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대화를 통해 나온 내용을 정리해 타이핑한 호은은 노트북을 닫았다.
“이제 슬슬 숙소로 돌아갈까?”
“좋습니다.”
지난번 폭주할 뻔했던 도인호를 가이딩함으로써 호은은 자연스럽게 팀 가이드가 됐다. 홍보부로서 첫 출근을 하는 오늘로부터 일주일간 임시 파트너 기간이고 이후에 정식 팀 가이드로서 근로 계약서를 다시 쓰게 된다.
인턴 기간이 끝나면 숙소 이용을 끝낼 수 있다. 집이 회사와 가깝지 않은 가이드는 계속해서 이능력자 협회의 숙소 건물을 이용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팀 가이드는 자신이 담당한 에스퍼 팀과 같은 숙소를 사용해야 한다.
숙소로 향하는 길. 호은은 오전에 메일로 왔던 팀 가이드 지침서 파일을 읽었다. 팀 가이드 업무와 에스퍼를 케어하는 방법 등이 있었는데 눈길을 끄는 건 지난번과 같은 마지막 장이다.
인턴 때 받았던 것처럼 올바른 성행위 방법이 그림 컷과 함께 설명되어 있었는데 지난번보다 더 단계적으로 컷이 나뉘어 있었다. 그때 당시에도 남자끼리도 그런 짓이 가능하다는 건 알았지만 받는 쪽이 뒤를 푸는 상세한 과정까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호은은 잠깐 머릿속에 도인호를 떠올리다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무리 가이딩이라고 하지만 도인호의 첫 키스부터 관계까지 자신이 해 주는 게 맞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숙소가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도인호의 집에서 회색 작업복을 입고 있는 남성이 나왔다.
“아. 마침 타이밍 좋게 오셨네. 필요하신 가구들은 배치해 뒀으니 한번 봐 보세유.”
도인호 집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다. 남자의 말에 두 사람이 집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도인호의 숙소 모습은 휑하기 짝이 없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춥게 느껴지던 모습이었다. 집 안을 둘러보자 거실과 부엌은 기존과 동일했지만 사용하고 있지 않던 방과 도인호의 방이 달라져 있었다.
도인호의 침대는 기존보다 사이즈가 더 커져 있었고 빈방은 호은을 위한 건지 1인용 소파와 따듯한 느낌으로 쉼터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호은 형 숙소는 그대로 있으니까 가이딩하러 오실 때만 이쪽으로 넘어오셔도 돼요.”
드레스룸까지 확인을 끝낸 호은은 냉장고 문을 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일단 익숙해질 때까진 여기 있어야지. 정도 붙일 겸.”
“그, 그러면……. 더 필요한 물건 있으면 알려 주세요.”
평소 숙소에 대해 아무 생각 없던 도인호는 자신의 집에 호은이 있을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이유 모를 기쁨을 느꼈다. 가구가 있든 없든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제는 호은의 물건으로 가득 채우고 싶다.
저녁을 만들려는 건지 냉장고를 스캔하는 호은을 뒤에서 지켜보며 도인호는 배 안에서부터 들끓는 만족감을 느꼈다.
한 달 전 그때처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때는 잠깐이라도 떨어져야 했지만, 이제는 호은과 계속 같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머리로는 다시 한번 본인의 숙소로 돌아가 쉬라고 말을 하라 명령하는데 굳게 닫힌 입술은 명령을 철저히 무시했다.
집이라는 공간은 그저 임무를 나가기 전 대기하는 장소 그 이상도 이하고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갈 곳이 생겼다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옛날과 다르게 냉장고에 음식이 채워져 있었다. 덕분에 호은은 식사 준비를 순조롭게 할 수 있었다. 도인호는 재료 손질을 하려는 호은의 옆에 다가갔다.
“도와주려고?”
“네.”
“그러면 오므라이스 만들고 있으니까 계란 좀 풀어 줘.”
성인 남자 두 명이 서 있기에는 조리대가 비좁게 느꼈지만, 도인호는 굳이 호은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요리를 도와갔다. 가끔 살짝 부딪히는 어깨에 기분이 좋았다.
호은이 퇴원하고 나서의 첫날밤은 평화롭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같은 침대에서 자기 전까지 말이다.
평소처럼 같이 저녁을 먹고 간단하게 잘 준비를 맞춘 호은이 도인호의 방으로 들어왔다. 방사 가이딩과 직접 가이딩 두 가지를 챙겨 주기 위해 도인호의 침대에 누운 호은은 무슨 일인지 두 눈을 말똥말똥 뜬 채였다.
병원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도인호의 옆에서 잘 잤던 것 같은데 팀 가이드 지침서 내용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녀 잠을 방해한다.
가이드 워치로 봤을 때 도인호의 가이딩 수치는 50%이다. 옛날에는 이 정도 붙어 있으면 조금 더 올라갔던 것 같은데 가이딩도 내성이 생기는 건지 퍼센트 올라가는 수치가 적다.
일반적으로 에스퍼가 임무에 나가려면 70% 이상은 채우고 나가야 하지만 그동안 도인호에게 해당이 안 되었던 사항이다.
앞으로 호은이 팀 가이드로 있는 이상 가이딩 수치를 안정화할 필요는 있다.
‘지난번처럼 키스라도 하고 있어야 했나?’
순진한 도인호에게 ‘가이딩하게 입술 좀 줘 봐.’ 하며 다가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부끄러움과 동시에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잠 안 와요?”
호은이 몸을 뒤척거리자 잠긴 목소리인 도인호가 물었다. 차마 당사자 앞에서 너랑 스킨십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 잠이 안 온다고 말할 수 없는 호은은 고개를 저었다.
“자려고.”
