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79화 (479/508)

479. 뒈질 각오는 하신 거죠?

“개, 개소리라니…….”

한껏 고무적인 감정에 도취되어 있던 냉이겸이 뺨을 파르르 떨면서 검파를 움켜쥐었다.

남궁천이 세상 한심한 시선으로 냉이겸을 곁눈질했다.

“그런 빈약한 논리로 날 끌고 가려고 하다니. 꿈이 야무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일단 제가 두 사람을 따라갈 이유는 하나도 없군요.”

“그런…….”

냉이겸과 빙설의 표정이 실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확실히 마음에 걸리긴 한다.

‘빙궁주가 나를……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내 아들을 원수 취급했단 말인데…….’

자신이 아는 빙궁주, 빙하운은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전생에 만났던 빙하운은 무뚝뚝하긴 해도 나름의 호방함과 의기가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 자신이 빙궁의 무공을 손봐준 후로는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최소한 진천랑의 아들을 이런 식으로 건드릴 자는 아니었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사람이 어찌 변했을지 알 수 없다.

하나 남궁천은 사람이란 결국 변하지 않는 존재라고 믿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 자들은 대개 처음부터 그런 이면을 숨기고 살아온 자들이다.

그러다가 조금씩 본성이 드러난 것을 두고 사람들은 변했다고 손가락질하는 것이다.

하나 자신이 아는 빙하운은 북극의 얼음과도 같은 자.

쉽게 변할 자도 아니고, 속내가 다른 열망으로 가득 찼던 자도 아니다.

‘확실히 뭔가 이상하군. 그 빙하운이 아프다는 것도 그렇고.’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걸까?

자신이 마지막으로 봤던 빙하운은 늘 기운이 넘치고 의욕이 충만한 상태였는데.

그땐 자신도 역시 젊을 때였지만.

새삼 친구처럼 지내던 날들이 아득하게 떠오른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픈 빙궁주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하긴. 빙하운도 예전 같진 않겠지.’

딸이 저렇게 크지 않았나?

갓난아기 때부터 또렷한 이목구비에 커다란 눈망울 때문에 꽤나 미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했었다.

당시 빙하운은 빙설을 품에서 잠시도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수련을 할 때만 제외하면 늘 딸을 품에 안고 있을 정도였다.

“내 딸을 좀 보게. 이렇게 눈이 크다니.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코도 오뚝하지 않나? 입술 앙증맞은 것 좀 보게. 어디 하나 빼놓을 구석이 없어.”

“어디 하나 빼놓으면 병신이 되니까.”

“음? 하하하! 그 말도 옳군.”

남궁천의 짓궂은 대답에도 빙하운은 그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그 얼음 조각 같은 빙하운이 딸을 품에 안고만 있으면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인간이었다.

“설아, 우리 딸 설아. 언제나 변치 말고 지금처럼 아름답게 커다오. 북풍한설처럼 변함없이 내 곁에 머물러 다오. 이 아비도 북극의 빙하처럼 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테니.”

“세상 이렇게 멋없는 속삭임이라니.”

당시 남궁천은 북해빙궁 식의 표현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마 딸에게 북풍한설처럼 크라는 말을 하는 아버지는 이 세상에 빙하운 말고는 없으리라.

어쨌거나 그런 빙설이 눈앞에 나타나니 감회가 새롭긴 하다.

별로 북풍한설 느낌은 아니지만.

‘흐음. 한번 가봐?’

논리가 빈약한 저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측은지심이 생겨 버린달까?

그리고 오랜만에 북해빙궁의 싸늘한 밤바람이 그립기도 하다.

겨울을 지난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찬바람이 그립다니.

‘어쩔 수 없이 험난한 인생을 살아야 할 팔자인가?’

게다가 앞뒤가 맞지도 않는 이들의 말에서 구체적인 사연을 알아보고 싶다는 호기심도 든다.

남궁천이 자조적인 웃음을 피식 흘리고는 냉이겸을 보았다.

“뭐, 억지 논리에 마음이 동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만, 마지막 이유는 조금 그럴싸하군요.”

