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모던 클래식의 목조 주택은 이곳에 살고 있을 호수와 어울리지 않게 그레이와 블랙으로 꾸며져 있었다.
“차장님……?”
전자식 도어가 아닌 구식 현관문은 손잡이를 돌리자 부드럽게 열렸다.
다운 톤이던 외부와 다르게 화이트와 골드로 깔끔하게 꾸며진 내부는 집이 아니라 고급 카페에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아이보리 톤 기역 형 소파와 앞에는 대리석 테이블이 놓여 있다.
넓은 창가 앞에 머그잔을 들고 있는 호수의 모습은 화보 잡지의 한 장면 같다.
‘사람 불러 놓고 왜 똥폼 잡는 거지.’
따사로운 햇볕을 쬐던 호수가 휘핑크림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드디어 시선을 돌렸다.
“어제 첫날밤을 잘 보냈냐?”
“네? 무슨……. 아, 아니. 미쳤어요?! 어린애랑 제가 뭘, 뭘 해요!”
“음? 난 그냥 코오 잘 잤냐고 물은 건데.”
“네? 아니, 잠은, 그, 잘 잤죠.”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빨개진 호은이 신발을 벗고 쿵쾅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호수의 장난 때문에 심장이 요란했다.
“개인 면담이라 해서 왔는데…….”
“면담 중이잖아. 팀 가이드 지침서 제대로 안 봤나 보네.”
“……뒷장 말씀하시는 건가요.”
“보긴 봤어?”
호수는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호은과 두 자리 정도 떨어진 곳에 앉았다.
“팀 가이드가 해야 하는 업무 중에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
“네? 뭐……. 팀 가이드면 외근직이니까 현장에서 에스퍼 케어…….”
“현장도 중요하지만 왜 같은 숙소를 쓰겠어.”
“네?”
어쩐지 불안해하는 호은에게 호수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오케이 모양을, 오른쪽은 검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을 다 접었다. 그리고 오른쪽 검지의 손가락이 왼손이 동그랗게 비어 있는 공간에 들어간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호은이 재빨리 손을 들어 호수의 손을 붙잡았다.
“너 정말 스물다섯 맞냐.”
“나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아니 반응이 웃겨서. 자 방금 건 장난이고 앞으로 팀 가이드로서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간단하게 알려 줄게. 너도 그동안 일하면서 궁금했던 점이 있으면 질문하도록 해.”
호은은 손을 내렸다. 또다시 이상한 손장난을 하는지 가자미 눈으로 호수를 흘겨보다 아닌 걸 알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 혹시라도 찐한 가이딩 하는 법이 궁금하면 내가 몇십 년간의 노하우를…….”
다시 손장난하려는 호수의 동작에 호은이 됐거든요! 소리를 지르며 손을 마구 때렸다. 호수는 알겠다며 손을 내리곤 다시 대화를 진행했다.
“형식적으로는 정직원 가이드가 되는 순간 내근직과 외근직에서 선택해야 하는 거 알고 있지?”
“네.”
“몸이 편하고 싶은 가이드는 내근직. 돈을 벌고 싶은 가이드는 외근직. 뭐 이런 느낌으로 선택하지.”
“저는 외근직이죠?”
“팀 가이드는 외근직으로 분류된다. 에스퍼 현장에 따라가야 하니까.”
여기까지는 호은이 알고 있는 사실과 별다른 거 없었다.
“내근직 가이드는 두 가지 업무로 나누는데 직접 가이딩과 방사 가이딩으로 구분되지. 직접 가이딩하는 가이드는 이능력자 협회에 마련된 치료 센터에 배치된다. 의무 공간에서 에스퍼에게 직접 가이딩을 하는 대신 현장을 나가지는 않아.”
“아…….”
“그리고 방사 가이딩을 선택한 가이드는 가이드 공단에서 일하며 방사 가이딩을 하지.”
“에스퍼가 없는 공간에서 방사 가이딩을 하는 게 의미가 있나요?”
“지난번에 도인호가 먹었던 가이딩 약 생각나지? 그걸 만든 게 가이드 공단이야. 실제 가이드의 방사 가이딩을 담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거든. 내근직 가이드는 사무실에 나와 평범하게 회사 업무를 하면 그만이다.”
