뿌둥한 몸이 풀리는 것이 이제야 좀 살 거 같았다.
“인형 탈은 차에다 미리 실어 뒀어요.”
“잘했네.”
호은이 도인호의 등을 두드렸다. 오늘 밤. 드래곤의 아지트를 침입하기 전 두 사람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쪽은 감시 제대로 하고 있겠지?”
“주 업무이니 그럴 겁니다.”
호은은 아직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은 메신저를 확인하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 새벽. 한여울과 관련해 폴과 강힘찬은 그녀의 부모를 감시하기로 했다. 반대로 도인호와 호은은 한여울을 집중 마크해 그녀와 다시 한번 접촉하기로 했다.
편한 스타일의 옷으로 갈아입은 호은과 도인호가 숙소를 나왔다.
숙소에서 주차장까지는 15분 정도 걸어야 했다. 초록 나뭇잎이 점점 가을의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인호 너 안 잤으면 내가 운전할까?”
“괜찮습니다. 운전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운전하는 거 좋아?”
운전석에 앉은 도인호가 기어를 조정하고 핸들을 잡았다. 후진을 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도인호의 옆선은 잠을 자지 않았음에도 빛났다.
인천 지사를 빠져나온 도인호는 한쪽 손으로 호은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손을 달라는 뜻이었다. 호은이 자기 손을 겹치자 서로의 손가락이 얽혔다.
“좋아해요.”
한참이나 뒤에 대답한 도인호는 깜빡이를 켜지 않고 돌진한 차와 같았다.
운전이 좋다는 건지, 손잡는 게 좋다는 건지. 애매하게 말하는 건 여전한 도인호였다.
평일 낮의 도로는 새벽만큼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퇴근 시간대보다는 차량이 없었다. 빠르게 달린 자동차는 한여울이 다니는 초등학교 근처의 뒷산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커다란 상자를 꺼낸 두 사람은 풍선에 바람을 넣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반정부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어떤 에스퍼와 가이드가 인형 탈을 입고 초등학교 앞에서 풍선을 나눠 주고 있을까. 반정부를 피해서 변장하려다 보니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달 왔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도인호가 급히 토끼 인형 탈을 들어 호은의 얼굴에 씌우고 자신도 곰 인형 탈을 썼다.
“여기에 두시면 됩니다.”
“예예. 어디 이벤트 하시나 봐요?”
“…….”
배달 기사는 도인호가 아무 말 하지 않자 무안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으며 상자를 내려놓았다.
“뭐여. 너튜버인가.”
배달 기사가 중얼거리며 자리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탈을 벗지 않던 도인호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탈을 벗었다.
탈을 쓴 채 묵묵히 풍선에 바람을 넣고 있던 호은은 헬륨가스가 들어 있어 날아갈 것만 같은 풍선을 줄에 묶어 놓고는 인형 탈을 마저 입었다.
“어제 했던…….”
토끼 탈을 입은 호은에게 뭔가 부탁이 있어 보이던 도인호는 귓가를 붉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풍선도 이만하면 된 거 같은데 슬슬 갈까?”
토끼 인형 탈이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응? 하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네!”
도인호는 주먹을 쥐며 눈앞의 귀여운 남자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