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35화 (334/508)

335.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들

“어…… 어서…… 오십시오.”

귀왕이 돌처럼 굳어서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눈앞의 사내.

시커먼 흑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어깨에는 묘한 옥안을 가진 까마귀가 앉아 있다.

얼핏 보면 거지처럼 초라한 행색이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확실히 범상치 않다.

신룡객잔을 찾은 여신우는 귀왕을 힐끔 쳐다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궁천을 만나러 왔는데.”

말 한마디 한마디에 스산한 기운이 배어 있는 것만 같다.

딸꾹질을 한 귀왕이 괜히 주눅이 들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게……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십…….”

“형님.”

마침 귀소이 하나가 귀왕에게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찌른다.

귀왕이 흠칫거리고는 옆을 돌아보며 나직이 윽박질렀다.

“뭐야?”

“아무리 그래도 우리 설정이 있는데 상대에 따라 이렇게 행동하시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우리 설정……?”

“예, 그게 신룡객잔의 매력인데…….”

“아…….”

“게다가 공자님의 손님이라면 더욱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야 공자님도 면이 서지 않겠습니까요?”

“흐음.”

그제야 귀소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귀왕이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그렇다.

여기가 어딘가?

바로 귀왕객잔에서 신룡객잔으로 거듭난 곳이 아닌가?

물론 상호명이 바뀐 건 탐탁지 않지만, 어쨌거나 무한의 명소가 된 그 신룡객잔이다.

무한에 가면 황학루보다 신룡객잔에 들르라는 그 신룡객잔이란 말이다.

한데 자신이 이렇게 쫄아서야!

마음을 다잡은 귀왕이 턱을 빳빳하게 들고는 여신우를 노려보았다.

물론 여신우가 눈살을 찌푸리자 슬쩍 시선을 외면하긴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거친 목소리를 유지했다.

“내가 네 노예냐? 이 새파란 새끼야. 약속이 있는 거면 알아서 찾아라!”

그렇다.

이게 바로 무한의 신룡객잔이다.

산적이 운영하는 패기 넘치는 객잔!

한껏 턱을 치켜든 귀왕이 눈을 연신 부라렸다. 물론 그 순간에도 다리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귀왕을 바라보던 여신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미친 건가?”

“미, 미치긴 누가 미쳤다는 거냐? 이 병신아! 어, 어서 사람이나 찾아봐라! 주문할 음식이 있으면 지금 시키고!”

여신우가 눈을 가늘게 뜨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귀왕과 귀소이가 후다닥 물러나면서 방어 태세를 갖췄다.

“뭐, 뭐냐? 남의 가게에서 행패냐!”

“싸, 싸우자는 거냐! 그냥 죽진 않는다앗!”

손발을 마구 휘젓는 귀왕과 귀소이.

두 사람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여신우가 그대로 손가락으로 까마귀를 가리켰다.

“반려동물.”

“뭐?”

“반려동물이 같이 들어가도 되나?”

“반, 반려동물……?”

귀왕이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여신우의 어깨에 앉은 옥안영오를 보았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가 없었기에 귀왕이 반사적으로 귀소이를 돌아보았다.

“어쩌지?”

“어쩌긴요? 당연히 안 되죠! 누가 밥 먹는 곳에 까마귀를 데려옵니까? 오늘이야 다들 비무 대회 보러 가서 손님이 없지만, 다른 날이었으면 손님들이 불쾌하게 여겼을 겁니다. 게다가 한 번 예외를 두면 자꾸 그런 인간들이 생길 거고요. 저는 반댑니다.”

“흐음.”

침음을 흘린 귀왕이 여신우의 표정을 힐끔 살폈다.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는 여신우.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움찔한 귀왕이 귀소이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네가 말할래?”

“에이, 형님이 하셔야죠. 그래도 책임자이신데.”

“니미럴, 나는 책임만 지고 혜택은 없는 거냐?”

“그건 또 뭔 소리래요?”

“아니다. 됐다. 관두자.”

귀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여신우가 약간은 짜증스러운 투로 다시 물었다.

“데리고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는데.”

“안 돼, 이 새끼야! 여기가 무슨 동물원이야? 우리가 까마귀 모이까지 준비하는 줄 알아? 개가 들어오면 개밥이라도 주는 줄 알아? 말이 오면 당근이라도 주랴?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자빠졌어?”