호은은 핸드폰을 꺼내 호수가 말하는 것을 적기 시작했다.
“외근직 가이드는 직접, 방사 두 가지의 가이딩을 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도 직접 가이딩의 수위는 내근직들보다 더 위로 올라가지.”
“수위요?”
“신체 접촉이 많이 되면 될수록 가이딩 퍼센트가 많이 올라가니까. 보통 3명 이상의 에스퍼와 1명의 가이드로 팀 구성이 되는데 방사나 손잡기로 채워지겠어? 그러니 빠르게 채울 수 있는 수위로 가이딩 하는 거지.”
뒤에는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열이 오른 얼굴을 식히려는 듯 호은이 손부채질하자 열기가 조금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번 주는 홍보부 일로 도인호가 현장 임무를 나갈 일은 없어서 뭐 별다른 말을 안 하겠지만. 앞으로는 현장 나가기 전에 70%는 채워야 한다.”
“……제가 채울 수 있겠죠.”
병실에서 눈을 뜨고 살아 있는 도인호와 마주쳤을 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도인호의 폭주를 막고자 시작했던 일인데 내가 정말 막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불안감도 있었다.
‘만약 그때 증폭제를 먹지 않았더라면 내 힘만으로 폭주를 막을 수 있었을까?’
불안은 오늘 아침 조금밖에 안 올라간 가이딩으로 확신이 섰다.
“권호은. 너는 내가 그렇다고 말하면 믿을 거야? 날 신뢰해?”
호수의 질문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다. 호은은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호수의 이미지는 썩 좋지 않았다. 외관은 맛있는 사과일지 몰라도 속은 썩은 사과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호수는 가이드 우월주의고 에스퍼의 목숨을 하찮게 여겼다. 또 성격도 더럽고……. 나열하니 단점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데도.
“믿어야죠. 차장님이 아니었으면 도인호를 구하지 못했을 테니까.”
혼자였다면 그날 절대로 현장에 참가하지 못했을 거다. 모든 걸 알고 있었던 호수가 눈감아 줬기에 가능했다. 그 딱 한 번의 호의를 믿기로 했다. 호수는 도인호를 죽여야 하는 것도 맞지만 살리고도 싶었을 거라고. 호수의 생각이 어떻든 호은은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도인호 결정체 회수는 일단은 중단됐다. 그 이유는 도인호를 컨트롤할 수 있는 가이드가 생겼기 때문이다.”
호수의 말에 긴장으로 잔뜩 굳은 호은의 표정이 슬며시 풀어진다.
“좋아할 일이 아닌데.”
“그게 무슨……?”
“우리쪽에서 결정체 중단이지 도인호는 언제 어떻게든 폭주할 수 있어. 결정체를 노리는 녀석들도 많을 테고.”
“네?”
“내가 전에 이능력품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했지. 이능력자가 도구에 직접 이능력을 넣는 경우와 결정체로 만든 이능력품. 전자는 가이딩이 필요하지만, 후자는 가이딩이 필요하지 않다. 다들 후자의 이능력품을 갖고 싶어 하지만, 결정체 이식 성공 자체가 힘드니 대량 생산은 어렵지.”
“……그렇다면.”
“그래. 결정체 이능력품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인호는 얼마나 탐나는 존재겠어.”
“…….”
“물론 그 결정체를 이능력품 형태로 만드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라 일반인들은 쉽게 노리지 못하겠지만, 반대로 그 형태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들에겐 최고의 먹잇감이지.”
호수가 아랫입술을 느리게 핥으며 야살스럽게 웃었다.
“폭주 되기만을 노리는 하이에나에게 도인호를 지키려면 가이딩을 열심히 해 줘야겠지?”
호수는 순식간에 호은의 옆으로 다가왔다.
당황으로 물든 오른쪽 뺨을 손끝으로 건드리며 마치 춤추듯 얼굴 선을 시작으로 목과 쇄골을 스쳐 호은의 어깨를 잡아 소파로 밀쳤다.
호은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머리가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호수의 손이 셔츠 단추를 풀어 헤치고 맨살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이 한 박자 늦게 받아들였다.
“……!”
