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검증
백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얼룩진 얼굴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찢어진 옷자락과 여기저기 상처 가득한 몸.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섬뜩한 기광을 품은 눈빛과 뭇 남성들을 홀릴 만큼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했다.
한편 갑작스럽게 백묘가 등장하자 청풍은 속내가 복잡해졌다.
‘이것마저 우연인가?’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백묘를 등장시켰을까?
특히 남궁천은 이따금씩 청풍과 눈을 마주치면 묘한 미소를 짓곤 했다. 물론 별 의미 없이 넘긴다면 대수로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남궁천의 모든 행동에 의미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놈…… 날 의심하는 건가?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도 남궁천이 자신을 알아챌 방법이 없지 않은가?
초견파공안으로 보았다고 해도 분명히 다른 경공술을 사용했다.
제까짓 게 무슨 재주로 자신이 금면인이라는 걸 알아보겠나?
역시 과민반응이리라.
하필 이 시점에 백묘를 끌고 온 것은 그저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일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동안 남궁천이 말을 이어갔다.
“이자를 심문해서 마교의 근거지를 찾아낼 생각입니다.”
“그자가 정말 마교에서도 수뇌부에 속한다면 근거지를 술술 불겠는가?”
우위광이 미심쩍다는 듯 말하자, 남궁천이 되레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래서요?”
“뭐?”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요?”
“어쩌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술술 불지 않을 테니까 그냥 가둬두고 손가락이나 빨자는 건 아니실 테고.”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효과적인 방안을 찾아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일세!”
우위광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받아치자,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효과적인 방안이 뭔지 모르겠지만, 우선 할 수 있는 것을 하다 보면 뭐라도 실마리가 잡히겠죠. 이것도 안 될 건데, 저것도 안 될 건데 하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남궁천이 대놓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우위광은 낯이 벌겋게 익었다.
그가 얼른 청풍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청풍진인, 보고만 계시지 말고 좀……!’
하나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한 청풍은 우위광의 간절한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다.
보다 못한 정혜 사태가 나섰다.
“우 장로님의 말씀은 조금 더 체계가 필요하다는 뜻인 것 같은데, 적랑단주는 어찌 그리 날을 세우시는가?”
“사실 그렇잖아요.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면, 뭘 하려고만 하면 이래서 안 될 건데, 저래서 안 될 건데. 나이 드시고 탁자 앞에 앉아 손가락이나 굴리면서 딴지나 걸면 저 같은 아랫사람들은 기운 빠지거든요. 잘한다, 잘한다 해줘도 기운이 날까 말까 한데, 이렇게 자꾸만 찬물을 끼얹으시니 날이 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 제 태도가 무례했다면 그건 사과드리겠습니다.”
“…….”
장내가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
분명 무례한 말 같은데, 또 틀린 말이 없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분위기에만 짓눌려 섣불리 입을 떼지 못했다.
정혜 사태가 청풍진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장문인께서는 하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
“장문인?”
“…….”
“장문인!”
“응? 아, 뭐라고 했소?”
청풍이 그제야 상념에서 빠져나와 정혜를 바라보았다.
정혜 사태가 눈살을 푹 찡그렸다.
‘도대체 뭐 때문에 아까부터 이렇게 넋이 나간 거야?’
속에서 치미는 불만을 삼키고는 다시 차분하게 물었다.
“장문인께선 이 문제에 대해 딱히 하실 말씀이 없냐고 여쭈었습니다.”
“흐음…… 적랑단주는 저 백묘라는 여인을 어디에서 생포한 거요?”
“맹주를 추격하던 중, 마교의 부교주인 소공마와 조우했었지요. 그때 안타깝게도 소공마를 놓쳤지만, 백묘는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술만 흥청망청 마셔대던 만취개가 트림을 길게 내뱉고는 말했다.
“호오, 부교주를 사로잡을 뻔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대협.”
