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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직장에서 사내연애-85화 (85/129)

85화

콜라와 치킨팝이 담긴 상자를 든 두 사람은 오솔길을 내려가 초등학교 앞으로 갔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동 심리 상담 센터를 홍보하는 사람 정도로 보이는 두 사람은 정문 앞에서 풍선과 음식을 나눠 줬다.

“야 얘들아! 여기 콜팝 준다!”

“어디?!”

당연히 풍선을 들고 있는 호은보다는 콜팝을 나눠 주는 도인호에게 아이들이 몰렸다.

덕분에 호은의 앞은 텅텅 비어 있었다.

“조금 슬프네.”

호은이 씁쓸한 목소리를 내뱉었으나 이내 멀리서 걸어 나오는 한여울에 정신을 다잡듯 눈을 크게 떴다.

“여울아 안녕?”

“…….”

한여울은 콜팝에는 관심 없다는 듯 호은에게 다가왔다. 건넨 인사에도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딱히 풍선을 받으려고 온 거 같지는 않고 학원 차가 있는 방향에 호은이 있기에 지나가는 길이었던 거 같다.

“나 어제 봤는데. 기억 안 나?”

호은은 여울에게 풍선을 내밀며 몰래 숨겼던 콜팝을 같이 주었다.

“기억나요.”

“하하. 아저씨가 준 선물은 마음에 들어?”

“그냥 토끼 인형이잖아요.”

한여울의 대답에 호은은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맞지 그냥 토끼 인형. 사실 그건 나쁜 꿈을 잡아먹는 인형이야. 그러니까 침대맡에다가 두는 게 좋아 알겠지?”

“뭐. 생각해 볼게요.”

한여울은 어제만큼 날 선 모습은 아니었다. 호은이 조심스럽게 손을 모아 귓속말하는 것처럼 모양새를 만들었다. 한여울은 무표정한 얼굴로 귀만 살짝 가져다 댔다.

“여울아. 이건 비밀인데. 우리 토끼들은 미래를 볼 수 있거든?”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호은에 한여울이 진짜냐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나는 비밀 임무를 하고 있어.”

“비밀 임무……?”

한여울이 또래보다 똑똑한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공부만 그렇지 그래 봤자 한여울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같은 토끼를 제외하고는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줘서는 안 돼.”

한여울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설령 그게 부모라도 말이야.”

“왜요?”

한여울은 이제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호은의 말에 집중했다.

“우리 토끼들의 능력을 탐내고 잡아가려는 못된 악당이 있거든.”

호은은 한여울의 눈높이에 맞게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 엄마랑 아빠한테 말해 버렸는데…….”

“역시 그랬구나.”

호은은 목소리를 조금 더 낮췄다.

“사실 토끼 왕이 그 사실을 알아 버렸어. 그래서 오늘 여울이네 엄마랑 아빠는 심판을 받아야 해.”

“심판?”

“응. 부모님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오늘 집에 부모님이 안 들어와도 여울이는 크게 걱정 안 해도 돼.”

“만약에 나쁜 사람이면 어떻게 되는데요?”

“나쁜 사람이면 벌을 받겠지?”

“…….”

역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다. 순진한 얼굴로 물어보는 탓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호은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밤 한여울의 부모는 또다시 도박장에 들어올 것이 분명했다. 박기현의 정보가 맞는다면 그들은 현재 드래곤이 밑 작업하는 호구 중 한 팀이라 했다.

오늘이 호구를 잡는 마지막 날이라고 했으니 그들은 가진 돈을 다 털어서 도박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니까 집에 아무도 없는데 누가 문을 열어 달라고 하거나.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면 그건 우리 토끼를 잡으려는 나쁜 놈들이야.”

“나쁜 놈들?”

“내가 준 토끼 인형 있지? 무슨 일 있으면 토끼 인형에게 도와 달라 말하면 돼. 그럼 내가 구하러 갈게.”