호은은 도인호의 손을 잡았다. 손잡고 자는 것도 직접 가이딩의 일부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도인호는 호은에게 잡힌 손을 들어 손등에 입 맞췄다.
“잘 자요.”
“……으응.”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은 순식간에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불이 꺼져 있어 다행이다 생각한 호은은 입술이 닿았던 손등의 감촉에 다시 한번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
잠을 설쳐서 그런지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호은은 기지개를 켜며 빈 옆자리를 확인했다.
“운동이라도 하러 갔나.”
간단하게 스트레칭하며 나가려고 하던 호은은 왼쪽 손목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걸음을 멈췄다.
퇴원 후 호수에게 새로 받은 가이드 워치는 기존 인턴용에서 정직원용으로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다. 디자인은 인턴용과 크게 달라진 점을 발견할 수 없었지만, 기계 내부는 업데이트가 된 게 맞는지 못 보던 앱이 여러 개 보였다.
[누적 가이딩 수치 12%]
[직접 가이딩의 강도를 높여 주세요.]
워치 화면에 뜬 문구는 어젯밤 숙면 중 진행됐던 가이딩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강도를 높여 주세요’라는 문구에서 눈을 떼지 못한 호은은 양손을 얼굴에 감쌌다. 아침밥도 먹지 않았는데 속이 체한 것만 같다.
“알아서 할게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호은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마치 초야는 언제 치를 거냐고 구박받는 황제가 된 기분이다. 옆자리에 도인호가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호흡을 가다듬고 방에서 나왔다.
부엌에 서 있는 도인호를 보자 몸에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번엔 마치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다. 그 시절 호은은 식욕과 성욕이 최대 정점을 찍었다. 남자에게는 흔한 일이었으나 바른 청소년이던 호은은 그 시절이 부끄러웠다. 잡념을 애써 떨치며 호은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일찍 일어났네.”
“네. 이거…….”
도인호가 입술을 우물거리며 식탁으로 호은을 데려갔다. 토스트와 샐러드. 그리고 미역국과 반찬들이 식탁 가득 채웠다.
“이걸 다 한 거야?”
“네…….”
호은은 자리에 앉아 미역국을 한술 크게 떴다. 부드럽게 씹히는 미역과 부드러운 고기 그리고 고소한 국물까지.
“맛있네!”
당근과 호박이 들어간 건지 알록달록한 계란말이도 입에 넣었다. 짭조름한 소금과 푹신푹신한 식감이 잘 어우러진다.
“인호야. 너 요리 왜 이렇게 잘해?”
“레시피 보고 따라 한 게 다인, 거, 걸요.”
호은이 맛있게 먹자 맞은편에 앉은 도인호가 칭찬에 부끄러워했다.
‘이렇게 착한 도인호를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호은은 자신이 여태까지 했던 수위 높은 상상에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실제로 깨문 건 바싹하게 구운 토스트였지만.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배를 채우고 각자 멘토를 섭외하기 위해 오늘은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동기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자 타이밍 좋게 호수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개인 면담이다. 정문으로 나와.
뚝. 어쩐지 아침부터 잘 풀린다고 했다. 호은은 전화 예절이 무례하기 짝이 없는 호수의 행동에 혀를 찼다. 어차피 호수 또한 가이드이니 개인 면담에서 영상에 필요한 소스를 다 뽑아 오겠다고 생각하며 호은은 정문으로 갔다.
도롯가에 주차된 벤츠 S 클래스를 보며 자연스럽게 조수석을 타려던 호은의 어깨를 누군가 툭 쳤다.
“저, 권호은 가이드님?”
“네?”
“호수 차장님 명령으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백발의 머리카락에 중간중간 남색 브리지가 눈에 띈다. 호은은 처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느낌이 안 나는 남자를 의아하게 쳐다봤다.
“차 타고 가는 거 아닌가요?”
“아니요.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 바람이 불었다. 남자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걸 보며 호은은 입을 벌렸다. 호수가 차고 있는 귀걸이. 그 귀걸이의 색과 남자의 머리카락 색이 같다.
남자가 얼어붙은 호은의 어깨를 잡고 이능력을 쓸 준비를 한다. 호은은 얼음 땡이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려 차를 봤다.
“아니. 멀쩡한 차를 두고 왜, 욱.”
“인천에서 경주까지 차로 가면 오래 걸립니다.”
순간 이동 특유의 메스꺼움과 두통이 찾아온다. 에스퍼가 이렇게 이능력을 남발해도 되는 건가?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자동차를 뒤로한 채 호은은 면접을 봤던 가이드 공단에 도착했다.
호은이 정신 차리는 거까지 확인한 남자는 따라오란 말 없이 선두로 걸어 나섰다.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은 채 뒤를 쫓았다.
오랜만에 온 가이드 공단은 잘 가꾼 정원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하니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차장님은 지금 개인 자택에 계십니다.”
교육 담당자로만 알고 있던 호수의 직책이 차장인지 남자는 호수를 계속해서 차장님이라고 불렀다.
‘나도 저렇게 불러야 했나 보네.’
직장 예절도 모르고 사회생활 경험도 없는 호은은 차장이라는 소리가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에서 내렸다.
“여기서 사시는 건가요?”
개인 휴게실3 이라고 적힌 문 앞에 멈춰선 남자에 호은이 질문했다.
“문을 여시면 아시게 되실 겁니다.”
“그게 무슨……?”
“그럼 이만.”
남자는 인사 후 미련 없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가이드 신입이 연봉 1억을 받는데 차장이면 더 돈을 많이 벌지 않나? 왜 휴게실에서 사는 걸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은이 문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뭐야?”
청량한 바람과 풀 내음. 문을 열자 일반 휴게실이 아닌 상상도 못 한 장소와 연결됐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에 2층 저택이 있는 걸 보며 뭐에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