남궁천이 포권까지 하며 깍듯하게 대꾸하자, 만취개가 술병을 나발 불고는 다시 말했다.
“꺼억. 놓쳤다고 표현한 것을 보면 그 부교주가 꽤나 궁지에 몰렸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패력궁 장로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탄성을 흘렸다.
확실히 패력궁이라면 부교주를 궁지에 내몰 만하리라. 게다가 그 패력궁과 용호상박의 대결을 펼쳤던 적랑단주가 연합했다니 말 다한 것 아닌가?
만취개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과연! 패력궁이 직접 나섰다면 충분히 궁지로 내몰 수 있었겠군. 거기에 천라지망도 펼쳐져 있었을 테고, 무공 천재인 자네가 수하들을 이끌고 사냥에 나섰다니 생포를 못한 게 오히려 아쉬울 지경이야.”
“과찬이십니다.”
“꺼억, 그런데 말이야. 어째서 부교주를 놓친 겐가? 패력궁의 도움까지 받았다면 부교주를 생포했어야 하지 않는가?”
과연 예리한 질문이었다.
패력궁은 무림칠성이다.
그런 그가 남궁천을 도왔다면, 부교주가 무림칠성급이라고 해도 생포를 했어야 한다. 아니, 생포는 어렵더라도 적어도 죽일 수는 있어야 했다.
뜻밖에도 만취개가 남궁천을 궁지에 내몬 형국이 되자 우위광이 탁자를 탁 내려치더니 소리쳤다.
“확실히 이상하군! 무림칠성인 패력궁께서 직접 나섰다면 부교주를 사로잡았어야 할 터. 백묘를 잡은 공로는 인정되나, 보다 중요한 인물인 부교주를 놓친 것은 적랑단의 치부일세.”
그러자 정혜 사태도 맞장구를 쳤다.
“맞는 말씀입니다! 무림맹 남문을 지켰어야 할 패력궁께서 친히 나서주셨는데, 자네는 결국 부교주를 잡지 못하고 저 약해빠진 수하만 사로잡았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까? 장문인!”
“흐음. 글쎄요.”
갑자기 질문을 받은 청풍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침음을 흘렸다.
그러자 정혜 사태가 속천불이 난다는 듯 가슴을 탕 치고는 소리쳤다.
“장문인! 글쎄라니요! 만약 그날 부교주를 사로잡았더라면 마교를 하루라도 빨리 무너뜨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을 겁니다! 한데 그걸 놓쳤는데, 어찌 책임을 따지지 않을 수 있을까요?”
“으음. 그런가…….”
청풍의 반응이 여전히 미적지근하다.
정혜 사태는 내심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대체 이 영감이 갑자기 왜 이래?’
하지만 청풍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소공마를 놓친 것은 분명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지금도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심정인는데, 이젠 아군이 무덤을 파고 있는 꼴이니 괜히 자리가 불편할 수밖에.
지켜보던 우위광이 남궁천을 향해 날카롭게 일렀다.
“아무래도 이건 변명이 필요한 것 같네만.”
남궁천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패력궁 장로님의 도움까지 있었으니 저는 분명 부교주를 생포하거나 죽였어야 합니다. 하나 그 순간 하필이면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나서 놓쳤습니다. 변명이라는 건 알지만 놈들의 경공이 무척이나 빨라서 도리가 없었습니다.”
“정체불명인들이?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정체가 알려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니까 마교일 리는 없다. 하면 백도무림이거나 흑무련의 짓일 테지.”
정혜 사태가 이번엔 화살을 흑무련 쪽으로 은근히 겨누자, 여신우가 발끈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본 련은 무림맹에 먼저 화친을 청했소. 그것도 거금을 들여서.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구파일방이 우리를 이간질하는 것으로만 보이오만.”
“흥! 이간질이라니! 지금껏 사파 것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탕!
