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난 평화주의자야
허참. 별일이 다 있다.
벼랑 끝으로 떠밀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한 걸음만 물러서면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땐 죽거나 반병신이 될 수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기적처럼 동아줄이 내려왔다.
그것도 뜻하지 않게 부곡주가 내려준 동아줄이다.
부곡주야 나름 제 살길을 찾아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해답이었겠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묘안이 아닌가?
자신이 의뢰한 사실을 가지고 이런 식으로 앞뒤를 짜 맞추다니.
굳이 자신과 대면하지 않아도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설정이다.
어쩌면 이걸로 부곡주는 참형을 피할 수도 있으리라.
자신은 살곡과 손을 잡은 관계로 죄를 물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역시 중형을 선고받진 않을 것이다.
‘그래, 일단 이걸로 됐다.’
갑자기 남궁천과 한배를 타게 됐지만, 그래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이대로면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근신 정도의 수준에서 마무리될 수도 있으리라.
다만 조금 걸리는 것은 장로원이다.
원주는 지금쯤 자신이 남궁천의 뒤를 캐느라 바쁜 것으로 생각할 터다.
하지만 이렇게 한배에 올라탄 사실을 알게 되면 길길이 날뛰리라.
뭐, 그래도 어쩌겠나?
우선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원주가 내려줄 동아줄을 기다리다간 벼랑 끝에서 떨어지게 생겼는데.
나중에 어떻게든 해명하면 될 일이겠지.
‘그래, 이걸로 됐어. 다 된 거야.’
그런데…….
‘넌 도대체 왜 아직도 안 가고 있는 것이냐!’
유백랑이 미간을 푹 구긴 채 눈앞의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남궁천은 유백랑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탁자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와구와구 집어 먹으면서 주접을 떨어댔다.
“키야, 맛이 기가 막힙니다. 천우당 숙수의 요리 솜씨가 초절정급이네요.”
“커흠. 그리 맛있소?”
“암요. 아주 맛있어요. 마음 같아서는 매일 와서 밥을 먹고 싶을 정도네요! 사실 맹주전에서도 밥을 얻어먹어 봤지만, 거긴 숙수가 간을 싱겁게 하더라고요.”
“허허, 싱거운 게 건강에도 좋소.”
“알지요. 하지만 당장 입맛에 안 맞는 걸 어쩌겠어요? 제가 이래 봬도 애새끼 입맛이라서요. 하하.”
‘애새끼 맞으니까.’
유백랑이 내심 떠올린 생각을 속으로 삼키고는 애써 웃음을 지었다.
“이제 어느 정도 드신 것 같은데…….”
“에이, 아직 멀었죠. 이거 먹고 한 접시 더 시키려고요.”
그만 처먹으라고! 여기가 객점이냐! 제발 좀 꺼지란 말이다!
솔직히 유백랑은 이 자리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가까스로 벼랑 끝에서 떠밀리지 않았지만, 눈앞에선 굶주린 호랑이가 자신을 앞두고 맛있게 식사하는 느낌이랄까?
남궁천은 본인이 말한 대로 삶은 닭고기 요리를 한 접시 더 시키더니 야무지게 뜯어 먹고는 부푼 배를 두드렸다.
“꺼억. 잘 먹었다.”
“허허, 역시 젊음이 좋소.”
“잘 먹는데 나이가 있나요? 그냥 맛있으니까 먹는 거지.”
“그렇구려. 그럼 이제 슬슬…….”
“후식이 아직 안 나오네요?”
빠직.
이마에 핏대가 선 유백랑이 신경질적으로 돌아보며 외쳤다.
“뭣 하는가! 어서 마실 것을 내어 오너라!”
“예, 예. 나리!”
시녀와 시종들이 서둘러 빈 접시들을 정리하면서 물러갔다. 잠시 후 시녀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들어왔다.
또로로롱.
맑은 찻물 소리가 실내 가득 울린다.
“자, 드시오.”
“예,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남궁천이 찻잔을 들어 향기를 맡다가 느긋하게 한 모금 들이켰다.
“좋군요.”
“마음에 들어 다행이오. 내 특별히 남궁 단주의 고향 특산물인 황산모봉(黄山毛峰)으로 준비했소.”
“그런 세심한 배려라니. 감동입니다.”
