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8. 난 평화주의자야
유백랑은 당주실에서 연신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했다.
이따금씩 창가의 탁자에 앉아서 차를 홀짝이긴 했지만, 두어 모금도 마시지 않고 금방 일어나서 또 서성이길 반복했다.
차가 식고도 남을 시간이 지나자 시녀가 조심스럽게 들어와 물었다.
“나리, 차를 다시 내어올까요?”
“깜짝이야! 필요 없으니까 썩 물러가라!”
유백랑이 체면이고 뭐고 따지지도 않은 채 호통을 내질렀다.
어찌나 골몰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시녀가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당주실에서 굳이 기감을 예민하게 세우고 있을 필요도 없으니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금은 다른 일로 모든 신경이 집중된 상황.
‘제기랄. 아무것도 알아낸 것도 없이 시간만 흐르는군!’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는데 마침 수하 한 명이 들어왔다. 유백랑이 얼른 수하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래, 뭘 좀 알아낸 게 있느냐?”
“죄송합니다, 당주님. 딱히 걸리는 점이 없어서…….”
“이런 젠장!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럼 뭐라도 걸리는 게 있을 것 아냐!”
“그게…… 지난 수십 년간 남궁가가 워낙 바닥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까? 보통 털어서 먼지가 나는 경우는 뭔가 득을 보고 있어야 하는 건데…… 이제 막 남궁천이 공을 쌓으면서 재기하는 가문이다 보니 딱히 걸리는 점이 없습니다.”
“당가 쪽은? 당예설 단주가 물러가고 그 빈자리를 남궁천이 차지했으니, 당가 쪽에서는 곱게 보지 못할…….”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반대라?”
“예, 당가는 오히려 남궁가를 좋게 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당예설은 남궁천을 거의 은인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끄응.”
유백랑이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 보니 당우기가 맹주를 배신했을 정도니까 당가 쪽을 파는 것은 의미가 없으리라.
“알았다. 그만 나가봐라.”
“죄송합니다.”
수하가 방을 나가고 나자 유백랑은 창가로 걸어가 식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제길. 도대체 수습이 안 되는군. 앞으로 어떻게 해야…….”
“당주님.”
문득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유백랑은 다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솟구치는 짜증을 억누른 채 문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적랑단주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뭐? 적랑단주가?”
유백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인가?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지만 피하는 게 상책은 아니다.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들라 해라.”
잠시 후 남궁천이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실내로 들어섰다.
‘저 낯짝을 한 대 후려치고 싶군.’
유백랑이 속내를 감추고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환대했다.
“이게 누구시오? 지금 한창 정신이 없을 텐데 여길 다 오고. 그래, 무슨 일로 나를 찾았소?”
“굳이 용무가 있어야 찾아오겠습니까? 앞으로 길게 보고 지낼 사이 아닙니까? 친분이라도 쌓으려는 것이지요.”
“하하하. 친분이라. 좋지, 좋아.”
유백랑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창가로 자리를 안내했다.
“앉으시오. 남궁 단주.”
“감사합니다. 그런데 차가 다 식었네요.”
“아, 요즘 내가 입맛이 없어서. 차를 다시 내어오라고 하겠소.”
유백랑이 마주 앉으며 시녀를 불렀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천이 빙그레 웃었다.
“왜 입맛이 없으십니까?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지요?”
이 독사 같은 새끼. 다 알면서도 묻는구나.
하나 상대가 먼저 이를 드러내지 않았으니 굳이 떠벌릴 필요는 없으리라.
“워낙 맹이 어지러운 시기 아니겠소? 북쪽에서는 여전히 흑무련이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있는데, 아직 본 맹이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불안한 마음이 없진 않소.”
“너무 걱정 마시지요. 흑무련이 쳐들어오면 제가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허허. 남궁 단주가 그리 말해주니 든든하구려.”
“의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암, 어려운 시기에 서로 의지해야지.”
유백랑이 다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쏟아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도대체 남궁천이 여길 왜 왔는지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궁천이 서서히 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살곡의 부곡주를 조사하다 보니 좀 이상한 이야기를 들어서요.”
“이상한 이야기라면……?”
