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 뒈질 각오는 하신 거죠?
장내 분위기가 순식간에 살얼음판이 되었다.
휘이이이잉!
냉이겸의 전신에서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기운이 휘몰아쳤다.
비량을 비롯한 천응대원들이 일제히 기도를 끌어올리며 맞섰다.
연회장의 무인들 모두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갑자기 벌어진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몇몇 이들은 남궁검의 눈치를 살피면서 돌처럼 굳은 자세로 호흡마저 멈췄다.
남궁검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말했다.
“적어도 날 속이려면 최소한의 성의는 있었어야지.”
“최소한의 성의라니…….”
그 정도면 이 아이로서는 궁극의 연기를 펼친 셈인데.
물론 뒤이어진 생각은 속으로 삼켰다.
남궁검은 두 사람을 싸늘하게 바라보면서 술잔을 들었다.
“들어나 보지. 그대들이 적랑단주를 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냉이겸이 남몰래 한숨 짓는데, 옆에서 빙설이 경악한 표정으로 전음을 흘렸다.
[맙소사! 맹주가 어떻게 우리 속내를 다 알아챈 거죠?]
[너는 어째서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설마 장로님은 들킬 거라고 예상하신 거예요?]
[너만 빼고 이 자리 모두가 알았을 것이다.]
[왜요? 우리 연기는 완벽했잖아요! 아……!]
[그래, 이제야 알겠느냐?]
[네, 지금 생각해 보니 확실히 장로님의 말투가 조금 어색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들켰나 봐요.]
[…….]
진짜 확 때려?
냉이겸이 하마터면 손이 올라갈 뻔한 걸 꾹 참으면서 맹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맹주, 아무래도 오해가 있나 본데 우린…….”
“끝까지 발뺌할 생각인가!”
순간 남궁검이 노호성을 터뜨리더니 술잔에 든 술을 휙 뿌렸다. 그러자 술이 마치 탄지공처럼 날아갔다.
파하앗!
거의 동시에 냉이겸의 전신에서 한기가 폭사되자, 날아들던 술이 그대로 얼음알갱이가 되어서 허공에 멈추고는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야말로 신묘한 경지가 아닐 수 없었다.
“맹주, 기어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야겠소?”
지금까지와는 달리 냉이겸의 표정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남궁검도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마주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건 그쪽의 의지에 달린 문제. 순순히 따르겠다면 분위기는 더 이상 험악해지지 않을 거요. 하나 기어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겠다면, 나 역시 뒷짐 지고만 있지 않을 거외다.”
“…….”
냉이겸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남궁천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지금의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하긴.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남궁천의 책임은 없다. 오히려 남궁천은 기회를 준 셈.
‘아니, 오히려 이걸 노린 건가?’
그럴 것 같진 않지만, 남궁천의 태도가 워낙 태연하니 진의를 알기가 어렵다.
그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와중에도 현장의 긴장감은 점차 고조되고 있었다.
싸우느냐, 순순히 응했다가 기회를 보느냐?
만약 싸운다면 가능성은?
맹주는 무림칠성의 경지에 올라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혹시라도 거기에 남궁천까지 가세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는 있을까?
반대로 순순히 응한다면?
뇌옥으로 끌려가 버리면 탈옥을 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 기회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리라.
하지만 남궁천이 진심으로 빙궁에 가고자 한다면, 어떻게든 기회가 생길수도 있다.
결국 남궁천을 믿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문제다.
잠시의 고민 끝에 냉이겸이 남궁검을 빤히 보며 말했다.
“맹주, 이대로 순순히 응하기엔 억울한 점이 많소. 정식으로 비무를 청하고 싶소만.”
“비무를 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일단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하지 않겠소?”
냉이겸의 차분한 대꾸에 남궁검이 싸늘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디 한 번 빙궁의 무예가 어떤지 견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럼 한 수 배우겠소.”
냉이겸이 내심 안도하며 연회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가 굳이 비무를 청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은 시간을 끌면서 적당히 기회를 엿보려는 의도.
또 하나는 맹주의 무공과 성격을 파악해보려는 의도.