“뭐 때문에 도인호 폭주를 막을 수 있는지 없는지 걱정했는지 몰라도 더 많은 가이딩을 하고 싶다면 친절히 일대일 코칭해 줄 수 있는데 말이야.”
“잠, 잠깐, 비키세요!”
호은은 자기 위에 올라탄 호수를 보며 도망치려고 몸을 움직였다. 분명 덩치만 보면 자신이 좀 더 우세한 것 같은데 아무리 손으로 밀고 몸을 버둥거려도 호수가 움직이지 않는다.
맨 가슴을 더듬는 호수의 손목을 양손으로 간신히 막은 상태로 호은이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다.
“아니, 이건, 이건 좀. 제가 알아서 예, 코칭 안 해 주셔도, 대략 알, 알고 있으니까. 저기, 차장님?”
당장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상황에 호은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가까이서 본 분홍색 눈동자는 숨 막히게 신비로워서 호은은 자신이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조차 잊고 그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정 안되면 바닥으로 굴러떨어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호수는 호은의 오른쪽 볼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웃었다.
“동정이냐? 당황하기는.”
모든 게 다 장난이라는 걸 알자 호은은 서둘러 호수를 거칠게 밀어냈다. “성희롱으로 신고할 겁니다!” 그런 호은의 말에 호수는 코웃음을 쳤다.
“요즘 애들은 장난도 구분을 못 하네. 하여간 도인호 폭주 안 되게 잘 막아. 그 결정체를 그 녀석한테 뺏기면 열받거든.”
“그 녀석이 누군데요?”
“있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녀석.”
이상하게 흘러갈 뻔한 분위기는 호수가 바꾼 화제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호은은 호수를 째려보며 풀어진 단추를 다시 채웠다.
“할 말 있어?”
이제 슬슬 가 보라는 듯 눈치를 주는 호수에 호은은 사원증을 매만졌다. 호수와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던 말들은 산더미였지만 방금 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원증을 차고 있어 까먹지 않은 질문 한 가지 정도다.
“제 등급, 정말 D등급인가요?”
새로 받은 사원증에는 사진과 이름, 등급이 표시되어 있다. 호은의 등급은 D등급이었다. 폭주 직전인 도인호를 막았는데 어째서 호은은 D등급인지 사원증을 받은 순간부터 궁금했었다.
가이드의 등급이 높을수록 매칭되는 에스퍼 또한 높은 등급이라고 김세희에게 들었었다. 도인호는 S등급이니 그 옆에 어울리는 사람도 역시 S등급이여야 하는 게 아닐까. 실제로 도인호는 S등급인 호수에게 가이딩을 받았었다.
“어. 너 D등급이야.”
“…….”
“D등급인데 도인호를 가이딩할 수 있는 가이드.”
“네?”
“A등급의 가이드조차 도인호 가이딩하고 나면 그날 하루 움직이질 못해. 그래서 그동안 S등급인 내가 전담으로 맡았던 거고.”
호수는 지난번 측정했던 호은의 가이딩 결과를 떠올렸다. 1차 측정은 108% 그리고 2차로 도인호와의 파장은 90% 체력도 좋았으니 정석대로 계산한다면 S등급이 나올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호수는 거짓 결과를 보고했다.
‘권호은 가이드는 등급이 낮으나 도인호와의 파장은 공단 내 그 누구보다 높습니다. 두 사람을 잘만 이용하면 S급의 에스퍼와 그걸 다룰 수 있는 가이드가 한 팀이 된 거나 마찬가집니다. 물론 권호은 가이드가 D등급이라 폭주를 언제까지 막을지는 미지수지만 조금만 더 지켜봅시다.’
입에 침 한번 바르지 않고 호수는 징계 회의에서 거짓말을 했다.
회의에서는 반정부와의 대치를 생각했을 때 도인호만큼의 강한 에스퍼가 없으니 호수의 의견을 따라갔다. 파트너 가이드가 별 볼 일 없는 녀석이니 언제든 도인호의 결정체를 회수할 수 있을 거라는 숨겨 놓은 메시지를 사람들이 눈치챈 거나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폭주가 일어나지 않게끔 두 사람의 가이딩 안정화에 힘쓸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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