한여울이 10살이 아니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믿지 않을 거다. 아니, 적어도 한여울이 호은의 이야기를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하기만 하더라도 이상한 사람이라 신고당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한여울은 어른에게도 친구에게도 벽을 쌓아 두는 아이였다. 그녀는 호은의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

더불어 정말로 에스퍼 각성 단계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을 때 동지를 발견했으니 이렇게 쉽게 넘어올 만도 했다.

‘외로웠겠지. 남들과 다르다는 건.’

“아저씨는 착한 사람이에요?”

“글쎄. 한번 봐 볼래?”

호은은 한여울이 에스퍼가 맞는다고 굳게 믿었다. 모든 정황이 그녀를 에스퍼라 가리키기도 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확신이 섰다.

한여울의 작은 손바닥이 호은의 팔을 꾹 눌렀다.

“…….”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여울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와 풍선이다! 저도 주세요!!”

도인호가 가지고 있던 콜팝이 동이 나자 아이들이 풍선을 들고 있는 호은에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인파에 밀린 한여울은 호은과 떨어진 거리에서 자기 손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어?! 자, 잠깐만.”

호은은 아이들에게 풍선을 나눠주며 뒤를 돌았으나 이미 한여울은 떠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전달이 잘 되었으려나.’

계획대로 전부 실행했으나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 마지막 풍선!”

호은은 다시 앞으로 돌아 가지고 있던 풍선을 아이들에게 나눠 줬다. 더는 들고 있는 게 없다는 것을 확인받고 나서야 초등학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 이렇게 커다란 곰은 처음 보는 거 같아.”

도인호와 차가 주차된 곳으로 향하던 호은은 커다란 곰 인형 탈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바지 기장이 짧기라도 하는지 다른 사람이라면 신발 위로 접혔을 밑단으로 살이 보였다.

“이상한가요?”

“음…… 불곰 같은 느낌이긴 하다.”

어디를 보고 있는지 모를 인형 눈이 텅 비어 보였다. 호은은 자신 또한 저렇게 보이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으나 인형 탈을 쓰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 뭐 어쩌겠나 싶었다.

호은은 인형 탈을 갈아입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힘찬 씨. 여기는 끝났는데 그쪽은 어떤가요?”

-드래곤에서 마주친 지인으로 둔갑해서 가짜 도박장에 유인했습니다. 여기서 돈을 따게 했으니 아마 저녁에는 이 돈 들고 드래곤에게 갈 거 같슴다.

“집에 들어올 시간도 없겠네요. 오늘 한여울 마지막 학원이 과학이었죠. 저녁 시간대니까 학부모에서 준비한 것처럼 도시락이라도 돌려야겠네요.”

-그렇게까지 해야 함까?

강힘찬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어투로 물었으나 호은은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10살이면 잘 먹어야 한다. 평소 한여울은 학원 쉬는 시간에 편의점에서 밥을 때우는 형식이었다. 그런 걸 먹으니 애가 이렇게 말랐지.

사전에 조사했던 도시락 업체에 전화한 호은은 한여울이 다니는 학원에 단체 도시락을 주문했다.

“다 끝났어요?”

호은이 통화를 하는 동안 정리를 끝낸 도인호가 차에 짐을 실어 넣으며 호은을 돌아봤다.

“응. 다 된 거 같아.”

호은은 인이어를 찼다. 한여울의 집에 아무도 없는지 인이어는 조용했다.

“오늘 잘 할 수 있겠지.”

“…….”

도인호는 별다른 말 없이 호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 있으면 내 옆에 있어요.”

“응?”

“저도 이제 지킬 수 있는 싸움을 할 거니까.”

“그래? 고맙긴 하지만, 나도 연약하기만 한 가이드 포지션은 사양이야.”

호은이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햇살을 받아서인지 다갈색 머리카락이 밝은색을 띠었다.

“그러니까 서로 지켜 주자.”

권호은은 그랬다. 지킴이 필요한 대상보다 지켜 주는 쪽을 희망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도인호의 볼이 상기됐다.

