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478화 (478/508)

478. 뒈질 각오는 하신 거죠?

무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남궁천과 냉이겸, 그리고 빙설이 나란히 앉았다.

그들 손에는 독한 화주가 각 한 병씩 들려 있었다.

냉이겸이 술병을 나발 불며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감탄을 터뜨렸다.

“캬아, 좋군. 좋아. 역시 술은 중원의 술이 감칠맛이 난다니까.”

“독한 걸로 따지자면 빙궁의 술이 더할 텐데요.”

남궁천의 말에 냉이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독하기야 하지. 사시사철 칼바람이 부는 곳이 아닌가? 그러니 술이라도 독해야 견디지. 하나 감칠맛이 없단 말이야. 그에 반해 중원의 술은…….”

말을 하다 말고 냉이겸이 다시 화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가 마시는 술은 신룡객잔에서 특별히 담근 것으로, 무한에서도 꽤 독한 화주로 알려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냉이겸은 마치 술을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크으으! 역시 이 감칠맛이 끝내준다니까. 빙궁으로 갈 때 몇 병 사 가야겠네. 궁주님께 선물로 드리면 아주 좋아하실 것 같군.”

그러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빙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뭐 해요? 어차피 가는 길에 다 장로님 배 속으로 사라질 텐데요.”

“허허, 아무리 그래도 내가 궁주님께 드릴 술에 손을 대겠느냐?”

“네.”

“끄응.”

차마 부정을 하지 못한 냉이겸이 술병을 나발 불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대단한 비무였네. 모처럼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둘러 본 것 같군. 젊은 나이에 엄청나군.”

“영감님도 대단했어요.”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술병을 나발 불었다.

술이 달다.

한바탕 땀을 빼고 난 후에 마시는 술이라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일 듯 검을 휘두르다가 이젠 나란히 앉아서 잡담과 함께 술이라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남궁천이 중얼거리자 냉이겸이 파안대소를 하며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크하하하! 원래 인생이 이런 걸세! 서로 죽일 듯이 칼을 갈다가도 어느 순간 술친구가 되어 있는 것. 그것이 강호요, 그것이 인생이로다. 한잔 술에 달빛을 안주 삼아 벗과 함께 마시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으하하하!”

“낭만이라.”

남궁천의 입가에 쓴웃음이 매달렸다.

그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빙설은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참 신기한 남자야.’

분명 이제 막 약관이 지난 청년이다.

자신보다 열 살은 어리다.

그런데 남궁천을 둘러싼 묘한 분위기는 마치 까마득한 어른을 대하는 것 같다.

저 우수에 찬 듯한 눈빛, 이따금씩 짓는 씁쓸한 미소, 어딘지 피곤해 보이는 표정과 말투, 거칠게 술병을 들이켜는 모습까지.

강호에서 구를 대로 구른 고수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도대체 저 남자의 무엇이…….’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 것이냐?”

순간 시야를 가리면서 냉이겸의 늙수레한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화들짝 놀란 빙설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손을 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제가 뭐가 궁금하다고! 전 아무 생각도 안 했다고요.”

“그으래? 아까부터 촉촉한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 같던데.”

“아, 아니에요! 전 절대로 우수에 찬 눈빛과 인생의 고달픔을 느낄 대로 느낀 씁쓸한 미소를 본 적이 없다고요. 거칠게 술병을 들이켜는 모습에서 가슴이 두근거린 적도 일절 없고요. 암.”

빙설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하자, 오히려 짓궂게 질문을 던졌던 냉이겸이 더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어음…… 그러냐?”

“그럼요.”

“……알겠다.”

냉이겸이 한숨을 내쉬고는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이 아이가 좀 이렇네.”

“그렇군요.”

남궁천이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빙설이라.

갓난아기 때부터 유난히 귀여운 얼굴이었던 것만은 기억난다. 한데 저리 절세 미녀로 자랐으니…….

“빙궁주가 걱정이 많겠군요.”

“으음. 그렇지.”

“……그럴까요?”

남궁천이 무심결에 뱉은 말에 두 사람은 뜻밖에도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빙설이 갑자기 술병을 나발 불더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아버지가 걱정하실까요?”

그러자 냉이겸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의식적으로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당연한 걸 묻는구나. 세상에 딸 걱정하지 않는 아비가 어디에 있더냐?”

“있을 지도 모르죠. 어딘가에.”

빙설의 묘한 반응에 냉이겸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자네의 고민 이야기를 한 번 해보세.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혹시 아는가? 이 늙은이의 경험으로 얻은 지혜가 더해지면 자네의 고뇌가 풀릴지도? 더해서 깨달음까지 얻을지도 모르고.”

“됐고. 하던 얘기나 마저 합시다. 목숨을 구걸하면서 꺼낼 제안이 뭐예요?”

“에헤이, 사람 참. 거, 말을 또 그렇게 하나? 자네가 분명 대단한 비무를 펼치긴 했지만, 승부는 나지 않았네. 즉, 내가 목숨을 구걸한 건 아니란 뜻이야.”

“어쨌거나 제안이나 들어보죠.”

“그걸 말하기 전에 자네 고민부터 좀 들어보세. 어쩌면 우리 제안이 자네 고민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야.”

“흐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죠.”

“그래,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얘기나 해보세.”

그러잖아도 남궁천은 누구든 만나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볼 생각이긴 했다.

다만 그 상대를 비량이나 손우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예 낯선 상대에게 말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간의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모든 이야기를 진중한 표정으로 전해 들은 냉이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해서 자네는 모든 직책을 내려두고 황산으로 돌아가려는 것인가?”

