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대어를 낚다
청풍이 눈자위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얼굴에 금칠하기를 좋아한다고……?’
무슨 뜻일까?
단지 철없는 애송이가 어른을 놀리려고 하는 말일까?
지금까지 겪은 바로는 남궁천이 단순히 무공만 강한 멍청이는 아니었다.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는 힘만 센 망아지가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은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다.
그런데 저런 무례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정말 아무 의미 없이 지껄인 말인가?’
얼굴에 금칠하기를 좋아한다라.
지난번 소공마를 구한 금면인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닐까?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너무 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잔잔한 호수에 바위를 던져놓은 남궁천은 본인이 뭘 말한 건지도 모르는 듯 그저 해맑게 웃고만 있다.
‘그래, 별 의미가 없는 것이리라. 저 녀석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야.’
어린 나이에도 무공 수위가 강한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뭐, 초견파공안이라는 재능을 물려받았으니까.
하지만 노련함이라는 건 경험을 통해서 쌓이는 법이다. 뭔가를 노리고 이런 짓을 꾸미기에는 너무나 치밀하다.
다만 찜찜하긴 하다.
‘아니야. 절대 금면인이 나라는 건 알 수 없어.’
일부러 경공의 종류까지 바꿨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공마를 구해줄 당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곤륜의 경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남궁천이 초견파공안이기 때문이다.
남궁천은 공력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때문에 소공마를 구할 당시에는 자신이 창안한 독문 경공을 사용했다.
하지만 지금 사용한 것은 곤륜파의 비전절기인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이었다.
그러니 남궁천의 초견파공안을 역이용하여 오히려 속이기가 더 좋은 상황.
‘그래, 절대 알 수 없다.’
마음을 다잡은 청풍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다른 이가 내 얼굴에 금칠하는 걸 마다할 사람은 없겠지. 하나 너무 과하니 괜히 낯이 부끄럽네.”
“그런가요? 어쨌든 장문인의 경공에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 수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별말을. 나야말로 어쭙잖은 재주를 보여서 민망하이.”
형식적인 훈훈한 대화가 한 차례 오가고 난 후 청풍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청풍은 그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조금 전 남궁천이 던진 추혈검으로 인해 옷깃이 아주 미세하게 잘려나갔다는 것을.
대신 그는 의자에 박힌 추혈검을 뽑아 들고는 남궁천에게 휙 던져주었다.
추혈검을 가볍게 낚아챈 남궁천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확실하군.’
청풍은 금면인과 다른 경공술을 펼쳤다.
그 자체로 범인임을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이 초견파공안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청풍은 의식적으로 운룡대팔식을 펼친 것이다.
금면인의 경공은 운룡대팔식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운룡대팔식으로 피했단 말이지.’
느닷없이 날린 단검이 옷깃을 일부 잘라낼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만약 반사적으로 경공술을 펼쳤다면 가장 빠른 무공을 사용했을 텐데, 초견파공안을 의식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대어를 낚았어.’
이걸로 남궁천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곤륜파 장문인에게 야욕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곤륜파는 언제부터 마교와 손을 잡은 것일까?
아니다.
곤륜파는 마교와 손을 잡은 게 아니다.
백묘는 금면인이 나타났을 때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건 거짓된 연기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기적을 보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소공마도 마찬가지.
‘그렇다면 역시 마교와 곤륜파가 손을 잡았다는 건 말이 안 돼.’
만약 그런 사실이 있다면 그들의 경공술만 보고도 어느 정도 추측을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마교를 도운 것은 곤륜파의 일방적인 결정이란 뜻이다. 마교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재미있네, 이거.’
남궁천이 묘한 시선으로 자리에 앉은 청풍을 보았다.
그 눈빛을 느낀 것인지, 청풍 역시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이나 허공에서 얽혔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요?’
‘이 강호를 네놈이 다 차지한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라. 하늘 위의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강호를 먹기 위해 그런 짓을 하셨소? 맹주가 되려고?’
‘그깟 맹주 따위를 노리는 것은 아니다. 이 몸은 하나의 뜻으로 통일된 천하를 다스릴 것이다.’
‘당신이 뭘 노리든 내가 있는 한 어려울 거요.’
‘네놈이 나를 막는다면 기꺼이 짓밟아서라도 내 뜻을 세우리라.’
무언의 결의가 두 사람 사이에서 불꽃을 일으킨다.
마침 옆에 앉아 있던 덕양진인이 다가와 포권했다.
“장문인의 경이로운 경공술을 잘 견식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별말씀을요. 하찮은 재주였을 뿐이지요.”
청풍이 겸양을 갖춰 대답했지만, 덕양은 내심 청풍을 경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단검이 자신이 아닌 청풍을 가리켰기 때문이다.
그 미묘한 균열을 눈치챈 청풍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적랑단주는 앞으로 마교를 어찌 대할 생각인가? 흑무련과 화친을 맺은 것은 성공적으로 해결해 냈으나, 이제부터는 마교를 찾아내야 할 것인데.”
“맹을 정비하고 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마교를 찾아낼 생각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가?”
청풍이 다그치듯 물었다.
연회 자리에서 갑자기 묵직한 주제가 던져지자, 다른 이들도 입을 다물고 두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한편 장로원주 우위광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이건 또 다른 압박이었다.
남궁천의 무능함을 많은 이들 앞에서 드러낼 방법이기도 했다.
이런 압박으로 당장 남궁천을 적랑단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는 없겠지만, 남궁천에 대한 인식에 조금씩 타격을 줄 순 있으리라.
남궁천이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글쎄요. 장문인께서는 구체적으로 조언해 주실 만한 게 있으신지요?”