‘닿을 수 없다. 가지고 싶어도 손에 온전히 쥘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권호은은 그런 사람이다. 그 사실에 슬퍼할 틈도 없이 스스로 빛내는 권호은에게 또 한 번 반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서로 지켜 줍시다.”

“응!”

호은이 해맑게 웃었다. 풍선은 분명 아까 아이들에게 다 나눠 줬건만. 어째서 마음이 붕 뜨는지 모르겠는 도인호였다.

***

인천 지사로 복귀하자마자 바로 회의실로 들어온 두 사람을 배연우가 반겼다.

“왔냐?”

밤에 봤던 다크서클보다는 조금 나아진 몰골의 배연우와 화이트보드 앞에 있던 남운수가 어색하게 손을 올리며 반겨 줬다.

“이번 현장에서 인사부는 엄태석 부장, 강힘찬 가이드가 메인으로 도와줄 거고 엄성찬과 폴은 백업 예정이다.”

“백업이면 드래곤 아지트에 안 들어온다는 건가요?”

“특별한 일 없으면 그럴 거다. 그리고 우리는 전원 아지트에 입장.”

배연우의 눈이 투지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전부 들어가는 만큼 원신을 잡거나, 반정부 목적을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 정말로 시한폭탄을 만들어 협회를 테러할 건지. 일반인과 손을 잡은 이유는 뭔지.”

“네 알겠습니다.”

배연우를 따라 호은도 눈을 빛내며 의지를 불태웠다.

박기현을 통해 여섯 사람은 모두 정당하게 입장할 수 있는 초대장을 얻었다. 물론, 이미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있기에 어제처럼 변장은 필수긴 했다.

“일단 한여울 부모 쪽은 도인호랑 권호은이 맡아.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했으니 제 발로 나가지 못할 가능성도 있으니까.”

“넵.”

“그리고 나랑 남운수는 자유롭게 이동하며 정보를 캘 거다. 인사부는 왜 현장에 직접 참여한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박기현을 밀착 감시하겠지. 이사장에게 허락 맡았긴 해도 박기현을 놓치면 안 되는 건 변함없으니까.”

박기현이 말한 아지트 구조를 확인하며 각자 어느 위치에 있을지 남운수가 배치하기 시작했다.

1층은 일반인도 들어올 수 있는 평범한 술집이었고 지하 1층부터 회원만 들어갈 수 있었다.

기다란 바와 여러 둥근 테이블이 놓여 있는 곳은 작은 스테이지가 마련되어 노래와 함께 댄서가 춤을 추며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했다. 그곳에서 박기현은 마약 손님을 받는다고 했다.

지하 2층은 도박장이었는데 구조를 보아하니 범죄는 지하에서 저지르고 무슨 일이 생기면 망설임 없이 1층에 있는 일반인을 인질로 잡으려고 만든 구조 같았다.

“더러운 놈들이네요.”

“이번 사건 마무리하면 경찰에다 넘기고 가려고. 이런 쓰레기랑 설마 반정부가 손을 잡았다니. 수준 떨어지네.”

“그동안의 반정부는 일반인과 손을 잡거나 그러지는 않았나요?”

“어. 솔직히 한국에서 활동을 거의 안 했어. 세계 반정부 연합 일에만 끼어들었지, 한국에서는 얌전했어. 아마 시기를 보고 있었겠지.”

음침한 새끼들. 작게 중얼거리니 배연우가 상종도 하기 싫다는 듯 진절머리를 쳤다.

“점점 도가 지나치고 있어. 빨리 잡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 놓치면 안 돼.”

배연우의 강한 의지에 답하듯 호은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꼭!! 잡겠습니다!!”

회의실 가득 찬 호은의 목소리에 배연우는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입은 웃고 있었다.

회의를 끝내고 준비를 맞추자 어느새 인사부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되었다. 무전기와 인이어를 제대로 찼나 확인한 호은은 떨리는 숨결을 뱉었다.

“긴장되네요.”

“약은 챙겼냐?”

배연우의 말에 호은은 급히 바지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작은 물약 통이 만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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