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뭐?”
박기현은 재차 되물었다.
“가이드 기분에 따라 가이딩의 질이 달라지는데 넌 지금 음식물 쓰레기 같은 걸 맛있다고 처먹고 있다고.”
배연우는 확신에 가득 찬 어투로 말했다.
“너. 가이드한테 가이딩 받아 본 적 없지?”
“그게 뭐 어떻다고!! 그딴 거 없어도!!”
“없어도, 약으로 버틸 수 있다고?”
“그, 그래!!”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는 상황에 호은은 가만히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타이거가 데려간 에스퍼 의심자들 전부 저 상태라면 큰일이군.”
엄태석은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호은은 뭐가 문제인지 궁금해 입술이 달싹거렸다.
“시폭.”
이때 도인호가 입을 열었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만들었네요.”
그 담백한 말에 호은의 동공이 커졌다.
“시한폭탄? 그런 걸 만들어서 뭐 함까?”
강힘찬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어투로 말했다. 폭주한 에스퍼는 죽고 만다.
에스퍼의 수가 곧 국가의 힘을 나타내는 이 상황에서 그런 건 전력을 낭비하는 것에 비하지 않았다.
‘도인호처럼 결정체 이식자도 아니고…….’
“하아. 미친놈들 아니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 배연우는 머리를 쓸어 올리다 억세게 쥐었다. 골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배연우는 단전에서부터 분노를 끌어 올리듯 거친 숨을 뱉었다.
“미끼군.”
엄태석의 내린 결론에 배연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반정부가 가지고 있는 에스퍼를 구하기 위해 가이드를 보내라는 협박이라도 준비할 모양입니다.”
거친 태도를 보이던 배연우는 상사에게만큼은 제대로 격식을 차렸다.
“미끼를 던진 건가요? 아니면 아직 미끼를 모으고 있는 걸까요.”
왜인지 지난번 이름 모를 남자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으려다 오히려 잡아먹힌다고 하니까.’ 고조 없던 목소리가 마치 귓가에 울리듯 생생했다.
“기존 의심자와 박기현을 합쳐 봤자 소수네요. 이 정도 인원으로는 상부가 나서 줄 거 같지도 않은데.”
“단언하는 건 여전하구나.”
엄태석이 배연우의 말에 끼어들었다.
“사라진 의심자 두 명과 박기현까지 포함하면 세 명. 거기다 한여울까지 각성하면 총 네 명이지.”
네 명이라는 말에 배연우가 뭔가 눈치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서울, 인천, 김포, 제주. 이능력자 협회에 폭주자 한 명씩 배치한다면 어떨까. 폭주 날을 맞출 순 없을 테니 한 명씩 터트리겠지. 이능력자 협회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칠 거고 국민의 공포는 올라간다.”
“……그렇게 되면 저희 쪽에서도 움직일 수밖에 없겠네요.”
“무슨 말임까?”
“반정부에게 가이드 지원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라네.”
대화를 듣던 박기현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키, 킥. 역시 너네는 아무것도 아니네. 그분에게 비하면…….”
아침이 밝아 오는 듯 어느새 하늘은 푸르스름해졌다.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새벽 공기가 방 안을 환기한다.
“부장님. 이제 이 녀석 필요 없는데 기절시킬까요?”
가만히 있던 폴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엄태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난 폴이 박기현의 목덜미를 가격했다.
“한여울 쪽은 어떻게 됐나.”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만, 어젯밤 확보한 음성에서 그녀가 에스퍼일지도 모른다는 심증은 확신이 섰습니다.”
폴 또한 한여울의 도청을 듣고 있었나 보다. 밤늦게 나눴던 부모의 대화 부분부터 녹음기는 재생됐다.
“추가로 한여울 부모가 드래곤과 연관된 거 같습니다. 도박에 빠져 돈을 전부 탕진한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어 말하는 배연우에 엄태석은 턱을 매만졌다.
“그래 봤자 아직 뭐 나온 거 없잖아요. 이런 거 잘못 얽히면 곤란한데.”
엄성찬이 짜증 나는 어투로 말을하자 호은이 눈을 치켜뜨고 그를 노려봤다.
“뭐, 뭘 째려봐. 홍보부 애들은 도대체 하나같이 상태가 왜 이래. 하여간 그냥 박기현만 인사부로 인도받고 끝냅시다. 설마 저거 이용해서 반정부 잡거나 그러진 않을 거죠?”
“…….”
“이젠 쌍으로 째려보네.”
배연우가 매서운 눈으로 엄성찬을 째려봤다. 만약 배연우가 에스퍼였다면 엄성찬의 얼굴은 저 시선에 구멍이 났을지도 모른다.
“테러 조짐을 묵인했다가 나중에 발생하게 되면 인사부도 책임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막을 수 있을 때 같이 막으시죠. 이번 임무는 협력 작전이잖습니까.”
“야! 그런 의미의 협력이!”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치고 배연우에게 쏘아붙이려는 엄성찬을 엄태석이 손으로 막았다.
반쯤 엉덩이를 들어 올린 엄성찬은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배연우 대리. 특별부에서 홍보부까지 반정부 전담 부서가 생긴 이유가 뭔지 아는가.”
“반정부 소탕 자체가 위험하니까요. 그래서 지원받아 만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 말고 다른 것도 하나 있지. 임무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오로지 책임을 질 부서가 필요하거든. 총알받이처럼 욕을 감당할.”
배연우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한 표정이다.
“반정부와 관련해서 홍보부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네.”
“…….”
엄태석의 말에 반박하는 인사부 직원은 없었다.
“하지만, 연우 네게는 내가 갚아야 할 것이 있으니 하루를 주마.”
“??”
