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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공검제-477화 (477/508)

477. 뒈질 각오는 하신 거죠?

후우우우웅!

한차례 서늘한 바람이 공터를 휩쓸고 지나갔다.

남궁천이 목을 우두둑 꺾고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활짝 피었던 연산홍이 이제는 하나둘 꽃잎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제법 따뜻해진 날씨.

한데 남궁천이 서 있는 숲 주변은 어딘지 서늘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바로 맞은편에 서 있는 두 사람이 내뿜는 모종의 기운 때문이었다.

남궁천은 그중에서도 젊은 여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빙설이라.’

피식.

문득 향수에 젖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빙설은 괜히 기분이 찜찜했다.

‘방금 날 보고 웃은 거지? 어지간히 자신만만한가 보네.’

그녀는 내심 냉소를 지었다.

남궁천이 아직 강호 경험이 없으니 북해빙궁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리라.

물론 설규와 싸운 적이 있겠지만, 한빙검 냉이겸을 설규와 같은 수준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니까.

중원인들은 항상 서열을 가릴 때 새외지역의 무인들을 배제하는 습관이 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새외지역의 무인들은 중원의 권력 다툼에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으니까.

하나 북해빙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북해빙궁의 무인이 공식적으로 중원으로 행차하게 되면 무림맹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법.

그런데도 저렇게 여유를 부려?

‘이러나저러나 아직은 젊은 혈기만을 믿고 까부는 애송이라는 것일까?’

빙설이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남궁천이 잠깐 웃음을 흘린 것은 결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오랜 추억이 생각나서였다.

‘정말 오랜만이네. 당시엔 말도 못 하던 젖먹이였는데.’

사실 남궁천은 빙설을 본 적이 있었다.

전생에 남궁천이 북해빙궁으로 도피했을 때가 빙설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으니까.

당시 궁주는 빙설을 품에서 놓지 않을 정도였다.

어찌나 예뻐하던지.

피식.

다시 웃음이 나온다.

그러고 보니 궁주는 잘 지내려나?

당시에는 한창 젊은 나이에 궁주가 되어서 여러 가지로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초로의 사내가 되어 있을 터.

‘참 세월이 무상하군.’

빙설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문득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아들 생각도 난다.

자신이 지금 그 아들의 모습으로 살고 있으니, 이걸 복이라고 해야 하나? 벌이라고 해야 하나?

확실히 일단의 목적을 이루고 나니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 차라리 이럴 땐 한바탕 땀이라도 빼면 나을지도.

그런데…….

‘저 노인네를 상대로 땀이 흐르려나 모르겠네. 왠지 흐르던 땀도 얼어붙을 것 같군.’

남궁천의 시선이 다시 냉이겸에게 향했다.

왼손에 검집을 든 채로 꼿꼿하게 선 냉이겸은 전신에서 한기를 풀풀 풍겨내고 있었다.

이미 북해빙궁 무인이라는 사실을 들켰으니 애써 기운을 갈무리하거나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냉이겸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남궁천을 의식하다가 물었다.

“비무를 하기 전에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좋을 대로.”

“내 보기에 자네는 오늘 종일 고민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네. 혹 무엇이 자네 머릿속을 그리 복잡하게 만든 것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그게 왜 궁금하실까?”

“실은 약이 올라서 말이지.”

“……?”

“내가 저 아이에게 말했거든. 자네가 모종의 깨달음을 앞두고서 침사 단계에 들어섰다고. 한데 번번이 내 예측이 빗나가는 행동을 하니 약이 오르더군.”

“흐음.”

“뭐, 자네도 알다시피 이건 생사비무일세. 자네가 죽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가 비명횡사하기 전에 그 정도 사연은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호기심이 많은 영감이군.”

“자고로 나이가 들수록 호기심은 더 많아지는 법일세. 호기심은 아는 만큼 생기는 것이니까.”

“뭐, 말 못 할 건 없소. 그저 허무함이 밀려와서.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어느새 그 길 끄트머리까지 다다르니 생각이 많아졌거든.”

“그렇군. 그렇다면 날 만난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어째서요?”

“아직 자네 길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나? 노부와 손을 섞으면 또 다른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만약 영감이 내게 깨달음을 준다면. 그래서 이 찜찜한 허무감을 물리쳐 준다면, 그 대가로 살려는 드릴게.”

