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 난 평화주의자야
“원주님!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이대로 가다간 호법당주가 처형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천우당주 유백랑이 장로원주 우위광 앞에 엎드려 절규하듯 소리쳤다.
사실 말은 호법당주를 걱정하는 것처럼 쏟아냈지만, 정작 그가 염려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였다.
‘그 멍청한 안 당주가 도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엎드린 채 고개를 푹 숙인 유백랑은 뼈저린 후회를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과거로 갈 수만 있다면 안천길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자신에게 쌍욕을 퍼붓고 싸대기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다.
애초에 안천길은 권모술수에 나름 능하지만 머리가 비상한 자는 아니었다.
아첨과 뇌물 등으로 호법당주 자리에 올랐지만 때론 속에 천불이 날 만큼 답답한 순간들이 있었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 살곡에 어떤 식으로 어떻게 의뢰를 했기에 들통이 난단 말인가?
‘분명 살곡에 의뢰하러 가면서 꼬리를 밟혔을 테지!’
문제는 이번 의뢰에 자신도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만약 안천길이 입만 벙긋해도 자신은 대번 역모자로 내몰릴 터다.
어디 그뿐인가?
사로잡힌 부곡주라는 자가 자신의 의뢰에 대해 발설하기라도 하면 안천길은 길길이 날뛰고도 남으리라.
남궁천을 죽이려고 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죽이겠다고 설레발을 칠지도 모를 일이고.
‘하아. 인생이 꼬여 버린 기분이군.’
애초에 그 무식한 안천길과 손을 잡는 것이 아니었는데.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거친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콰앙!
곧이어 뜨끈한 기운이 유백랑을 훅 덮쳐왔다.
“한심한.”
묵직한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유백랑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보니 우위광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유백랑을 노려보고 있었다.
괜히 자신에게마저 불똥이 튈까 싶어서 유백랑은 숨소리마저 죽였다.
하나 결국은 불똥이 튀고 말았다.
“자네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느냔 말이야! 안 당주가 그런 멍청한 짓을 꾸미는 동안 두 손 놓고 방관하고만 있었던 것이야!”
“그, 그것이…….”
“설마 자네도 그 일에 엮인 것은 아니겠지?”
우위광이 잡아먹을 듯한 눈초리로 노려보자 유백랑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아무런 대답도 못 했다.
무언의 긍정을 알아챈 우위광이 이맛살에 주름을 팍 잡으면서 외쳤다.
“이런 한심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설마 자네까지 그 멍청한 짓에 가담했을 줄이야! 도대체 생각이라는 게 있는 것인가!”
“죄, 죄송합니다! 원주님. 하나 저는 어디까지나 자금을 보태주었을 뿐입니다. 그 돈으로 안 당주가 무얼 하려는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까진 알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런 한심한 계획을 알았더라면 절대로 자금을 내어주지 않았을 겁니다!”
유백랑이 거짓말을 보탰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라면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어차피 벼랑 끝에 선 신세가 아닌가?
부곡주가 입만 벙긋해도 자신은 끝장이다.
‘하지만 그놈 입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실 부곡주가 그리 순순히 의뢰 내용에 대해 이실직고할 줄은 몰랐다.
부곡주가 무릎을 꿇으며 목숨을 구걸했을 때는 유백랑도 멍한 표정으로 딸꾹질이 나올 정도였다.
살수는 죽을 때도 입을 다문다는 말은 다 옛말이 되기라도 한 걸까?
어쨌거나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은 끝까지 잡아뗄 작정이었다.
우위광이 뱀처럼 싸늘한 눈초리로 유백랑을 노려보았다.
“쯧쯧. 돈을 얻다 쓰는지도 모르면서 빌려주었단 말인가?”
“그저 좋은 일에 쓸 것이며, 모든 게 정리되면 이자를 넉넉하게 쳐준다기에…….”
“이런 맹탕 같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군.”
우위광이 긴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멍청한 호법당주 때문에 모든 계획이 꼬여 버렸다.
“그토록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일렀건만.”