“그럼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볼까요?”
“으응?”
일어나는 게 아니고?
이제야 본론을 꺼낸다고? 또 할 말이 남았어?
유백랑이 불길한 생각을 억누르며 바라보자, 남궁천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사실 맹에서는 유 당주님의 처벌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
“안타까운 일입니다. 유 당주님은 절 지키고 맹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선 것이니까요.”
“이해해 줘서 고맙소.”
“하지만 역시 안천길의 범행에 일부 가담한 정황과 살곡에게 청부 살해를 의뢰했다는 점은 불리하게 적용되는 게 사실입니다. 하필 장부에 거래 기록까지 고스란히 남아 버려서 말이죠.”
핵심은 이거였구나.
하나 자신은 남궁천에게 약점을 잡힌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서 똥물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진흙탕 물 좀 묻는 걸 감수하는 게 나으리라.
유백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소. 사실 나도 수개월 근신을 할 수도 있다는…….”
피식.
남궁천이 순간 차갑게 웃었다.
유백랑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방금 뭔가 비웃은 것 같은데.’
하지만 남궁천은 내색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안타깝게도 근신 정도로 그칠 수준이 아닙니다. 다른 문제도 있어서요.”
“다른 문제라면……?”
“최근 진소홍 대주가 천우당의 장부를 면밀히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아시겠지요?”
빌어먹을. 왜 그 이야기가 안 나오나 했다.
유백랑이 욕지거리를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남궁천이 말을 멈추고 유백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뭐?
유백랑이 어정쩡한 표정으로 마주 보자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많이 해 드셨더라고요.”
“끄음. 그건…….”
“압니다. 묵천악 시절이었으니까요. 자고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인데. 윗물이 시궁창이니 아랫물도 똥물일 수밖에요. 그건 유 당주님 잘못이 아니죠. 위에서 시궁창 물을 흘려보낸 새끼가 잘못한 거죠.”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나?
어쨌거나 대답을 하지 않는 쪽이 더 낫다는 판단에 유백랑은 가만히 입을 다문 채 남궁천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남궁천이 과장된 몸짓을 하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저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천우당을 운영하면서 야금야금 비자금을 챙긴 것은 훗날을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고요.”
“훗날을……?”
“바로 오늘 같은 날을 말이죠. 언젠간 묵천악이 무너질 날을 대비해서 비자금을 쟁여놓았다가, 때가 되면 기꺼이 맹을 위해 아낌없이 쓰겠노라.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지요. 자, 제 말이 틀렸습니까?”
남궁천이 어딘지 광기까지 머금은 눈빛으로 빤히 쳐다본다.
‘이 새끼…… 처음부터 이럴 속셈이었구나!’
이쯤 되자 어디부터 남궁천이 안배를 한 것인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하나 지금은 자신이 철저한 약자다. 우선은 남궁천이 무슨 생각을 가진 것인지 들어볼 심산으로 식은 차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입을 다물었다.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며 찻주전자를 들어 유백랑의 잔에 따라주었다.
“저는 유 당주님의 그런 숭고한 정신에 감탄했습니다. 해서 가급적 유 당주님을 가까운 곳에서 자주 뵙고 싶습니다.”
그래야 네가 가진 돈을 뽑아먹지 않겠냐?
물론 뒷말은 남궁천의 가슴에서만 맴돌았다.
유백랑을 공범으로 내몰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혹여나 참형을 당하게 되면 묵천악의 막대한 비자금을 찾을 방도가 없어진다.
그렇다고 영구추방 같은 중형을 내리면 돈과 함께 잠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바엔 곁에 두고 피를 말리듯 조금씩 조금씩 뽑아먹는 게 더 나으리라.
한마디로 유백랑은 앞으로 남궁천에게 우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이쯤 되니 유백랑도 남궁천의 심중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는 물었다.
“적랑단주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떠날 때가 언제인지 아는 자의 뒷모습은 아름다운 법이지요.”
유백랑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스스로 물러나란 거요?”
“아주 물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당주님을 가까이에서 계속 뵙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잘못을 덮고 특혜를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적당한 선이라면?”
“한 계단만 내려가시지요.”
남궁천이 노골적으로 말하자, 유백랑이 눈을 가늘게 여몄다.
“각주 자리로?”
