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 뒈질 각오는 하신 거죠?
“드르러엉…… 쿠울……! 드르르르렁……!”
남궁천이 코고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 중원인의 침사 단계는 늘 이런 식인가요?”
“끄응. 그만 비꼬아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나무에 오르긴 하셨어요?”
“거참, 묘한 일일세. 이놈이 정말 남궁천이 맞긴 한가?”
“용모파기로는 정확하잖아요. 게다가 이곳 주인장과 점소이들이 그렇게 불렀고요.”
“하긴.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소곤거리는데 자빠져 자다니. 도저히 적랑단주다운 태도가 아니란 말이지.”
“자는 척을 하는 건 아닐까요?”
“한번 확인해 봐?”
“아뇨. 그럴 필요가 없겠어요. 분명히 자는 걸 거예요. 그것도 아주 꿀잠을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장로님 추측이 단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자고요. 적랑단주는 장로님의 생각과 그냥 다른 인물인 거죠.”
“끄응. 그래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는 게 낫지. 이 녀석이 자는지 안 자는지 확인해 보자.”
“그럼 칼로 찔러 보세요.”
“내가?”
“제가 해도 돼요?”
“내가 하마.”
얕은 한숨을 내쉰 노인이 품에서 단검을 뽑아 들고는 천천히 남궁천에게 다가갔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세상모른 채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허참, 별 시답잖은 녀석일세.’
겨우 이 정도 인간이라면 굳이 생포할 가치도 없지 않은가?
그냥 차라리 여기서 목을 썰어 머리를 들고 돌아가도 될 일이다.
노인이 천천히 단검을 들어 올리는데,
“장로님, 죽이실 건가요?”
“이 정도로 둔한 녀석이라면 죽여도 된다고 본다. 굳이 애써 산 채로 끌고 갈 필요가 없지.”
“참 애매한 모순이네요. 강하면 산 채로 끌고 가고, 약하면 죽여 버린다니.”
“그래서 강호에서는 강해야 살아남는 거다.”
“그럼 차라리 이왕 이렇게 된 것 일격필살의 기세로 내리치세요. 남궁천이 정말 강한 인간이라면 어떻게든 막겠죠.”
“오냐, 그게 좋겠다. 만약 이 녀석이 이대로 죽으면 너는 곧장 빙공으로 놈의 몸통과 머리를 얼려 버려라.”
“네, 장로님.”
“그럼 내가 녀석의 머리를 취하겠다.”
“만약 막으면요?”
“으음. 그럼…… 엿 되는 건데…….”
“제아무리 강호신룡이지만 장로님에게는 안 되지 않을까요? 게다가 여차하면 제가 옆에서 도울 테니까요.”
“실은 그게 더 걱정이란다.”
“장로님! 지금 절 무시하신 거죠?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이건 애초에 제가 맡은 임무…….”
“거, 할 거면 빨리 합시다.”
순간 불쑥 들린 목소리에 노인과 설이 동시에 돌아보며 버럭 소리쳤다.
“좀 빠져 있게!”
“좀 빠져 있어요!”
“…….”
“…….”
잠시 후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뻣뻣해진 목을 애써 돌려 어느새 침상에 걸터앉아 있는 남궁천을 보았다.
“일어…… 났는데요?”
“그러네…….”
“어쩌죠?”
“그러게.”
두 사람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사이, 남궁천이 침상에서 완전히 일어나 기지개를 켜더니 탁자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거참, 조용히 좀 할 것이지. 그렇게 떠들어대는데 어떻게 안 깨나?”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건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노인의 질문에 남궁천이 탁자에 앉아서 찻잔에 차를 채우더니 한 모금 들이켰다.
“언제부터였을 것 같소?”
“글쎄…… 역시 우리가 맞은편 전각 지붕에서 보고 있을 때부터이려나?”
“틀렸소.”
“그럼 우리가 이 방으로 들어온 직후부터?”
“아니오.”
그러자 이번엔 설이 정답을 맞히고 말겠다는 표정으로 불쑥 말했다.
“장로…… 아니, 할아버지가 단검을 꺼내 들었을 때부터!”