“…….”

“…….”

스윽.

여신우가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귀왕과 귀소이가 동시에 물러났다.

“싸, 싸우자는 거냐!”

“…….”

하지만 여신우는 예의 그 시큰둥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더니 손으로 옥안영오를 쓰다듬어 준 다음 문을 열어 밖으로 보냈다.

“가서 비무 대회 구경이나 하고 오너라.”

까아아악!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옥안영오가 길게 울음을 터뜨리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쯤 되자 귀왕은 조금 자신감이 붙었다.

겉으로 풍기는 분위기와 달리 상대가 별 볼 일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게다가 지금 이 층에는 남궁천이 있지 않은가?

왠지 기세가 등등해진 귀왕이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리며 본업에 충실했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어 처먹네. 어서 가봐라. 주문은 빨리 하도록 하고. 귀찮으니까.”

“…….”

“뭐, 뭐, 이 새끼야? 뭐, 뭘 꼬나봐?”

순간 여신우의 손에 사이한 기운이 맺히기 시작했다.

곧이어 살기가 폭사하는 순간,

“여신우. 노닥거리지 말고 올라 와라.”

문득 남궁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공을 끌어 올리던 여신우가 흠칫거리고는 이 층을 바라보았다. 그가 짧게 혀를 차고는 귀왕을 힐끔거렸다.

“명줄이 길군.”

차갑게 말을 남긴 여신우가 송장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는 귀왕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도 귀왕은 한참이나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형, 형님…… 괜찮으십니까요?”

귀소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자, 그제야 귀왕이 제자리에 허물어졌다.

“흐어어. 순간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무슨 저런 괴물이 다 있어?”

“그래도 잘하셨습니다요! 형님이 자랑스럽습니다!”

따악!

귀왕이 귀소이의 뒤통수를 차지게 후려치고는 눈알을 부라렸다.

“입만 산 새끼 같으니라고. 으휴, 네놈이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귀왕이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고는 이 층을 올려다보았다.

한편, 이 층으로 올라와 남궁천에게 다가간 여신우가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혼자 있군.”

“뭐, 대단하신 분을 영접한다고. 주렁주렁 달고 다닐 필요 없잖아?”

남궁천의 말에 여신우가 냉소를 지었다.

남궁천이 그런 여신우를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그래서 날 보자는 이유는?”

“이제 한 달 남짓이다. 진척은 있나?”

“보다시피.”

남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신우가 착 가라앉은 눈길로 남궁천을 응시했다.

“맹주가 다친 데 하나 없이 멀쩡하던데.”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지. 서두르다가 다 차려진 밥상 엎는 수가 있어.”

“밥상 차리는 걸 두려워하는 건 아니고?”

여신우의 말에 남궁천이 피식 웃었다.

“왜 이러실까? 오랜만에 만나서 웃으며 얘기하면 좋을 텐데.”

“애송아. 내가 너를 상대해 주니 뭔가 착각…….”

“씨불이지 말고 마셔라.”

남궁천이 술잔을 내밀더니 마시던 술을 채워주었다.

여신우가 눈에 힘을 주고는 노려보았다.

“겁이 없군.”

“알면 조심해야지.”

“뭐라?”

“겁이 없는 상대를 만날 땐 항상 조심해야지. 진짜 강자든, 미친놈이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건 매한가지니까.”

피식.

여신우도 더는 분위기를 잡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확실히 남궁천은 예상 밖의 인물이다.

이런 대화를 보통 후기지수가 나눌 수 있는가?

말만 몇 마디 섞었을 뿐이지만, 마치 강호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고수 같지 않은가?

여신우가 난간 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입을 열었다.

“선금을 적지 않게 주었다. 진척이 있어야 우리도 신뢰를 할 수 있어.”

“그래서 지금 비무 대회를 하고 있잖아. 조금 있으면 결승이야. 사람이 기다릴 줄도 알아야지.”

“준결승은?”

“상대가 기권했어.”

사실이었다.

남궁천이 준결승에서 비무를 치렀어야 할 상대는 비량이었다.