순간 묵직한 충격음이 터지면서 장내가 일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어지러운 목소리들 사이로 남궁검의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혜 사태. 발언에 주의해 주시오. 흑무련은 이제 본 맹과 뜻을 모은 상황이오. 충분한 증거도 없이 모함하는 것은 지양해 주시길 바라오.”
“끄음.”
정혜 사태가 말을 마저 뱉지 못하고는 침음만 흘렸다.
이상하게 남궁검의 목소리에는 항거를 불능케 하는 힘이 있었다.
남궁검은 묵직하게 깔린 시선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적랑단주는 당시의 복면인들인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죄송합니다. 놈들의 경공이 워낙 빨라서 도저히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나 자네는 초견파공안의 재능이 있지 않은가? 그들의 공력 흐름은 보았을 터.”
“예, 그건 가능했습니다.”
“그럼 이리 하면 어떻겠는가? 자네가 그들의 경공을 시범으로 보여주게. 하면 여기 모이신 구파일방의 손님들께서 너른 견식으로 적을 유추할 수도 있지 않겠나?”
“아!”
남궁천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내리쳤다.
“과연 좋은 방법입니다. 그럼 곧장 펼쳐 보이겠습니다.”
“그러게.”
남궁검의 말이 떨어지자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더니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파아아앙!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남궁천의 신형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이동하더니 청풍진인의 탁자 위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우오오오.”
“맙소사, 대단하군.”
“저게 초견파공안의 재능인가?”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을 터뜨린다.
물론 청풍이 보여준 운룡대팔식에 비하면 느린 편이다.
하나 남궁천이 펼쳐 보인 게 몹시 신묘한 보법인 것만은 분명하다.
남궁천이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씨익 웃었다.
“죄송합니다, 장문인. 역시 경공술이라면 곤륜이 제일 아니겠습니까? 이왕이면 장문인께 여쭙는 게 가장 정확할 것 같아서 이쪽으로 달려왔습니다. 뭐든 정면으로 보는 게 가장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남궁천이 탁자 위에 쪼그려 앉더니 조용히 말했다.
“물론, 제 초견파공안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지만, 그들은 훨씬 빨랐습니다. 초절정의 수준을 넘어서는 정도에서는 초견파공안으로도 완벽하게 흉내내기가 어렵거든요.”
“…….”
청풍이 어금니를 꾹 깨물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 확실히 날 의심하고 있어!’
청풍이 이내 표정을 풀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글쎄. 본 파가 경공에 조예가 깊긴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경공술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자네가 펼친 경공은 확실히 흥미로운 부분들이 보이지만 일부 아쉬운 점도 보이네. 그 경공이라면 분명 오래 달리는 걸 유지하긴 어려웠을 걸세. 포기하지 않고 좀 더 쫓아갔더라면 좋았을 것 같군.”
대답을 들은 남궁천이 내심 조소를 지었다.
‘그야 당연히 내가 일부러 조금 비틀었으니까.’
하나 그건 역시 경공을 창안한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정도로 비튼 것이었다.
그런데 청풍은 정확히 그것을 꿰뚫은 것이다.
남궁천은 이제 더 이상 검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추혈검이 청풍을 가리킨 순간부터 거의 확신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듭 검증을 해본 것이다.
남궁천이 탁자에서 훌쩍 뛰어내려서는 포권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그놈을 놓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생포가 안 되면 잡아 죽일 수 있도록 하지요.”
남궁천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청풍 역시 얼음장 같은 눈으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파장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엇!”
순간 연회장 한쪽에서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남궁천과 청풍이 움찔거리고는 돌아보니, 백묘가 일순 바닥을 차더니 단숨에 남궁검에게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촤르르르르륵!
그녀의 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은 어느새 줄줄이 풀려서 마치 채찍처럼 변한 상황.
사슬 채찍이 향한 곳은 바로 남궁검의 목이었다.
백묘 역시 초절정에 이른 무인이었다.
그녀가 어찌 사슬을 끊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앗! 위험!”
“안 돼!”
뒤늦은 경악성이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정말이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백묘의 기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