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 대어를 낚다
휘리리리리링!
추혈검이 맹렬한 기세로 돌아가면서 묘한 공명음을 울렸다.
남궁천이 특별한 효과를 주기 위해서 기를 살짝 섞은 탓이다.
어쨌거나 그 덕에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추혈검을 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몇몇 이들은 은근히 기대하는 기색으로 추혈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로부터 강호를 뒤흔든 미신은 매우 많았다. 그리고 그 미신으로 인해 혈겁이 일어난 적도 많았다.
그만큼 강호의 미신은 무인들의 심리를 뒤흔들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패왕혈천도(霸王血天刀)를 손에 넣은 자가 천하를 장악할 것이라든지, 적월(赤月)이 뜨는 날 태어난 아이가 강호를 평정할 영웅이 될 거라든지, 고인이 숨긴 장보도를 손에 쥔 자가 억만금을 손에 넣을 것이라는 등.
물론, 지금 남궁천이 가볍게 내뱉은 말이 그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진 않다.
각종 회담이나 연회 자리에서 이런 유희를 즐기는 경우는 많았으니까.
하나 가볍게 던진 농담에도 칼자루가 오가고, 피가 튀고,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곳이 바로 강호인 법.
다들 말을 하진 않지만 은근히 저 단검이 자신을 가리키길 바라고 있었다.
괜한 자존심 문제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인 채 추혈검만 바라보고 있으니, 그제야 우위광은 뭔가 묘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가만…… 이거 분위기가 생각보다…….’
우위광이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남궁천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회전하는 단검을 지켜본다.
과연 저 단검이 누굴 가리킬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다.
별로 좋지 않은 상황이다.
사람들이 이 단순한 놀이에 이만큼이나 집착할 줄 몰랐다.
‘나도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더니 감이 많이 떨어졌군.’
무인들 특유의 자존심과 특성에 대해 너무 무감해져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이러한 놀이에 제법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아니, 흥미 수준이 아니라 자존심까지 걸고 있다는 사실을.
특히나 무림칠성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외부 인사들은 눈빛에 진중함마저 느껴진다.
자칫하다간 저들끼리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을 만큼 예민한 문제가 아닌가?
‘은근한 분열을 노리는 것이었던가?’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운 놀이에 불과하지만, 그 이면에는 철저한 심리전이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정말 남궁천이 여기까지 생각했다면 그 심계가 놀랍지 않은가?
아니, 확실히 거기까지 계산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야 대뜸 저런 놀이를 하자고 나섰을 리가 없지 않나?
‘어리다고 얕볼 게 아니었어.’
무공 수위는 인정했다. 그래, 그건 진작 인정했다.
하지만 저 어린 나이에 저만한 심계를 가지고 있을 줄이야. 웬만큼 산전수전을 다 겪은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제길,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로군!’
그러는 사이 회전하는 추혈검의 속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제 잠시 후 추혈검은 완전히 멈춰 서 누군가를 가리키리라.
그것이 몰고 올 파장은 과연 어떨지?
이왕이면 저 추혈검이 무림칠성 중 한 명을 가리키는 것이 좋으리라. 그래야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줄 테니.
‘가만, 그것도 아니군.’
이 자리에는 무림칠성이 넷이나 있지 않은가?
이제 장로가 된 패력궁을 제외한다고 해도 외부에서 방문한 무림칠성이 셋이나 된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단검을 지켜보는 곤륜파 장문인 청풍진인, 차분한 시선이지만 어딘지 기광이 번뜩이는 무당파 장로 덕양진인. 그리고 한옆에서 술병을 나발 불며 단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만취개.
만약 단검이 세 사람 중 한 명을 가리키게 된다면?
만취개를 제외한 무림칠성은 필시 기분이 나빠지리라.
역시 분열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엉뚱한 하수를 가리키는 게 낫다.
‘그래, 차라리 남궁천을 가리키면 좋겠군.’
그럼 오히려 질투와 분노를 남궁천이 받게 될 테니까.
‘가만?’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바람에 우위광은 눈살을 찌푸리고 움찔 떨었다.
‘설마?’
만약 저 단검이 자신을 가리킨다면?
그럼 분위기가 묘해질 수 있다.
기껏 자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무림칠성과 구파일방의 인사들이 냉랭해질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허! 단검 하나 돌리는 것에 이렇게 머리가 복잡해질 줄이야!
우위광이 속으로 끙끙거리고 있을 때쯤, 남궁천은 그런 원주를 보며 내심 조소를 지었다.
‘후후. 머리가 복잡할 거요, 영감. 하나 걱정하지 말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역시나 남궁천은 우위광이 어떤 염려를 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사실 그러한 점들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으니까.
추혈검을 돌리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우위광의 추측처럼 구파일방의 관계를 살짝 흔들어보겠다는 심산이다.
하지만 더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역시 소공마를 구출한 복면인을 찾겠다는 의도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우위광은 불편한 심정으로 지켜보다가 이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래, 여기에 무림칠성이 즐비한데 제까짓 게 기를 실어서 잔재주를 부리진 않겠지.’
만약 그랬다간 무림칠성들이 단박에 알아차릴 것이다.
거리가 아예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고, 몇 걸음만 걸으면 닿을 수준이 아닌가?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이 회전하던 단검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꿀꺽……!
누군가 마른침을 삼킨다.
별것 아닌 일인데도 묘하게 긴장이 된다.
이 모든 것이 남궁천의 행동과 눈빛, 표정으로 인해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스스스……!
고요함 속에서 단검만 천천히 멈춘다.
그리고 마침내.
“……!”