“허허허. 아주 자신만만하군. 노부를 너무 얕잡아 보면 큰코다칠 걸세. 자네가 무림칠성급의 무위를 지녔다고 해도 노부는 또 결이 다를 테니까.”

“그래서 언제까지 입으로 싸울 거요?”

“흐음. 하여튼 요즘은 낭만이 없단 말이지. 예전에는 비무하기 전에 술도 한잔 나누고, 밤새 웃고 떠들고 했는데.”

“결국 피 튀기며 죽자고 싸울 거면서 낭만은 얼어 죽을.”

“좋네. 그럼 바로 시작하지. 참고로 선공은 양보하지 않을 걸세.”

스르르르릉.

말을 마친 냉이겸이 푸른빛의 검신을 뽑아 들었다.

스스스슷.

검신에 새하얀 서리가 내려앉으면서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하얀 연기가 달빛 아래에서 풀풀 휘날린다.

남궁천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냉이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박하네. 한참 어린 후배를 대하면서 선공도 양보하지 않고.”

“자네를 보면 한참 어린 후배 같지가 않아서 말이네.”

“뭐, 칭찬으로 듣겠소. 그나저나 언제 봐도 빙백신공은 아름답군.”

남궁천이 벽라검을 뽑아 들었다.

우우우우웅.

남궁천의 손에 기운이 실리자 벽라검이 우는 소리를 내지른다.

냉이겸이 디딤발을 슬쩍 문지르면서 몸을 낮게 유지했다.

“아름다운가? 초견파공안으로 보는 빙백신공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긴 하군.”

“전신에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풀풀 피어오른다고 보면 될 거요.”

“호오, 멋있을 것 같군.”

“부정하진 않겠소.”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서서히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그에 따라 냉이겸도 조금씩 옆으로 걸었다.

고요함 속에서 치열한 수 싸움이 이어진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많은 합을 이루고 승패를 보았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수를 찾아야 한다.

이왕이면 싸움이 길어지지 않도록.

최소 오 합을 넘기지 않고 이길 방법이 떠오르면 곧바로 행동에 움직인다.

‘과연. 오래전에 지적했던 부분이 말끔히 고쳐졌구나.’

남궁천이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남궁천이 북해빙궁 무인들의 고질적인 습관에 대해서 지적한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북해빙궁에서 평생을 썩은 늙은이들이 자신의 조언을 새겨듣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젊은 궁주였던 빙하운은 남궁천의 지적이 일리 있다고 여기고 운공 방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결국 머지않아 북해빙궁은 진천랑의 조언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고 따로 비서를 수정할 정도였다.

이쯤 되니 남궁천은 북해빙궁의 무공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견제를 거두고는 편안한 자세로 섰다.

“선공을 양보하지 않겠다니, 내가 양보하도록 하겠소. 들어오시오.”

“괜찮은가?”

“물론이오.”

“그럼 사양하지 않겠네!”

타앗!

한 번쯤 거절할 만도 한데 냉이겸은 곧바로 바닥을 차며 남궁천을 향해 쇄도했다.

그가 이 비무를 얼마나 진심으로 대하는지 알 수 있었다.

냉이겸은 진짜 무인이다.

확실히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겉멋에 빠져든 자들과는 다르다.

쉬이이이잇!

냉이겸이 검신을 내질러 왔다.

새하얀 달빛을 타고 은빛 강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하다.

‘확실히 아름답단 말이야.’

특히 빙공은 밤에 볼수록 더 아름답다.

범인이라면 저 기운에 스치기만 해도 온몸이 얼어붙으리라.

남궁천이 보법을 밟으면서 일격을 가볍게 피했다.

쒸아아아앙!

북풍한설처럼 매서운 칼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등골을 따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다.

남궁천은 곧장 천마신공을 끌어 올렸다.

후우우우웅!

검붉은 기운이 단전에서 폭발하면서 벽라검을 따라 뻗어갔다.

쉬따아아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하얀 눈꽃이 터진다.

따다다다당!

순간 두 사람이 어지럽게 검을 섞었다.

눈으로 좇기도 힘들 만큼 빠른 검격이 오간다.