이번에도 남궁천은 고개를 저었다.
“다 틀렸소.”
“하면?”
“두 사람이 골목길에서 숙덕거릴 때부터였소.”
“헉!”
“역시.”
설과 노인이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예상치도 못했던 설과 달리 노인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적랑단주로군. 훌륭하네. 그렇다면 우리도 더 이상 빙빙 돌리지 않겠네.”
“좋소. 본론으로 갑시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북해빙궁에서 왔네.”
“역시.”
“역시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가?”
“어느 정도 짐작은 했소.”
“어찌?”
남궁천은 말없이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아주 잠깐 남궁천의 눈동자가 살짝 붉은빛을 띤 것 같았다.
“아, 초견파공안…….”
“기본적으로 두 분은 내공을 잘 갈무리하고 있었지만, 빙공만을 익힌 자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 잘 드러났소.”
“그 특징이 무엇인가?”
“말로 설명하기 힘든 게 있소.”
남궁천이 대충 얼버무렸다.
사실 남궁천은 전생에 강호인들에게 쫓기다 못해 몽골 땅을 지나서 머나먼 북해빙궁까지 간 적도 있었다.
천만다행히 당시의 북해빙궁은 자신의 초견파공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더불어 자신이 무림공적 일호라는 사실마저도.
그 덕에 남궁천은 나름 궁주의 환대를 받으면서 한동안 무탈하게 지낼 수 있었다.
초견파공안을 이용해 북해빙궁의 무공을 손봐주고, 궁주의 무위도 향상시켜 준 덕분이기도 했다.
그렇게 북해빙궁 무인들과 몇 날 며칠을 함께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에게서만 느껴지는 기운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북해빙궁 무인들의 특징이라면 내력이 운기될 때 마치 혈맥에서 아지랑이처럼 연기 같은 게 피어난다는 점이다.
아마도 지극히 냉한 기운이 이동하니 일어나는 현상이리라.
물론, 그 현상은 초견파공안을 가진 남궁천에게만 보이는 것이고.
한데 이 두 사람에게도 그 특징이 고스란히 보였던 것.
자세한 설명까지는 듣지 못한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차피 자네만 알아챌 수 있는 뭔가가 있겠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그냥 넘어가도 되네.”
“아직 본론으로 넘어가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온 거요? 보아하니 내 목을 노리는 것 같은데.”
“흐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남궁천이 대놓고 질문을 해오자, 노인도 더는 피하지 않고 말을 받았다.
“노부는 한빙검이라는 별호로 불리는 냉이겸일세.”
“냉이겸.”
남궁천이 노인의 이름을 한 번 되뇌었다.
수십 년 전이긴 하지만, 북해빙궁에 들렀을 당시 그를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냉이겸의 이어지는 말에서 곧 알 수 있었다.
“한평생 본 궁의 설응각(雪鷹閣)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난 장로일세.”
“할아버지, 그걸 말씀하시면……!”
설이 깜짝 놀라서 소리치자 냉이겸이 그녀를 다독였다.
“어차피 더 이상 속일 수도 없지 않느냐?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다.”
“네…….”
남궁천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설응각에서 한평생을 지냈다면 자신이 모를 만도 하다.
북해빙궁의 설응각은 주로 중원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는데, 대체로 궁주의 먼 친척뻘로 구성되어서 강호를 유랑하며 보고서를 올리는 형식으로 알고 있다.
즉, 자신이 과거 북해빙궁에 머물렀던 시절에 냉이겸은 강호를 유랑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남궁천의 시선이 이번에는 설에게 물끄러미 향했다.
설이 포권하며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빙설이에요.”
“빙설이라면…… 빙하운 궁주의 딸인가?”
남궁천이 빙궁주의 이름을 정확히 말하자 두 사람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는군요.”
“뭐, 북해빙궁이 먼 곳이긴 하지만 맹에서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는 곳이니까.”
남궁천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냉이겸이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용건부터 말하지. 노부가 자네에게 비무를 신청하겠네.”
“비무라. 다짜고짜 한바탕 싸우자고 이 먼 곳까지 달려온 건 아닐 것 같고. 이유나 좀 들어보죠.”