사고도 적당히 쳐야 막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우위광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허공만 빤히 응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안천길이 다소 성급한 성격이긴 하지만 그리 무모한 인간이던가?
‘설마 이 모든 판을 남궁천이 만든 건 아닐 테지?’
언뜻 든 생각에 우위광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지나친 생각이리라.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것은 제갈량이 환생해도 힘들 것이다.
한데 남궁천이 무슨 수로 안천길을 쥐락펴락했겠는가?
“안 당주는 갑자기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가?”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안 당주가 그런 짓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지라.”
유백랑이 우물쭈물거리자 우위광이 코웃음을 치고는 중얼거렸다.
“하마터면 즉결심판을 받을 뻔했네. 살곡을 통해 살인 청부를 하다니? 거래 장부까지 명백한 증거로 입수됐다지? 그 자리에서 참수당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야!”
‘차라리 참수당했다면 다행이겠지요. 더 이상 뒤탈도 없을 테니.’
유백랑은 내심 치밀어 오른 생각을 가슴으로 꿀꺽 삼켰다.
우위광의 말대로 사파와 손을 잡고 맹원을 살인청부하게 되면 즉결 심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경우 무조건 참수다.
다만 각주 이상의 요직에 머물러 있는 자의 경우에는, 보름의 변론 기간을 둔다.
이 변론 기간 동안 납득할 만한 사유를 내지 않는다면 역시 참수를 피하기 어렵다.
“문제로군.”
우위광이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려냈다.
사실 호법당주 한 명의 목숨이 귀한 것이 아니다. 그런 머저리 같은 놈이야 뒈지든 말든 알 바가 아니다.
예전부터 호법당주는 나름 충직한 편이긴 했으나, 너무 성급하고 제 멋대로 구는 구석이 있었다.
맹주도 그런 호법당주의 모자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안천길을 호법당주로 앉힌 것인지도 모른다.
대신 조금 더 믿음직한 모용신을 청랑단주로 임명한 것일 테고.
한데 이 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어쨌거나 호법당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면 무림맹은 남궁가가 거의 장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현재 적랑단이 속한 멸마당은 거의 중립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이번 사건으로 한층 더 신임 맹주 쪽으로 기울었으리라.
그런데 호법당이 버텨내질 못하면 줄줄이 다른 요직의 인사들도 무너지면서 맹의 실세가 완전히 남궁가로 넘어가게 되리라.
‘어쩔 수 없이 용상회를 열어야만 하는 것인가?’
우선 호법당주를 지킬 수는 없다.
운이 좋아 목숨을 건진다고 하더라도 맹에서 영구 추방을 당하리라. 대신 다른 조직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다행이다.
“현재 위태로운 기관이 어디인가?”
유백랑이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어느 곳 하나 안심할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묵 맹주님과 친분이 깊었던 곳은 모두 흔들리고 있습니다. 호법당은 아시는 바와 같고, 본 당 역시 진소홍이라는 계집이 들쑤시고 다니면서 온갖 문제를 다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자네는 그래도 꼼꼼한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유백랑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하지만 억울한 생각이 없진 않았다.
꼼꼼하기로 따지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신이다. 한데 진소홍은 정말이지 귀신같이 틀린 부분을 찾아냈다.
주판 한 알 튕기지 않고도 암산만으로 그 천문학적인 금액을 척척 계산해 버리니 대처할 틈도 없었다.
유백랑이 시름 섞인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약천당과 철심당, 그리고 정검당도 흔들고 있습니다.”
“허어.”
우위광의 뺨이 부들거린다.
그 세 군데 역시 유난히 묵천악과 친분이 깊었던 곳이다.
한마디로 남궁가가 아예 작정을 하고 물갈이를 하는 중이라고 봐야 했다.
‘결국 용상회를 열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는 것인가?’
이대로면 호법당이 무너진다.
까딱하다간 두 손 놓고 실권을 넘겨줘야 할지도 모를 일.
“결국…… 용상회를 열어야겠군.”
“죄송합니다, 원주님.”