파바바밧!

타닷!

스파바바밧!

따다당! 까강! 까라라라랑!

소리만 듣고 있으면 마치 악사가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만 같다.

두 사람의 공방은 그만큼 빨랐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결빙이 터져 나온다.

냉이겸의 눈자위가 꿈틀거렸다.

‘과연! 강호신룡의 소문이 과장된 것은 아니군. 한데…… 이질적인 이 기운은 마기가 아닌가!’

내심 놀란 냉이겸이 공격을 멈추고는 방어전으로 전환했다.

타당! 따다다당!

냉이겸이 현란한 보법을 밟으면서 검을 휘둘렀고, 그때마다 빙벽과 결빙이 만들어졌다.

타타탕!

결빙이 터져 나갈 때마다 눈보라가 휘날린다.

그렇게 남궁천이 마지막으로 두터운 빙벽을 깨부수었을 때!

파밧!

‘지금이라면!’

냉이겸이 얼른 자세를 바꾸어서 공격으로 전환했다.

쒸아아앙! 쒸앙!

단전에서부터 솟아오른 냉기가 검신을 타고 뻗어 나와 빙설파가 되어 날아든다.

타타타탕!

이번엔 남궁천이 연신 검을 휘두르며 빙설파를 막아내야 했다.

어찌나 냉한 기운인지 거친 숨을 내쉬는 남궁천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훅훅 흘러나왔다.

타다닷!

냉이겸은 여유를 두지 않았다.

재빨리 보법을 밟는 그의 발아래로는 얼음 조각이 빙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따다다당!

고막을 찢어버릴 것만 같은 금속성이 연이어 들리는 와중, 남궁천은 거듭 뒤로 물러나며 생각했다.

‘확실히 그냥 나이만 많은 늙은이가 아니군.’

그 귀하디귀하다는 만년빙정이라도 먹은 것일까?

냉이겸은 지칠 줄을 몰랐다.

충분히 그가 자신할 만한 수준이었다. 단전에서 끊임없이 뽑아 올리는 진기가 북극 바다처럼 끝이 없었다.

이윽고 냉이겸이 검에 힘을 싣기 시작하자, 남궁천의 전신이 격하게 떨렸다.

쩌엉! 쩡!

역시나 검신이 부딪칠 때마다 눈보라가 폭발적으로 일어났고, 결빙 조각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이쯤 되니 냉이겸도 상대가 마공을 쓴다는 사실에 놀라기보다는 비무 그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희한하게 남궁천은 자신의 모든 진력을 끌어내게 만든다. 그 모든 공격이 번번이 막히는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다.

생사를 걸고 무예를 겨룬다는 것이 이토록 재미있는 일이던가?

마음을 졸이며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빙설도 어느 순간 넋을 놓았다.

달빛 아래 생사지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전설에나 나올 것처럼 경이로웠기에.

냉이겸은 휘몰아치는 폭설 속에서 북극곰이 되어 춤을 추고 있었고, 남궁천은 들판을 내달리는 늑대와 같았다.

그렇게 둘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얼음꽃을 피우며 서로를 압도하려고 했다.

타아아아아앙!

일순간 거대한 빙벽이 터져 나갔다.

투두두두두두!

한파가 사방으로 뻗어가면서 주변 나무를 마구 쓰러뜨렸다.

그리고 검신을 맞댄 채 미동도 없는 두 사람.

마치 얼음 조각이라도 된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볼 뿐.

입을 먼저 연 사람은 냉이겸이었다.

“과연 대단하군. 그 사람의 아들답다.”

“아버지를 말하는 거요?”

“그렇네. 자네 아버지는 사실 본 궁의 은인이라 할 수 있지.”

“은인의 아들을 원수라며 찾아와 놓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남궁천이 모른 척 말하며 입매를 비틀었다.

냉이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실은 이쪽도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말일세.”

“그래서?”

“원칙대로라면 자네를 죽여야 하지만, 나는 자네에게 새로운 제안을 할까 하네.”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뭐가 말인가?”

“이제 와서 질 것 같으니까 목숨을 구걸하려는 거잖아요?”

“허허. 그게 그렇게도 해석되는군. 어찌 됐건 일단 들어나 보는 게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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