“허허, 나는 무림맹 사람이 아닐세. 그 일은 자네가 해야 하지 않겠나?”
“아직까지 정확한 계획은 없습니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정혜 사태가 탁자를 탕 내려치고는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런! 명색이 적랑단주라면 대외적인 임무에 소홀해서는 안 될 터. 아직까지 강호 최대 주적인 마교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흐음. 확실히 염려가 되는군. 적랑단주는 정말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말이오?”
이젠 덕양진인까지 가세했다.
다른 구파일방의 인사들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한다.
우위광은 그 과정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러자 한쪽에서 조용히 술잔만 비우던 여신우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모두의 시선이 향하자, 여신우가 천천히 웃음을 거두고는 손을 들어 보였다.
“아, 죄송하오. 여러분들 반응이 너무 웃겨서.”
“뭐가 웃기단 것이지? 그대는 최소한의 예의도 배우지 못했단 말인가?”
정혜 사태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따져 묻자, 여신우가 얇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죄 없이 낙인찍혀 뒷골목이나 구르며 살아남기 급급했을 사파 나부랭이가 무슨 예를 배웠겠소? 사태께서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하! 지금 무례한 것마저 백도 무림 탓이라고 하는 것이냐?”
“뭐, 딱히 그렇다고 한 적은 없는데. 찔리는 게 있소?”
나직이 대꾸하는 여신우의 눈매가 싸늘하기 짝이 없다.
보다 못한 청풍진인이 기다란 눈썹을 떨며 말했다.
“부련주께서 뱉은 말에 날이 서 있는 것은 사실이지 않소? 그쯤 합시다.”
“날이 섰다라. 연회가 시작된 후로 시종 날이 선 것은 여러분과 저기 앉아 계신 영감님 같은데.”
여신우가 구파일방 인사들과 장로원주를 가리켰다.
그러자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신우가 끼어들 것까지 생각하지 못한 남궁천은 그저 흥미로운 표정으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우위광이 낯이 발갛게 익어서는 손을 저었다.
“부련주께서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소.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실례를 한 것 같구려. 너그러이 이해 해주시기를.”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여신우가 얄미운 표정으로 슬쩍 물러나자, 정혜 사태만이 바글바글 끓는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신우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략의 상황이 정리되자, 이번엔 덕양진인이 남궁검을 돌아보며 말했다.
“맹주님, 이제부터라도 적랑단의 임무를 원상복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적랑단은 본디 대외적인 적을 상대하는 조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한마디로 맹을 정비한답시고 적랑단이 설치게 두지 말라는 뜻이다.
대신 마교나 제대로 잡으라는 힐책이기도 했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일리 있는 말씀이오. 맹의 조직이 어느 정도 정비가 되어가고 있으니, 적랑단은 앞으로 대외적인 임무에 충실해야 할 거요. 적랑단주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예, 맡겨만 주십시오.”
“흥! 맡겨만 달라는 사람치고는 아무런 대책이 없구나! 지금 마교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조차 모르는 마당에 뭘 믿고 맡겨달라는 것이냐! 적랑단주는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그 전에.”
문득 남궁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혜 사태가 눈살을 여미고는 돌아보자, 남궁검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혜 사태. 저 아이는 내 손자요.”
“알고 있습니다. 맹주님의 손자가 적랑단주지요.”
한마디로 한 집안에서 맹을 주무르고 있다는 걸 우회적으로 비꼰 것이다.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아시는군. 한데 왜 그러시오?”
“예? 뭐가요?”
“내 손자인데, 왜 사태의 손자를 대하듯 하느냐고 묻는 거외다.”
“그건…….”
“더구나 내 손자이긴 하나, 사태의 말대로 공식상 적랑단주요. 그리고 지금은 공식적인 자리. 어째서 그런 식의 말투를 구사하시오?”
“…….”
“흑무련도 함께하는 자리요. 최소한의 품위를 갖춰주시오.”
부탁처럼 들리지 않는다.
남궁검의 목소리에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것 같다.
말에도 무게가 있다면, 남궁검이 내뱉는 말은 천근만근이다.
여신우는 류난과 또 다른 유형의 위엄을 가진 남궁검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하긴 백도무림에도 저 정도의 인재는 있어야겠지.’
정혜 사태는 얼굴이 벌개져서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맹주님. 순간 감정이 앞섰습니다.”
“그럼 이제 적랑단주는 답해보게. 마교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 알아낼 방도는 있는가?”
“아예 없진 않습니다.”
“어떤 방법이 있던가?”
“한 가닥 끈을 쥐고 있으니 살살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한 가닥 끈이라?”
남궁검이 모른 척 묻자, 남궁천이 돌아서서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끌고 와라.”
다음 순간 손우곤이 사슬에 묶인 한 여인을 거칠게 끌고 왔다. 그녀는 바로 백묘였다.
“……!”
백묘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은 바로 청풍이었다.
‘역시 그때 사로잡혔던 거로구나.’
소공마를 빼낸 후 백묘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해서 그녀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딱히 무림맹 쪽에서도 마인을 생포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기에.
한편 전후사정을 모르는 우위광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자는 대체 누구냐?”
“통칭 백묘라고 불리는 마인입니다. 마교에서 나름 높은 직위에 있던 잡니다.”
“……!”
순간 장내가 술렁거렸다.
적랑단은 지금껏 백묘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함구하고 있었다. 때문에 맹의 수뇌인사들이 받은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그러다 보니 구파일방의 인사들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쯤 되니 우위광은 정말이지 똥이라도 씹은 표정이 되고 말았다.
묻으려고 하면 할수록 자꾸 녀석의 공로만 치켜세우는 꼴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