“그렇소.”

“이후에는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사는 것이고?”

“그게 내 꿈이었으니까.”

“젊은이의 꿈이 너무 소박한 것 아닌가?”

‘영감보다는 젊겠지만, 그래도 내 나이가 적진 않지.’

남궁천이 속내를 굳이 꺼내지 않고 쓴웃음만 지었다.

그러자 빙설이 불쑥 나서며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안 된다고?”

“그래요. 절대 안 돼요.”

빙설이 단호하게 대꾸하자, 남궁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안 되는 거요?”

“그야…… 당신은 우리와 함께 가야 하니까요.”

“당신들과 함께? 어딜?”

“당연히 빙궁이죠.”

남궁천이 이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냉이겸을 돌아보았다.

냉이겸이 쓴웃음을 지으며 자초지종을 조곤조곤 말했다.

“실은 우리에게 사정이 있다네.”

“설규를 죽인 원수를 갚는 것? 결국 나를 빙궁으로 끌고 가겠다는 거군.”

“표면적인 이유는 그러하네.”

“표면적인 이유가 그렇다면 속내는 따로 있단 거요?”

남궁천의 말에 냉이겸과 빙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냉이겸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남궁천에게 말했다.

“우리가 자네에게 할 제안은 바로 이것일세.”

“……?”

“자네가 우리에게 사로잡혀서 끌려가 주게.”

남궁천이 여전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눈만 멀뚱멀뚱 떴다.

냉이겸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 임무는 자네를 생포해서 빙궁까지 끌고 가는 것일세. 하나 비무를 해보니 생포는 애초에 불가능할 것 같군.”

“그래서 작전 변경? 목숨 구걸도 모자라서 이젠 포로가 되어달라고 구걸하는 거요?”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그렇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알아듣기 쉽게 얘기합시다.”

“그러니까 그게…….”

냉이겸도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한 표정으로 헤매는데, 다시 빙설이 불쑥 나섰다.

“우리 좀 도와주세요!”

“그러니까 뭘 어떻게……?”

“아버지 병세가 깊어요!”

“아버지라면 궁주가?”

“그렇네. 궁주님 이야기라네.”

“아니, 잠깐. 빙궁의 원수였다가 이번엔 궁주가 아프다고 같이 가달라니. 뭔 이야기가 이래요?”

“얘기를 하자면 좀 복잡하네. 우선 요지만 전달하자면,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내 생각에 궁주님의 병세에 대해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일세.”

“사람이 아프면 의원을 찾아야지, 어째서 원수인 내게…….”

“자네의 초견파공안 때문일세.”

“……!”

“궁주님의 병세를 가장 잘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기의 흐름을 제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일세. 그리고 그건 바로…….”

“나라는 거군요.”

냉이겸과 빙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이 대충 이해했다는 듯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설규를 죽인 원수라고 비무를 신청한 건 또 뭐예요?”

“그건 공식적인 임무일세.”

“누가 내린 임무요?”

“궁주님일세.”

“와아, 복잡하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빙궁주가 날 생포해 오라는 임무를 내렸고.”

“그렇지. 그건 공식적인 우리의 임무일세.”

“한데 두 사람은 날 찾아와서 초견파공안을 시험해 본 다음 그 궁주를 치료해 달라는 거고?”

“그렇네. 그게 바로 비공식적인 임무일세.”

“그 비공식적인 임무는 누가 지시한 겁니까?”

“내가요.”

빙설이 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해 보였다.

남궁천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물었다.

“날 죽이러 왔다는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이유가 뭐죠?”

“총 세 가지가 있네.”

냉이겸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 세 개를 쫙 펼쳤다.

“세 가지씩이나.”

“그렇네. 우선 우린 결국 자네를 죽이거나 생포하지 않았네. 공식적인 임무보다는 비공식적인 임무가 더 중요하니까.”

“말은 바로 합시다. 죽이지 않은 게 아니라, 죽이지 못한 거지.”

“어쨌거나 끝까지 싸우진 않았지. 아무리 자네가 뛰어나더라도 나 역시 최선을 다한다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을 걸세.”

이번에는 남궁천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바였기에 입을 다물었다.

냉이겸은 어딘지 어수룩해 보이는 노인이었지만, 확실히 그 무위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만약 그가 중원인이었다면 무림칠성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 치고. 두 번째는?”

“자네가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어서 궁주의 병세가 낫게 된다면, 궁주님은 더 이상 자네를 원수로 여기지 않을 걸세. 그러니 은원관계가 해결되는 셈이지.”

“굉장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일단 세 번째까지만 들어보죠.”

“세 번째는 바로 자네 고민을 해결할 수도 있다는 거지.”

“그건 또 뭔 소립니까?”

“자네는 지금 지친 상태일세. 앞만 보고 달려왔다가 그 정점에 이르러서 방황하는 중이지. 그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아는가?”

“뭐요?”

“낯선 환경에 스스로를 던지는 걸세. 그래서 여행을 하다 보면 영감을 얻고 깨달음도 얻는 걸세. 익숙한 장소를 떠나서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경험을 겪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기도 하는 법이지.”

“호오, 과연!”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냉이겸이 눈빛을 반짝이고는 벌떡 일어나며 손을 뻗었다.

“자, 어떤가? 젊은이여! 우리의 포로가 되어 함께 빙궁으로 가지 않겠는가?”

“확실히 그 세 가지 이유를 들어보니…….”

“그래, 자네로서는 솔깃한…….”

“하나같이 개소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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