유백랑이 질문을 던지면서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탁자 아래로 다리가 달달 떨리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런 유백랑의 심중을 엿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남궁천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으응? 왜, 왜 그러시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소?”
“아뇨. 꽤 긴장하고 계신 것 같아서요.”
“허허, 긴장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요즘 맹에서 적랑단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소이다.”
“왜 두려워하죠? 저 같은 애송이를.”
“무슨 그런 말씀을. 적랑단주의 거침없는 개혁 시도가 많은 이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오.”
“그럼 당주께서도 제 의지에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소. 나는 단주를 지지하고 있소.”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나 이 자리에서 굳이 대립각을 세워서 화를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막말로 최근 적랑단의 기세는 무서울 게 없을 정도니까.
그도 그럴 것이, 호법당주를 사로잡은 것도 모자라서 살곡이라는 살수 단체를 일망타진한 셈이 아닌가?
누구도 적랑단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한데 유백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궁천이 탁자를 탕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닌가?
화들짝 놀란 유백랑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자빠져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왜, 왜, 왜 그러시오?”
“역시! 그래서 그랬군요!”
“뭐가 말이오?”
순간 남궁천이 두 손을 훅 뻗어왔다.
“헉!”
깜짝 놀란 유백랑은 자신을 해하는 줄 알고 얼른 두 손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그 손을 교묘하게 피한 남궁천이 유백랑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붙들며 소리치는 게 아닌가?
“역시 유 당주님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와 뜻이 다를 리가 없지요!”
“으응……?”
유백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남궁천이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부곡주의 자백을 받았거든요. 당주님이 살곡에 의뢰를 했다고요. 안천길을 죽여달라고.”
“……!”
유백랑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역시 부곡주 그 입 싼 놈이 모든 걸 나불거렸구나!’
세상에 살다 살다 이렇게 입이 가벼운 살수 놈은 또 처음 본다. 이대로 살곡이라는 조직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작정한 것일까?
그나저나 남궁천은 그걸 듣고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지?
의문을 가지기가 무섭게 남궁천이 유백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한번 여쭤보고 싶네요. 왜 안천길을 죽여달라고 사주하신 겁니까?”
“그건…….”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너무 긴장하고 있으니 생각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 같다. 마치 이대로 바보가 된 것만 같다.
이제부터는 말 한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한 번 삐끗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어도 할 말이 없어진다.
유백랑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거리는데, 남궁천이 재차 물었다.
“아, 실은 그 사실도 들었습니다. 안천길 대신 천오백만 냥을 살곡에 내주었다고요.”
아…… 거기까지 다 알고 있었구나.
하긴. 이 마당에 모르는 게 더 이상하리라.
그렇다는 말은 결국 자신을 놀린 것인가?
어차피 모든 게 들통나고 말았다.
남궁천은 자신이 이실직고하길 바라는 것인가?
유백랑이 반사적으로 창밖을 보았다.
혹시나 적랑단원들이 포진해 있진 않은지 확인한 것이다.
‘이제 나는 안천길 당주와 공범이 되는 것인가?’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장로원에서 어떻게든 막아주면 다행이지만, 그게 아니면 목숨을 잃게 된다.
‘내가…… 죽는다고? 이렇게 허망하게?’
손끝이 달달 떨린다.
남궁천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는 묻는다.
“다시 묻겠습니다. 천우당주님. 왜 안천길을 죽여달라고 살곡에 의뢰를 한 거죠?”
남궁천이 기괴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다.
꿀꺽……!
유백랑이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잠깐만요.”
“음?”
“제가 한 번 맞혀볼까요?”
남궁천이 어딘지 신난 표정으로 묻는다.
‘지독한 놈. 날 묻어 버리는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로구나.’
이젠 대꾸할 기운도 없다.
유백랑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천이 벌떡 일어나더니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제 추리로는 바로 이렇습니다! 안천길이 당주님께 먼저 제안을 했을 겁니다. 저 눈엣가시 같은 남궁천을 죽여 버리자! 제 말이 맞죠?”
“맞소.”
“당주님은 아마 고민이 깊었을 겁니다. 그렇죠?”
“그렇소.”
“왜냐!”
“…….”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니기 때문에!”
“으응?”
