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96화 (395/508)

396. 난 평화주의자야

슈우우우욱, 콰당탕탕!

엉망진창이다.

탁자와 의자가 부서지고, 엎질러진 국물과 음식은 안천길과 함께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헝클어진 안천길의 머리 위에서 국수 면발이 흘러내린다.

“끄르륵……!”

어찌나 세게 맞은 것인지 몸에 미약한 경련이 일어나면서 입에 거품을 문다. 눈은 허옇게 뒤집혔다.

자신이 알아서 해결하겠다며 호언장담했던 안천길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다른 수뇌인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몸이 굳어버렸다.

순간 남궁천이 화들짝 놀라면서 안천길에게 달려왔다.

“이런! 안 당주님! 괜찮으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흔들흔들!

안천길의 마구 흔들렸다. 저러다가 목이 부러지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로 흔들린다.

“저어, 남궁 단주. 그보단 저 괴한들을 좀 어떻게…….”

각주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남궁천은 들리지도 않는지 안천길의 뺨을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짝! 짜악! 짜악!

“안 당주님! 깨어나십시오! 이런 곳에서 이렇게 쓰러져 계시면 어쩝니까? 어서요!”

짜악! 짜악……!

남궁천의 손길이 어찌나 매섭게 보이는지 지켜보던 이들이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러다가 더 죽겠는데?’

‘저거…… 깨우는 거 맞지?’

묘한 위화감 속에서 남궁천의 손찌검이 계속되자, 마침내 안천길이 의식을 차렸다.

“끄으음. 남궁 단주……?”

“정신이 드십니까?”

“아…… 어떻게 된 거요? 아니, 그보다 왜 아직 살아 있소?”

무심결에 말을 뱉은 안천길은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다행히 남궁천은 다른 뜻으로 알아들은 듯했다.

“왜 아직 살아 있다뇨?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당주님이 죽으면 안가장의 식솔들은 어쩌라고요.”

“끄음…… 그, 그렇지.”

안천길이 대충 얼버무리고 넘기는 사이에 괴한이 다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 이번엔 지켜보던 유백랑이 그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멈춰라! 네놈들은 누군데 감히……!”

퍼억!

이번에도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괴한이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유백랑 앞에 나타나더니 무심히 주먹을 쥔 채로 훅 내뻗는 게 아닌가?

코뼈가 부러지며 날아간 유백랑도 그대로 탁자를 부수며 나뒹굴었다.

쿠당탕탕!

“이런……!”

“저, 저……!”

많은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괴한을 가리켰다.

그들 모두 일선 현장에서 물러나 당주나 각주로 지내면서 몸이 굳은 지 오래된 자들이었다.

그래도 한때는 무공 한가락 하던 자들이었는데, 단 일격에 날아가는 안천길과 유백랑을 보니 복면인을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자는 남궁천이었다.

그런데 남궁천은…….

“안 당주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저 괴한이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을 좀 해결해주세요!”

“아, 아니…… 나는 이제…….”

“자자, 여긴 안가장이 아닙니까? 손님이 어찌 주인 행세를 하면서 나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옆에서 부축해 드릴 테니 어서 저 괴한을 사로잡든지, 물리치시든지 해주세요!”

“아니…… 나보다는 남궁 단주께서 직접…….”

하지만 안천길이 뭐라고 말을 내뱉기도 전에 복면 쓴 괴한이 빛살처럼 또 날아들었다.

“우앗!”

남궁천이 얼른 안천길 등 뒤에 숨었다.

졸지에 또 전면에 나서게 된 안천길이 내심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아니, 이 개새끼야! 왜 내 뒤로 숨어! 그러고도 네가 적랑단주냐!’

하나 안천길도 이대로 계속 당할 수는 없었다.

처음 두 번이야 예상과 달리 상대가 무지막지한 기습을 펼쳤기에 당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현장에서 몸을 굴렸던 무인이 아니던가?

차아앙!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든 안천길이 눈빛을 매섭게 빛내며 괴한을 찔러갔다.

슈까앙!

한 줄기 빛이 번쩍이면서 금속성이 밤의 허공을 찢었다.