강호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상대를 가장 잘 알고 싶으면 손을 섞어봐야 한다는.
상대가 익힌 무공과 술수, 경지 등을 파악하다 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됨됨이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법이다.
물론, 비무를 신청한 데에는 순수한 호기심도 없지 않았다.
과연 남궁세가주이자 무림맹주인 남궁검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대단하면 남궁천이라는 괴물을 키워낼 수 있는지.
결국 어느 정도의 전략과 호기심이 섞여서 만들어낸 자리라고 볼 수 있었다.
남궁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근 깨달음을 얻어 비약적인 성취를 이룬 그였다. 때문에 새외지역에서 가장 막강한 빙궁의 무공이 어떤지 실제로 견식해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연회장 복판에 마주 서자 그러잖아도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는 완전히 꽁꽁 얼어붙었다.
휘이이이잉!
차디찬 바람이 연회장 복판에서 사방으로 불어나갔다.
두 사람의 기운이 격돌하자 모종의 기파가 형성되면서 다시금 바람이 일어났다.
다르르르르……!
탁자에 둔 다기와 술잔들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스르르릉!
남궁검이 벽라검을 뽑아 들자, 냉이겸 역시 은빛 검을 뽑아 들고는 가만히 마주 보았다.
맹주와 빙궁 장로의 대결.
이처럼 흥미로운 싸움을 언제 또 구경할 수 있겠나?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격돌을 기대했다.
자박…… 자박…….
원을 그리듯 걸음을 옮기는 듯 두 사람.
“비무에 응해줘서 고맙소.”
“감사할 일인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소.”
“비록 패한다고 하더라도 영광이오.”
“…….”
남궁검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확실히 냉이겸에게서는 경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빙설과 대화를 나눌 때는 다소 가벼운 구석이 있지만, 이렇듯 진중한 상황에서는 신중함이 느껴진다.
하나 남궁천을 노린 자.
남궁검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장로의 비무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오?”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 아닐까 싶소만.”
“물론 그것도 없지 않지. 하나 더 큰 이유가 있소.”
“그게 무엇이오?”
“누구든 나를 건드리는 건 백 번 천 번도 용서할 수 있소. 하나…….”
남궁검이 시선을 돌려 남궁천을 슬쩍 보았다.
“저 아이를 건드리는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소. 그게 염라라고 해도. 아니, 그렇다면 더욱 용서할 수 없을 거요.”
“…….”
냉이겸이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남궁천과 남궁검을 번갈아 보았다.
저 두 사람의 애정이 이 정도로 깊었던가?
하긴 강호신룡이 탄생한 후부터 남궁세가의 명성이 수직 상승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그러니 남궁검으로서는 남궁천이 예쁘게 보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나 손자를 보는 남궁검의 시선에는 그 이상의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한편 남궁천은 이마를 짚으며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이젠 잘도 하시는군.’
왠지 팔뚝을 타고 닭살이 돋는 것 같다.
어쨌거나 남궁검의 말에 냉이겸도 질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내가 왜 비무를 신청했는지 아시오?”
“뭐요?”
“나 역시 나를 건드리는 자는 백 번, 천 번도 용서하오. 하나…….”
그의 시선이 빙설에게 향했다.
“내 손녀 같은 저 아이를 건드리면 염라를 잡는 아귀라도 용서할 수 없소.”
“……그렇군.”
남궁검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 속에서 짧은 대화가 오갔지만 이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았다.
술잔만 기울이면서는 그 진의를 확신할 수 없는 말들.
하지만 이렇듯 칼을 맞댄 상황에서는 진의가 보이는 말들.
남궁검은 냉이겸을 다시 보게 됐다. 어쩌면 이들에게 악의는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것들이다.
이렇듯 날카로운 검신을 들이민 상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본능 같은.
남궁검이 입을 열었다.
“짧게 끝냅시다.”
“좋소.”
냉이겸 역시 짤막하게 대꾸했다.
절대 고수의 영역에서 상대를 알기 위해서는 단 일검만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지금 두 사람이 딱 그런 상황.