“자네는 본 궁의 원수니까.”
“그러니까 왜?”
“혹시 폭왕 고천수를 기억하시는가?”
남궁천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느닷없이 폭왕 고천수라니?
너무 뜬금없는 질문이었기에 아주 잠깐 그게 누군지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하지만 곧 기억이 났다.
폭렬갑을 사용하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다가 되레 죽음을 맞이했던 자.
결국 그가 사용하던 폭렬갑은 현재 윤종승의 최애 무기가 된 셈이고.
그런데 북해빙궁에서 왜 그자를?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은 나는데, 그자가 왜요?”
“고천수를 보필하던 자 중에 설규라는 아이가 있었을 걸세.”
“설규?”
남궁천이 미간을 푹 찡그리고는 기억을 더듬었다.
고천수는 무난하게 떠올렸는데, 설규라는 남자가 있었던가?
남궁천이 머뭇거리자, 빙설이 얼른 끼어들었다.
“외모는 깎아놓은 조각처럼 잘생겼고, 나이는 젊은데도 머리카락이 서리가 내려앉은 것처럼 하얬을 거예요!”
“아…….”
“기억났나요?”
“아니.”
“하! 정말 너무하는군요. 자신이 죽인 사람도 기억하지 못한다니! 얼마나 인성이 망가지면 그럴 수가 있죠?”
“이봐, 아가씨.”
순간 남궁천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무심코 남궁천을 바라보던 설은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고 긴장했다.
남궁천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눈빛.
그것은 이제 약관에 지나지 않은 청년의 눈빛이 아니었다. 마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절대 고수의 고독함이랄까? 어딘지 강호의 삶에 찌들고 지친 자의 피로감이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게다가 저 말투.
이봐, 아가씨?
‘그래도 내가 더 나이가 많을 텐데! 어째서 저렇게 자연스러운……!’
본능적으로 위축된 빙설이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써 어깨를 폈다.
남궁천의 입이 열렸다.
“내가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알아?”
“…….”
“그 시체로 산을 이루고, 흘린 피로 강을 이룰 거야. 그런데 내가 죽인 자들을 일일이 다 기억하라고? 후후. 그랬다간 내 정신이 먼저 미쳐 버릴 텐데.”
“그런…….”
물론 그녀와 냉이겸은 남궁천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궁천의 자연스러운 저 표정으로 보고 있노라면 그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정말 그렇다고 무심결에 믿어버리게 되기에.
실제로 남궁천은 반역자들을 처리한 이후로 모종의 회의감에 빠진 상황이었다.
때문에 조금 지쳐 있던 그는 현재 남궁천의 신분이라기보다는 환생 전의 진천랑으로서 말을 하고 있었다.
“그, 그게 자랑은 아니죠! 사람 죽인 게!”
“그럼 날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놈들을 가만둬? 나는 그 정도로 부처가 되진 못해서 말이야.”
“그렇다고……!”
“그 잘생긴 설규라는 자가 아가씨의 정인(情人)인가?”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아니거든요? 설규는 본 궁 소속의 무인이에요. 그런데 당신 손에 죽었으니까 본 궁은 원수를 갚기 위해……!”
“단지 그런 이유라면 그냥 넘어가자고. 지금은 딱히 싸우고 싶지 않으니까.”
남궁천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침상으로 걸어가려고 할 때였다.
스르르릉.
매끄러운 소리에 이어 한기를 풀풀 휘날리는 검신이 남궁천의 목을 겨누었다.
검신에서 피어오르는 싸늘한 한기가 달빛 아래에서 연기처럼 가물가물 흩어졌다.
냉이겸이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운명이란 기분 가려가면서 들이닥치는 게 아닐세. 어찌하겠는가? 노부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자네 목에 서리가 내려앉을 텐데.”
한기에 살기가 섞여 나온다.
진심이다.
여차하면 얼음보다 차가운 검신이 남궁천의 목 언저리를 파고들리라.
남궁천이 손가락으로 검신을 슬쩍 밀어내며 돌아섰다.
“제가 요즘 기분이 좀 안 좋거든요? 뒈질 각오는 하신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