츠츠으읏!

일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물러나자 괴한의 눈빛에 잠깐 이채가 서렸다.

안천길이 가까스로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괴한을 노려보았다.

‘적당히 좀 하자고, 적당히!’

하지만 괴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타닷!

순식간에 몸을 날려 온 괴한이 안천길의 요혈을 향해 검을 내질러왔다.

‘아니, 이 미친 새끼는 암살 대상이 누군지도 모르는 거야?’

짜증이 솟구쳤지만 어쩌겠나?

당장 눈앞에서 날아드는 검은 피하고 볼 일이 아닌가?

슈깡! 깡! 까강!

금속성이 연이어 터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서 어지러운 공방전이 이어졌다.

생각보다 수준 높은 싸움이 이어지자 사람들이 일순 넋을 놓고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된 안천길의 무공은 한계가 있었다.

또한 복면인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고강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안천길이 점점 위기로 내몰렸다.

‘크읍! 젠장! 이 멍청한 새끼! 부곡주는 뭐 하는 거야? 이럴 때 남궁천이라도 죽여야 할 것 아냐!’

한껏 신경질이 난 안천길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판사판으로 몸을 던져갔다.

설마하니 의뢰자인 자신을 죽이기야 할까, 라는 생각으로 검을 내지른 것이다.

한데 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안천길의 품으로 파고들며 검을 베어오는 게 아닌가?

“헉!”

뒤늦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안천길이 얼른 몸을 뒤틀며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상대의 검신이 사선으로 솟구쳐 올라오는 중이었다.

촤아아아악!

“크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바람개비처럼 회전하면서 날아간 안천길이 털썩 바닥에 쓰러지자, 일순 장내가 침묵에 잠겨 들었다.

안천길은 쓰러진 채로 자신의 가슴께를 어루만져 보았다.

‘이 미친……! 살곡 새끼들!’

가슴이 사선으로 베여 피가 철철 흐르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성을 잃은 안천길이 벌떡 일어나더니 악사들이 있는 곳을 보며 소리쳤다.

“야이, 개새끼야!”

엉뚱한 곳으로 고함을 내지르니 지켜보던 수뇌 인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쳐다보았다.

“으응?”

“뭐지……?”

그도 그럴 것이 복면인에게 당해놓고서 애꿎은 악사들을 향해 욕지거리를 쏟아내니 이상하지 않은가?

무심결에 분을 이기지 못해 소리쳤던 안천길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복면인 쪽을 다시 휙 돌아보았다.

“거기 있었구나! 이 새끼!”

어설프게나마 수습을 하며 소리치는데, 복면인이 다시 저벅저벅 걸어오는 게 아닌가?

‘이 미친놈이 지금 진짜로 누굴 제거해야 하는 건지 모르는 건가? 아니면 이목을 내게 집중시키는 사이에 부곡주가 남궁천을 노리려는 건가?’

한데 이상한 건 부곡주가 아까부터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엉덩이를 연신 들썩이면서 꿈쩍을 하긴 하는데 뭔가 이상하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이 괴한이 마침내 안천길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사태가 그 지경이 되도록 수뇌인사들 중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다들 왜 멀뚱멀뚱 구경만 하나?

안천길은 묘한 분위기를 살피다가 이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남궁천.

그렇다. 남궁천이 전혀 나서질 않고 있지 않나?

묘한 상황이다.

가장 어린 남궁천이 마치 이 연회장에서 제일 높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움직이지 않으니 다른 이들도 괜히 그 분위기에 눌려 섣불리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이 보지 못한 사이에 남궁천이 누군가 나서는 것을 말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자 안천길도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안천길이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부들부들 떨리는 검을 들어 복면인을 가리켰다.

“네놈…… 누구냐?”

조금 전에는 연극이었지만, 지금은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다.

질문을 던지는 안천길의 목소리에 비장함까지 묻어났다.

마침내 바로 앞에 다가서서 멈춘 괴한이 복면을 거칠게 벗었다.

다음 순간 수뇌인사들 사이에서 깜짝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안천길 역시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뜨고는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자, 자네는……?”