“용상회를 열어도 자네들 자리를 어디까지 보전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네. 다만 구파일방을 초빙하여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일세. 자네는 이제부터 남궁가의 허점이 될 만한 부분이라면 뭐든 알아내도록 하게.”
“분부 받들겠습니다!”
“명심하게. 용상회는 최후의 보루였네. 한데 이젠 피할 수 없게 됐으니, 우린 그때 확실히 남궁가를 찍어 눌러야 해.”
“물론입니다.”
“그 녀석들은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려고 할 거야. 우린 최대한 버텨야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제발 더 이상 설레발치지 말게. 뭘 하든 먼저 보고를 하란 말이야. 또 이런 실수를 하면 나도 더 이상 손을 쓸 방도가 없어.”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가보게.”
원주의 축객령에 유백랑이 공손히 절을 하고는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우위광은 다 식어버린 차를 홀짝이고는 중얼거렸다.
“남궁천. 결코 네놈 뜻대로 흐르게 두진 않을 것이다.”
* * *
입춘이다.
겨우내 얼었던 연못도 이젠 거짓말처럼 녹아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맹주전 후원을 거닐던 남궁검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전각 쪽을 돌아보았다.
마침 전각을 끼고 남궁천이 걸어오고 있었다.
“왔느냐?”
“예, 할아버지. 마침내 늙은 오소리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궁둥짝을 걷어찬 모양이구나.”
“예. 이젠 굴에서 버티기만 해선 다 죽게 생겼으니까요. 기어 나와야죠.”
“하면 구파일방에도 기별을 넣었겠군.”
“예, 그것까진 막을 명분이 없어서 가만히 두었습니다.”
“잘했다. 너라면 그 부분도 염두에 두고 있을 터.”
언제부턴가 남궁검은 남궁천을 자신보다 더 믿고 있는 듯했다.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하나 구파일방을 가벼이 봐서는 안 된다. 그들 중 몇 명이나 참석을 할지 알 수 없으나, 참석자들은 모두 장로원과 긴밀한 관계일 것이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거센 바람도 잘만 이용하면 우리가 탄 배를 빠르게 나아가게 하지 않겠습니까?”
남궁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그럼 나는 즐기는 마음으로 지켜보겠다.”
“예, 할아버지.”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남궁검은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웠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이 아이를 신뢰하게 된 것일까?
말만 내뱉은 게 아니라 정말로 기대하는 마음으로 용상회를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까지 이 풍랑을 일으킨 것은 결국 용상회라는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풍랑을 이용해서 용상회까지 잘 도달했다.
하나 용상회는 또 하나의 산이나 다름없다.
자신의 손자는 기세등등한 구파일방의 수뇌들을 앞에 두고도 잘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그들 중에서는 무림칠성도 있을 텐데 남궁천이 잘 감당할까?
솔직히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선다.
‘선아, 네 아들은 훌륭하게 컸구나. 이 나를 이토록 안심시키는 것을 보면. 어쩌면 너보다 훌륭하게 컸구나.’
빙그레 웃음이 지어진다.
하늘에서 남궁선이 부루퉁해져서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아버지, 저도 충분히 훌륭했다고요!”
그래, 너도 훌륭했지. 너무나 훌륭했지. 내 딸.
괜히 눈시울이 붉혀진다.
남궁검이 연못으로 시선을 던지고는 담담히 말했다.
“천아.”
“예, 할아버지.”
“마음껏 즐겨라.”
“예?”
“구파일방이든, 무림칠성이든. 그게 다 무엇이더냐? 너는 더 대단한 존재다.”
“…….”
“너는 남궁세가 소가주다. 이 남궁검의 손자이며, 천하제일룡이라 불렸던 남궁선의 아들이다. 또한 네 아버지는 썩어가는 천하를 조롱하고 농락했던 전무후무한 대협이었다.”
“……!”
남궁검이 남궁천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니 용상회에서도 즐겨라. 혹여나 돌부리에 걸리면 내가 그 돌부리를 박살 내주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아버지…….”
아, 이 영감이 또 막판에 감동을 주네.
괜히 코끝이 시큰해진 남궁천이 숨을 훅 들이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오늘따라 그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