“예, 그렇습니다. 그건 올바른 일이 아니죠. 더구나 살곡에 의뢰를 하다니요! 무림맹 호법당주가 할 말은 절대 아니죠! 하지만 당주님은 거절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왜냐! 그간 무림맹을 쥐락펴락하던 호법당주가 아닙니까? 바로 눈앞에서 손을 내미는데, 그걸 뿌리쳤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었을 테니까요!”
“어음…… 뭐…… 일단 들어보겠소.”
남궁천이 씨익 웃어보이더니 다시 걸음을 옮기며 방 안을 서성였다.
“자, 제 추리를 이어가자면 이렇습니다. 당주님은 우선 돈을 빌려주기로 한 다음, 고민을 하셨을 겁니다. 이 사실을 저와 맹주님께 알릴까, 말까? 하나 그 사실을 알린다고 해도 안천길이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떼면 일이 복잡해지겠죠. 진상 조사를 하느라 시간을 보낼 테고, 그러는 사이에 안천길은 배신자인 당주님을 가만두지 않을 테고요. 그렇죠?”
‘아니. 완전 아닌데?’
하지만 유백랑은 그저 어깨만 으쓱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자신에게 불리하게 흐르는 것 같진 않았다.
남궁천이 우뚝 걸음을 멈추더니 유백랑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당주님은 결심한 겁니다. 차라리 살곡에 의뢰를 하자고! 호법당주를 죽여달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불의를 막고 싶다는 신념이었을 테지요!”
“어어…… 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하하! 유 당주님도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하, 하지만 그날 부곡주는 남궁 단주를 노리고 잠입하지 않았소?”
유백랑이 무심결에 질문을 던지면서도 후회했다.
‘내가 왜 내 무덤을 파는 거냐?’
사실 따지고 보면 이상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남궁천의 말대로 흘러가려면, 어디까지나 남궁천을 죽이기 전에 안천길부터 죽여야 할 테니까.
그런데 남궁천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야 제가 아닌 안천길을 죽이려고 한 것이니까요!”
“으응? 왜?”
“하하하! 부곡주가 의뢰를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날 부곡주가 노린 것은 제가 아니라 안천길이었다고 합니다. 부곡주가 직접 자백했습니다.”
“아…….”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유백랑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어디 보자.
부곡주가 노린 게 남궁천이 아니라 안천길이었다고? 사실일까?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부곡주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왜?
‘아마도 감형을 노린 것일 테지.’
현재 실세인 적랑단주를 노렸다고 하는 것보단 현재 죄수나 다름없는 안천길을 노렸다고 하는 것이 스스로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허! 부곡주가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군.’
그래도 살행 순서가 바뀐 것은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할 텐데.
결국 유백랑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부곡주가 왜 내 의뢰를 먼저 받아준 거라고 하오?”
“하하. 그걸 왜 제게 물으십니까? 당주님이 신신당부를 했다면서요?”
“내가……?”
“예. 무림맹을 지키기 위해서!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 안천길을 먼저 죽여달라고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부곡주도 잡아넣고 안천길도 잡아넣었지 뭡니까? 차라리 그냥 부곡주 손에 뒈지게 내버려 둘걸.”
서늘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남궁천이었다.
“허…….”
일이 이렇게도 풀리는가?
모든 열쇠를 쥔 사람은 부곡주였다.
한데 부곡주가 기가 막힌 문을 연 것이다.
자신의 죄를 경감시킬 수 있는 방법을.
게다가 그런 허위 진술은 이쪽에서도 대환영이니 절대로 반박할 리가 없지 않은가?
가만.
이렇게 되면 정말로 남궁천과 한 배를 타야 하는 건가?
혹시 이 모든 걸 남궁천이 만든 판이라면?
‘설마…… 그럴 리가.’
유백랑이 헤실헤실 웃는 남궁천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어린 나이에 상승 무공을 익히는 건 어찌어찌 가능하다지만, 경험까지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약관에 지나지 않은 남궁천이 그 정도로 깊은 통찰력과 혜안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데, 남궁천이 척 포권을 취했다.
“당주님, 평화를 위해서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뭘 그런 걸로. 내가 좀 평화주의자요.”
그렇게 얼떨결에 남궁천이 탄 배에 반강제로 승선하게 된 유백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