“이렇게 뵙습니다, 당주님.”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남자는 다름 아닌 비량이었다.

한때 비선향의 일원이었던 자.

하지만 이후 한직에 머물러 있다가 교관의 자리를 거쳐 이제는 적랑단 제일대주가 된 자!

그런 비량이 복면을 쓰고 안천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수뇌인사들도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보며 수군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비량 대주가 왜 갑자기 안가장을 친 거야?”

“그럼 다른 자들도 다 적랑단원들인가?”

그 의문을 해소해 주겠다는 듯 복면인들이 일제히 복면을 벗어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훤히 드러난 얼굴은 모두 적랑단 제일대원들이었다.

이쯤 되자 안천길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남궁천을 쏘아붙였다.

“남궁 단주! 이게 지금 무슨 짓이오! 단원들 단속을 어찌하길래……!”

짜아악!

순간 남궁천이 안천길의 뺨을 올려붙였다.

챙그랑……!

누군가 술잔을 떨어뜨렸다.

남궁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휘청거리는 안천길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았다.

“크윽! 이게 무슨…… 쿠웁, 쿠웨에엑!”

그러잖아도 조금 전에 입었던 내상에 감정까지 격해지니 다시 한번 구토가 치밀어 올랐다.

한 차례 각혈을 해댄 안천길이 뺨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남궁천!”

“닥쳐.”

짜아악!

남궁천이 다시 한번 안천길의 뺨을 그대로 후려쳤다.

안천길은 머리 위에서 별이 뱅글뱅글 도는 것만 같았다.

마침 비량이 술렁거리는 수뇌인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호법당주 안천길은 살곡을 통해서 적랑단주를 청부 살해하려고 한 죄를 물어 압송하겠소!”

“그런……!”

“맙소사.”

수뇌인사들이 사색이 된 표정으로 술렁거렸다.

안천길이 눈이 뒤집혀서 소리쳤다.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난 그런 적 없어!”

“닥치라니까.”

짜아악!

다시 한번 남궁천이 뺨을 후려치자 안천길이 목이 휙 꺾이면서 축 늘어졌다.

“끄으으윽…….”

가만히 물러서 있던 비량이 품에서 장부 하나를 꺼내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펼쳐 보였다.

“이것은 본 단이 입수한 살곡의 거래 장부입니다. 안천길이 살곡의 부곡주와 거래한 내용이 세세히 적혀 있지요.”

상황이 살벌하게 흐르자 수뇌인사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누구도 쉽사리 나서지 않았다.

이런 순간에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남궁천이 뱀 같은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내용에 의하면 오늘 내 목을 노릴 살수 새끼가 이 안에 있다고 하던데…….”

괜히 남궁천과 눈이 마주친 수뇌인사들은 잘못한 것도 없이 등골이 오싹해지곤 했다.

그렇게 주변을 한참 살피던 남궁천이 마침내 부곡주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갔다.

악사들이 저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남궁천이 거침없이 다가가더니 부곡주의 인피면구를 확 잡아 뜯는 것이 아닌가?

찌이이익!

“헉!”

“저런!”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서 헛바람을 삼켰다.

졸지에 얼굴이 드러난 부곡주가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의뢰는 받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부곡주가 너무나 순순히 인정을 하자 안천길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중에도 눈알이 뒤집히는 듯했다.

‘아니, 저 멍청한 새끼가! 살곡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환장했나!’

어느 순간에 있어서도 살수들은 의뢰자와 의뢰 내용을 함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걸 지키지 못한다면 그 조직은 역사에서 지워질 수밖에 없다.

한데 살곡이 지금 모든 사실을 이실직고한 것이다.

‘저 새끼, 저거 살수 맞아?’

정말이지 뒷목을 잡고 쓰러질 노릇이 아닌가?

한데 부곡주는 여기에서 한 술 더 떴다.

쿵!

갑자기 바닥에 이마를 박은 부곡주가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닌가?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모든 걸 소상히 고해 바치겠습니다!”

저, 병신……!

안천길은 비로소 모든 게 끝장났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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