“호오? 마지막 말이라면?”

“환경을 바꿔보라는 거요.”

“그렇지! 바로 그걸세! 그게 사실은 핵심이었네!”

“확실히 환경을 한번 바꿔볼 때가 되긴 한 것 같네요. 모처럼 옛 추억도 되새겨 보고. 앞만 보고 달렸으니, 이젠 뒤도 한 번 돌아보고 싶군요.”

“으음. 추억……?”

“그런 게 있어요.”

그러자 빙설이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그럼 정말로 우리의 포로가 되어주시는 건가요?”

확실히 북해빙궁의 화법은 좀처럼 적응이 안 된다.

누가 자칫 잘못 오해하면 청혼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남궁천이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대신 맹에 보고는 해야 할 거요. 그런 만큼 맹에는 포로니 뭐니 하는 소리는 삼가시고. 어디까지나 빙궁의 초청으로 가는 걸로 합시다.”

“오호, 알겠네! 어차피 포승줄이야 빙궁에 도착해서 묶어도 되는 것이니까.”

“그게…… 그리 중요해요?”

“커흠, 어쨌거나 우리의 공식적인 임무는 자네를 생포해서 끌고 오는 것이었으니 말일세. 미안하이.”

“아무튼 알겠습니다. 대신 맹주님께는 잘 둘러대시길.”

그래야만 맹주인 남궁검이 보내줄 것이다.

냉이겸이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물론일세! 우리만 믿으시게! 나와 설이가 빙궁의 사절단으로 완벽한 연기를 펼쳐 보이겠네!”

흠, 괜찮은 거겠지?

* * *

무림맹은 어수선한 와중에도 북해빙궁의 사절단을 위해 조촐한 연회식을 열었다.

덕분에 재정비 문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맹원들도 한숨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맹주 남궁검은 옆자리에 앉은 냉이겸에게 술을 따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북해빙궁에서 이렇게 축하해 주니 감사할 따름이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별말씀을. 비록 본 궁이 새외 지역이라고는 하나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귀 맹과 본 궁은 긴밀한 사이였지 않소이까? 신임 맹주께서 추대되었는데, 어찌 본 궁이 뒷짐 지고 구경만 할 수 있겠소이까? 당연히 축하를 드리고 이렇게 인사를 드려야 할 일이지요.”

제법 매끄러운 대답에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빙설에게 시선을 던졌다.

“빙궁주의 따님이시라고.”

“…….”

“……?”

웬일인지 빙설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입을 꾹 다물고만 있자, 남궁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앉은 냉이겸이 빙설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런! 완전히 얼어붙었잖아! 빙궁에서 온 걸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정신 차려라, 설아!’

결국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빙설이 화들짝 놀라면서 대꾸했다.

“예? 예? 뭐라고 하셨죠?”

“허허허! 이 아이가 가끔 이렇게 얼이 빠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강호 초출이다 보니 귀 맹의 규모에 놀란 모양이오.”

냉이겸이 서둘러 변명해 주자 남궁검이 부드럽게 웃었다.

“이해하오.”

“아…… 죄, 죄송합니다. 북해빙궁에서 어떠한 임무도 맡지 않은 빙설이라고 합니다.”

“하하. 어떠한 임무도 맡지 않을 만큼 귀한 분인가 보오.”

남궁검이 농담을 던지자 옆에 앉은 냉이겸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그나저나 이대로면 정말 무슨 사달이라도 날 것만 같다.

빙설이 완전히 얼어붙었다.

하긴. 남궁검의 기도를 정면에서 마주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되리라.

일부러 기도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있다.

게다가 저 날카로운 눈빛은 어지간히 얼음 심장을 지닌 자들이라도 등골이 오싹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어쩌면 강호 초출인 빙설의 반응이 당연한 것일지도.

“빙궁주는 무탈하시오?”

“…….”

“빙 소저?”

“허허! 이 아이가 여전히 넋이 나간 모양이오! 맹주, 내게 물어보시오. 뭐든 대답을 해드리…….”