“박기현을 풀어 줄 테니 이 녀석을 이용해 아지트로 잠입하게. 그리고 반정부에 대해 알아내든 못 알아내든 자정이 되면 박기현은 우리가 데려가겠네.”
배연우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엄태석을 쳐다봤다. 혼란스럽고 복잡한 심경을 나타내듯 오묘한 배연우의 표정에 호은 또한 속으로 놀랐다.
“아가. 보고서에는 각성자였던 박기현을 숨긴 반정부가 한여울 또한 각성 사실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커 그녀를 직접 만나기 위해 박기현을 풀어 줬다고 보고하게.”
“넵 부장님.”
-쾅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사사로운 감정으로 팀 망하게 할 일 있어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려친 엄성찬이 소리를 질러댔다.
“제가 이러라고 부장님에게 말씀드린 거 같아요? 가서 예전처럼 혼 좀 내고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란 뜻이었다고요.”
“…….”
“부장님. 기억 안 나세요? 이놈이 각인 허락한다고 할 땐 언제고 각인을 강제로 당할 뻔했다며 나 신고하던 거?! 씨발. 이번 기회에 좀 잘해 주다 똑같이 엿 먹여 주려고 했던 건데.”
엄성찬은 자신을 말리는 사람이 없자 기세가 올랐는지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저 이놈 때문에 팀장 진급도 취소될 뻔한 거 아시잖아요!!”
“그래. 안다.”
“그렇죠? 그럼 이제! 저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쥐고 있던 주먹이 눈에 보이게 부들부들 떨고 있던 배연우는 입술을 연신 깨물며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손이 부러진다고 해도 지금 당장 엄성찬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지금이라도 한 대 칠까?
그러다 징계라도 받으면 팀원들에게 폐를 끼치는 건 아닌가? 여러 생각이 배연우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주제 파악 못 하는 건 성찬이 너다.”
고풍이 흐를 것만 같은 목소리에 언뜻 짜증이 묻어 있다. 배연우는 조심스럽게 엄태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수에 맞지 않게 좋은 가문을 만났어. 아니, 널 이렇게 만든 건 가문 탓인가.”
엄태석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몇 번이고 후회했다네. 가문의 위엄이 뭐라고 잘못한 사람의 편을 들어 준 게 말이야. 성찬아. 연우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 오로지 너 혼자 착각하고, 너 혼자 앞서 나가고, 너 혼자 주제 파악 못 해서 소중한 사람을 잃은 거다.”
“……뭐야. 왜 내 편 안 들어줘요?! 배연우 이 새끼가. 이제 부장님도 꼬셨냐?”
엄성찬이 배연우에게 손을 뻗으려고 하자 남운수가 단숨에 막아섰다.
“너…… 지금 엄청 추해.”
“씨발! 안 놔?! 뭐라는 거야. 재수 없는 새끼가.”
자리에서 일어난 호은은 배연우를 지키듯 그의 옆에 섰다.
“저. 솔직히 제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 가만히 있었는데. 그만하시죠. 떳떳할 만한 일도 아니었던 거 같은데. 왜 그렇게 목소리가 크세요?”
신입인 호은이 나서자 엄성찬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엄성찬 팀장님보다 저희 배연우 대리님이 일도 훨씬 잘하시고 능력도 좋으신 거 같은데. 배 아파서 지금 이러시는 거예요? 가문 좋은 본인보다 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가이드가 있다는 게 불만이세요?”
처음 봤던 순간부터 신경 쓰였다. 엄성찬은 같은 가이드인 강힘찬과 자신에게는 저렇게 심한 혐오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보이는 혐오의 대상은 오로지 배연우에게 향했다. 각인하기 위해 구워삶았던 가이드가 자신을 버렸기 때문에 저러는 걸까?
엄성찬을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호은은 그가 가진 여러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질투, 부러움, 아쉬움, 후회, 분노, 혐오. 짧은 순간 참으로 여러 감정을 내보내던 엄성찬이다.
“배연우 대리님은 더 이상 인사부가 아니에요. 엄성찬 팀장님이 우리 부서에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신입이라 잘 모르지만요.”
무작정 말을 내뱉긴 했으나 호은은 신입인 주제에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민망함이 올라와 헛기침을 뱉었다.
“이번에는 좋은 팀원을 만났군.”
식은땀을 흘리며 분위기를 살피던 호은에게 엄태석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배연우가 피식 웃으며 호은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어쩔래. 쪽수에서 밀리는 거 같은데 더 싸울래?”
엄성찬은 주위를 둘러봤다. 폴과 강힘찬은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고 그 외의 시선은 다 자신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
“하. 어이가 없네. 배연우 너 대단하다. 도대체 사람을 얼마나 후리고 다닌 거냐? 씨발. 나 이대로 가만히 못 있지. 이거 상부에 말하면 그만이잖아?”
회의실 문을 열려는 엄성찬에 엄태석이 손가락을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끼익, 문 마찰음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앞에 커피를 들고 있는 백우경이 서 있었다.
“이, 이사장님?”
“아핫. 서프라이즈?”
백우경은 얼빠진 엄성찬을 지나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우연히 본사에 들렸다가 인사부 회의실에 불이 들어왔길래 찾아왔는데. 제법 소란스럽네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은 백우경은 자연스럽게 빈자리에 앉았다.
호은은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사람의 수를 딱 맞춘 커피에 우연이 아닌 것을 눈치챘다.
“뭐. 상부급 찾으러 멀리 갈 필요 있나. 나한테 말하세요.”
“이사장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저것들이!”
당황했던 엄성찬은 옳다구나 싶었는지 백우경 앞으로 다가가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백우경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는 걸 눈치 못 챈 엄성찬은 그가 자기 말에 귀 기울여 준다 착각한 건지 저속한 단어까지 섞어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