우우우우우웅……!
키이이이이잉……!
두 개의 검신이 서로 몸을 떨면서 공명한다.
마치 서로를 향해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맹수 같다.
다르르르르르……!
이젠 주변 전각의 기왓장마저 기파를 이기지 못해 떠는 소리를 내지른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무인들도 저마다 어금니를 꽉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크읏!”
“헙!”
두 사람이 내뿜는 기도가 너무나 막강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지경.
어디 그뿐인가?
아까부터 한기를 풀풀 휘날리는 냉이겸 때문에 주변으로 서리가 내려앉을 만큼 기온이 내려갔다.
두 사람은 이미 수십 번의 합을 머릿속으로 겨루었다.
하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
결국 수 싸움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 정도 경지에서는 그때그때 일어나는 변수에 얼마나 잘 대응하느냐에 달렸다.
한마디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서로가 인정한 순간!
파밧!
팟!
마침내 남궁검과 냉이겸이 격돌했다.
쉬이이이잇!
수많은 수는 소용이 없다. 얕은 수작으로 승부를 낼 만한 상대가 아니다.
결국 정공법이다.
파쩌어어어어엉!
파파파파파파파!
두 자루의 검신이 부딪친 순간 기파와 함께 사방으로 결빙이 터져간다.
파쩌어어엉! 파차아앙! 파쩌어엉!
마치 거대한 빙벽과 번개가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며 터져가는 것만 같다.
눈보라처럼 하얗게 번져가는 안개 때문에 잘 볼 수도 없는 상황.
하지만 수많은 무인이 그 과정을 조금이라도 더 지켜보기 위해 눈을 부릅떴다.
절대고수의 비무를 견식할 수 있는 이 역사적인 기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한편 냉이겸은 남궁검과 검을 섞으면서 내심 찬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이것이 제왕의 검이라 불리는 남궁세가의 검법이로구나! 하나 어딘지 남궁천이 쓰는 검법과는 또 다르군.’
남궁천은 기본적으로 마기를 운용했다.
나중에야 자초지종을 들어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도 남궁검의 검법과는 또 달랐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남궁검은 영원히 싸워도 결판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상대다.
반면 남궁천은?
세월이 조금 흐르면 자신이 감히 감당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될 것 같다.
‘잘 키운 게 아니라, 알아서 잘 커준 것이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그렇게 격렬한 비무를 이어가던 두 사람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물러나며 검을 거두었다.
타닷!
척!
말없이 검을 갈무리한 두 사람이 서로에게 포권을 했다.
“과연 훌륭한 검법이었소. 맹주께 한 수 배웠소이다.”
“과한 겸손이오. 나야말로 한빙검에게 한 수 배운 계기가 되었소.”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비무가 치러진 이후로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누그러지다니.
겨울이 가고 봄이 온 것처럼 훈풍마저 분다.
이것이 절대자들의 대화 방식인가?
냉이겸이 빙설을 한번 돌아보고는 말했다.
“나는 뇌옥에 가두어도 좋으나, 저 아이만큼은 지객당에 머물게 해주시면 고맙겠소.”
“어쨌거나 본 맹이 빙궁과 척을 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 바이니, 사실 여부가 확인될 때까지 두 분 모두 지객당에 머물게 해드리겠소. 다만 철저한 감시는 계속될 것이니 불편을 감수해주시길 바라오.”
“물론이외다.”
일이 묘하게 풀리는 것을 본 빙설이 밝은 표정이 되어서 달려왔다.
“장로님, 괜찮으세요?”
“괜찮다. 너는 어떠냐?”
“조금 놀란 것뿐. 괜찮아요. 역시 우리가 남궁천을 납치하거나, 죽이거나, 생포하려던 게 아니라는 걸 믿어준 거겠죠?”
“그 입 다물어라.”
냉이겸이 한숨을 내쉬는 사이, 남궁검은 남궁천을 돌아보았다.
“천아, 나 좀 보자.”
“예, 맹주님.”
남궁천은 쉽지 않은 대화가 될 것 같다는 것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