“말씀은 감사하나, 나는 빙 소저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소.”

남궁검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나 그 웃음의 이면에는 분명 모종의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반역이 일어난 직후가 아니던가?

갑자기 북해빙궁에서 예고도 없이 찾아와 사절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일단은 경계를 하고 보는 게 당연하리라.

‘끄응. 정신 좀 차려라, 설아!’

이번엔 냉이겸이 손가락 끝에 공력까지 실어서 옆구리를 쿡 찔렀다.

“히익!”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른 빙설이 반사적으로 말을 쏟아냈다.

“제 이름은 빙설입니다. 앞으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아, 거꾸로 읽으면 설빙. 저는 절대로 어떠한 임무도 받지 않았으며, 결코 남궁 단주를 납치하거나 생포해서 북해빙궁으로 끌고 갈 생각이 없음을 밝혀 드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안심하시고 연회를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이상 설빙…… 아니, 빙설이었습니다.”

“…….”

“…….”

장내가 일순 침묵에 잠겨 들었다. 연회를 즐기던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빙설에게 향했다.

냉이겸이 시름 섞인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제길, 망했구나.

괜히 남궁천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남궁천도 이제는 거의 체념 단계에 있는지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다.

잠시의 침묵 끝에 남궁검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러자 어느 정도 분위기가 반전된 것인지 다른 무인들도 툴툴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을 거둔 남궁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렀다.

“빙 소저는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구려. 빙궁의 무인들은 농담도 썰렁하다고 하던데, 다 옛말이구려.”

“…….”

다시 시간 정지 상태가 되어버린 빙설.

‘그래, 차라리 그게 낫다.’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쉰 냉이겸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좀 뜬금없는 아이지요. 허허.”

“그러고 보니 우리 적랑단주와 비무를 했다던데.”

“……!”

“손을 섞어보니 어떠셨소?”

“아…… 그것이…… 강호신룡의 무공이 그리도 출중하다는 소리를 들어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을 뿐이오.”

“맞아요! 절대로 납치하거나, 죽이거나, 생포할 목적은 아니었어요!”

제발, 그 입을 좀 다물어라. 설아.

냉이겸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부르르 떨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역시 명불허전이었소. 손자를 저리 훌륭하게 키우신 비결이 뭔지 궁금하더군요.”

“후후. 내가 한 게 뭐가 있겠소? 그저 혼자 알아서 잘 커준 것이지. 그보다 냉 대협의 무공이 상당하다고 들었소. 남궁 단주의 말에 따르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허허, 과찬이외다.”

“겸양도 지나치면 실례가 되는 법 아니겠소이까? 내 직접 보진 않았지만, 남궁 단주의 말을 들었을 땐 가히 냉 대협이 빙신(氷神)이라 불릴 만하오.”

“허허, 내가 빙신이라니요. 진짜 빙신이 들으면 기분 나쁘겠소.”

“아니오, 내 보기엔 냉 대협이 진짜 빙신이오.”

“허허허.”

“빙신을 이렇게 만나 영광이외다.”

“거, 계속 빙신, 빙신 하시니까 진짜 빙신이 된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하하하! 빙신을 빙신이라 하지, 그럼 뭐라 하겠소.”

“허허허.”

왜일까?

조금씩 기분이 나빠지는 이 느낌은.

냉이겸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데, 남궁검이 목소리를 높였다.

“비 대주.”

“예, 맹주님.”

순간 비량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앞으로 다가와 포권했다.

“여기 빙신에게 머물 곳을 안내해주어라.”

“어디로 모실까요?”

“그렇군. 전각들이 무너져 마땅히 모실 곳이 없군. 그럼 역시 뇌옥이 적당하겠네.”

“명 받들겠습니다!”

비량의 대답과 동시에 천응대원들이 비처럼 떨어지더니 냉이겸과 빙설을 에워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냉이겸이 남궁검을 휙 돌아보았다.

“맹주! 이게 무슨……!”

“두 사람은 내가 우습소?”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