추혈검이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모든 이의 시선이 그 방향으로 향했다.
만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군.’
남궁천이 입매를 희미하게 비틀었다.
곤륜파 장문인 청풍진인!
“와아, 거 신묘한 검이오!”
“옳소! 추혈검이 무림칠성 중 한 분을 딱 가려냈구려!”
“이렇게 되니 꽤나 신빙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하!”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호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우위광은 반사적으로 무당파 장로인 덕양진인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덕양진인의 표정이 일순 어두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덕양진인 역시 무림칠성에 오를 정도의 무위를 가진 자인데, 이 순간 청풍진인보다 못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하나 그는 곧 불편한 기색을 감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청풍진인에게 포권지례를 했다.
“허허, 감축드립니다, 장문인. 과연 무림의 큰 별이십니다.”
“이런,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니다. 제가 어찌 덕양 장로님을 앞에 두고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저보다는 덕양진인이 더 훌륭하시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 단검이 청풍진인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저 놀이일 뿐입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허허.”
청풍이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분 나쁘진 않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우위광은 저 둘 사이에서 미약하게 어긋나는 감정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수양이 깊은 두 사람이었다.
이 정도로 대사를 그르칠 정도로 실수할 사람들은 아니리라.
‘다행이군. 덕양도 크게 신경 쓰진 않는 모양이야.’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쉰 우위광이 가소로운 표정을 지으며 남궁천을 보았다.
‘흥! 터무니없는 짓으로 분위기를 흔들어보려고 했겠지만 어림없지. 요란법석을 떤 것치고는 썩 원하는 반응이 아니겠구나.’
남궁천은 사람들의 호들갑이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손뼉을 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짝짝짝!
“역시 대단하십니다. 곤륜파에서 오신 청풍진인을 이 보잘것없는 단검도 알아보는군요. 혹시 장문인께서는 저처럼 젊고 견식이 짧은 하수들을 위해서 한 수 가르침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느닷없는 제안에 청풍이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물었다.
“그저 흥겨운 놀이에 불과한 것을 너무 과하게 해석하는 게 아닌가 싶네만. 여기서 뭔가를 보이는 것도 애매하거니와.”
“에이, 그러지 마시고 한 수 보여주시죠. 하다못해 발검술이라도 보여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발검술이라면 역시 나보단 점창파 장문인께 부탁을 드리는 게 어떻겠나?”
“흐음. 그런가요? 그래도 이왕이면 이 단검이 가리킨 고수의 무공을 견식해 보고 싶습니다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뭐가 말인가?”
“곤륜파라면 역시 경공이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이 단검을 던지면, 막거나 잡아내지 않고 피하는 것만 보여주시죠.”
그러자 장내에서 누군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오오, 그것참 흥미롭겠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한 수 보여주시지요!”
“곤륜의 경공이야말로 천하제일이 아닙니까?”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하자 청풍이 침음을 흘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리 원한다면 가벼운 재주를 보여 드리겠네. 어디 한 번 던져보시게.”
청풍이 술잔을 들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미 그는 단검이 ‘천하제일인’으로 지목한 사실에 대해서 꽤 기분이 고양되어 있는 듯했다.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럼 준비를…….”
“언제든 준비되어 있네.”
청풍의 여유로운 말에 다른 이들이 감탄을 흘렸다.
“저 상태로 바로 경공을 펼쳐 보이겠다고?”
“날아드는 단검을 피해서?”
“과연 곤륜의 장문인이시구나!”
“하긴, 곤륜의 장문인은 하늘을 나는 새보다 빠르다고 들었으니.”
“오늘 제대로 견식할 기회가 주어지는군!”
저마다 수군거리는 말을 들으며 남궁천이 추혈검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걱정하지 말게.”
대답하는 청풍이 태연히 술잔을 든 채로 대꾸한다. 누가 봐도 경공을 펼칠 수 있는 자세가 아니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찰나!
팟, 쒜에에엑!
남궁천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이더니 추혈검이 무서운 속도로 청풍에게 날아갔다.
짧은 순간 청풍의 눈이 번뜩였다.
‘호오?’
남궁천의 능력을 알고 있긴 했으나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던질 줄은 몰랐다.
이래서야 정말 죽기 살기로 던진 것 같지 않은가?
하나 자신이 누군가?
하늘도 예사로 거닌다는 곤륜의 장문인이다.
팟!
창졸지간 그의 신형이 의자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투콰악!
그대로 날아간 추혈검이 조금 전 청풍이 앉았던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처박혔다.
그리고 귀신처럼 사라진 청풍은 어느새 남궁천 옆으로 이동해 있었다.
일순 장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야말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랄까?
심지어 청풍의 손에는 아직 마시지도 않은 술이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
그토록 빠른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술잔의 술이 넘치지도 않은 것이다.
신묘한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우, 우와아아! 대단하다!”
“맙소사! 저 술 한 방울 흘리지도 않다니!”
“신의 경지라는 게 과장이 아니었구나!”
“과연 무림칠성이십니다!”
사람들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며 청풍을 향해 포권했다.
“과연 대단하십니다. 청풍진인의 경공 수위에 불초 후배가 견식을 넓힐 수 있었습니다. 놀라운 경공술입니다.”
“하하. 자네는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군.”
“그런가요?”
남궁천이 빙그레 웃더니 어딘지 묘한 표정으로 말한다.
“좋지 않으신가요?”
“흐음? 뭘 말인가?”
“전 장문인께서 얼굴에 금칠하는 걸 좋아하시는 줄 알았거든요.”
“……!”
당신이 그때의 금면인이잖아.
이거, 대어를 낚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