하지만 비량은 제자에게 검을 겨눌 수 없다는 핑계로 기권한 상황.

그 때문에 오늘 비무하는 패력궁과 유현 중 승자가 이후 남궁천과 결승을 치르게 된다.

하나 여신우의 반응은 냉랭했다.

“네놈이 적랑단주가 되는 것에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알 수가 없지. 어쨌거나 네놈은 맹주의 편에서 본 련과 싸웠던 놈이니.”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도 있는 게 세상 이치잖아. 맹주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인 자야. 걱정할 필요 없어.”

“과연 진심은 어떨지?”

“거, 인간에 대한 불신이 아주 팽배하네.”

여신우가 냉소를 짓고는 술잔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읊어보셔.”

“네놈이 기간 내에 맹주를 죽이면 잔금을 치르겠다.”

“그건 당연한 거고.”

“단, 네놈이 실패하면 위약금으로 다섯 배를 물도록.”

“와아, 이거 완전히 신종 사기 같은 거네.”

“왜? 자신 없나?”

“그런 문제가 아니지. 내가 갑자기 계약에도 없던 내용에 동의해야 할 이유가 뭐지?”

“원하는 게 있나?”

“말하면 들어줄 건가?”

“어디 말해봐.”

여신우가 술잔을 들려는데, 남궁천이 마침 그 잔을 탁 잡았다.

여신우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남궁천을 보았다.

구오오오오.

순간 여신우가 공력을 운기하자 술잔에 담긴 술이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남궁천도 공력을 운기하면서 술잔을 내리 눌렀다.

두 사람의 공력이 술잔을 사이에 두고 격렬하게 부딪쳤다.

여신우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 정도로 공력을 운기하면 술잔이 깨질 수밖에 없다.

한데 술잔이 멀쩡하다.

심지어 요동쳐야 할 술도 잔잔하기만 하다.

‘한낱 후기지수가 이 정도로 세밀하게 공력을 조절할 수 있다는 건가?’

그야말로 운공의 기재가 아닌가?

그러고 보니 최근 남궁천이 초견파공안의 재능을 가졌다는 말이 떠돌던데.

그게 사실인 걸까?

남궁천이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일단 조건부터 확인하지.”

“말해라.”

“무슨 수를 쓰든지 내가 맹주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 동의하나?”

“동의한다.”

“내가 기간 내에 죽이지 못하면 선금의 다섯 배를 위약금으로 지불한다.”

“그렇다.”

“그럼 기간 내에 성공하면 마찬가지로 선금의 다섯 배를 내셔야지.”

“…….”

“싫으면 말고.”

“한 가지.”

“읊어보셔.”

“어떤 경우에도 네놈이 죽이지 못하면 위약금을 지불해야 한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예를 들면?”

“말 그대로다. 네놈 손에 죽은 게 아닐 경우, 네놈에게 우리가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지. 가령 맹주가 오늘 밤 자다가 돌연사라도 한다거나.”

이럴 줄 알았다.

남궁천이 내심 입매를 치켜올렸다.

이게 바로 류난의 방식이니까.

말의 틈새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것.

‘여전히 유치한 장난을 하는군.’

남궁천이 짐짓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한데? 그런 경우에도 위약금이라니. 어쨌든 두 달 안에 죽었으니 좋은 것 아닌가?”

“그렇더라도 본 련이 너에게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단 말이다. 오히려 선금을 준 본 련이 손해를 보는 거니까.”

“그래서 위약금을 다섯 배나 내라?”

여신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남궁천이 헛웃음을 짓다가 손을 치웠다.

“굉장히 개소리 같지만 받아주지. 맹주는 그렇게 쉽게 죽을 인간이 아니니까.”

“그런 맹주를 죽일 수는 있겠나?”

여신우가 남궁천을 빤히 보며 술잔을 들이켰다.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신 성공했을 때는 다섯 배.”

“좋다.”

남궁천이 무릎을 탁 내려치고는 기분 좋게 소리쳤다.

“귀왕! 지필묵을 가져와라!”

귀왕이 대답하는 사이, 여신우가 품에서 옥구슬을 꺼냈다.

“그럼 기다리는 동안 비무 대회 구경이나 하자고. 나도 패력궁의 실력이 궁금하던 차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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