“문책성 발령이 될 겁니다. 하나 스스로 먼저 말씀하신다면 더 좋겠지요.”
“…….”
“전 용상회에서 막 당주님 모가지가 잘려 나가고, 시뻘건 피가 막 여기저기 튀고, 또 시종들은 잘려 나간 머리통 들고 왔다 갔다 하고, 어휴, 이런 거 싫거든요. 제가 평화주의자라서. 그러니 당주님 스스로 멋지게 한 단계 내려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반협박이나 다름없다.
‘이놈, 애초에 날 멋대로 주무를 생각이었구나.’
이제야 울화가 치밀지만 그래도 살고 볼 일이다. 어떻게든 목숨은 부지해야 하지 않겠나?
유백랑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하면 당연히 소속을 옮겨야 할 테고. 그럼 어디로……?”
“그건 용상회에서 알게 되실 겁니다.”
“끄음.”
유백랑이 착 가라앉는 눈빛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뭘 고민하나? 당신한텐 어차피 선택지가 없을 텐데.’
* * *
마침내 용상회가 열리는 날이 밝았다.
무림맹은 아침부터 손님을 맞이하느라 분주했다.
무림맹 지객당 의연각(義聯閣)이 모처럼 북적거렸다.
누구라도 의연각 안마당을 슬쩍 들여다보았다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으리라.
이른 아침에 가장 일찍 도착한 이는 바로 청성파 장문인인 정극진인(靜極眞人)이었다.
바로 이어서 도착한 사람은 아미파의 장로인 정혜사태(靜慧師太)였는데, 그녀를 수행하는 비구니가 두어 명 더 있었다.
다음으로 도착한 이는 곤륜파의 장문인인 청풍진인(淸風眞人)이었다. 유난히 눈썹이 길고 짙은 게 특징이었는데, 서역의 사람들처럼 부리부리한 눈이 특징이었다.
이들만 해도 강호에 내로라는 인재들이었다.
이후로 해가 중천에 이르자 무당파의 장로인 덕양진인(德養眞人)이 도착했고, 점창파 장문인 능허자(能虛子)가 제자들을 이끌고 들어섰다.
이만해도 어지간한 무인들은 명패도 내밀지 못할 만큼 쟁쟁한 절세 고수들이었다.
특히 청풍진인과 덕양진인은 무림칠성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존재 자체만으로 어딘지 다른 기운을 풍기는 듯했다.
이로써 봉문을 한 문파를 빼면 구파일방 중에서는 공동파와 개방만 제외하고 모두 온 셈이었다.
워낙 쟁쟁한 사람들이 모여들자 지객당 의연각은 때아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맹 내의 무인들은 물론, 무한에 있던 무인들과 양민들까지 이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몰려온 것이다.
그 바람에 의연각주를 비롯한 관계자들만 죽을 맛이었다.
그렇게 기웃거리는 사람들을 돌려보내느라 끙끙거리는데, 마침 인파를 헤치며 남궁천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거, 좀 비켜주세요. 원숭이 구경도 아니고, 다 같은 사람끼리 굳이 이렇게 몰려와서 볼 건 없잖아요?”
몇몇 이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물러났다.
마침 의연각주 앞에 다다른 남궁천이 안을 힐끔 보고는 물었다.
“다들 도착하셨는지요?”
“개방 장로가 참석한다고 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소.”
“그렇군요. 그럼 우선 제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의연각주가 물러서자 남궁천이 의연각 안마당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의연각은 전각이 세 채 있었는데, 방은 총 열 칸이었다. 각 방에는 초빙한 구파일방의 수뇌 인사들이 있을 터였고, 안마당에는 그들을 수행하는 제자들만 서 있을 뿐이었다.
남궁천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다.
“본 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지금 맹이 워낙 바빠서 말입니다! 한 시진 후에 장로전에서 용상회가 진행되니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바쁘신 와중에 본 맹을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에 마침 각 방에서 수뇌인사들이 걸어 나왔다.
하나같이 숨 막힐 듯한 기운을 풍기는 자들.
그들이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남궁천을 보았다.
‘저 녀석이 그 말이 많은 남궁천인가?’
한편 수뇌인사들의 면면을 훑어본 남궁천이 씨익 웃으며 포권했다.
“그럼 어르신들,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