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334화 (333/508)

334.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들

도(道)란 무엇인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유현의 귓가로 화산파 장문인 태허진인(太虛眞人)의 목소리가 맴돈다.

“자세를 단정히 하고 눈길을 한 곳에 두어 집중한다면 자연의 화기(和氣)가 모여든다고 하였다. 무아지경 속에서 태도를 바로 한다면 도는 너와 한 몸이 될 것이니.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만물을 바라보게 될 때 비로소 너는 도에 이르리라.”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인간이란 잠시도 비어 있는 경우가 없으니까.

하나 진정 비우고 비우면 그곳에는 자아가 아니라, 도가 들어선다는 말이다.

유현은 그렇게 눈을 감고 마음을 비워갔다.

티끌만 한 잡생각이라도 떠오를 것 같으면 곧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속에 떠올린 점 하나를 응시했다.

유현이 응시하는 점은 어둠 속에서 홀로 피어난 매화 한 송이였다.

도란 무엇인가?

지금껏 무(武)를 통해 도를 이루고자 했다. 오로지 무에만 집중하다 보면 자아를 잊고 오롯이 검만 홀로 남을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면 얼핏 도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을 때도 있었다.

하나 그것은 착각이다.

삼 개월 무공을 익힌 자가 제일 무서울 때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 막 도에 발목을 담근 자가 모든 걸 알았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유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궁극의 도였다.

상대는 패력궁 천무류.

항간에는 그가 무림칠성 중 한 명이라는 말도 떠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다.

무림칠성 중 한 명의 정체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다만 언제부턴가 무림에는 일곱 별이 있다는 말이 기정사실처럼 떠돌고 있었다.

천무류가 무림칠성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는 나보다 강하다.’

도를 깨우치지 않는 이상 천무류를 이기는 건 매우 어려우리라.

하지만 마지막까지 해봐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갑자기 도를 깨우치긴 어렵겠지만, 도의 끝자락이라도 보게 된다면 승리의 가능성이 조금은 오르지 않겠나?

“후우우.”

길게 숨을 내쉰 유현이 스르르 눈을 떴다.

대연무장의 어둑한 대기실.

바깥에서는 오늘도 많은 관중들이 모여든 것인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직이 울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현은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처럼 착 가라앉은 눈길로 시커먼 벽만 바라보았다.

‘도란……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 마음을 비우고 한 점에 집중하여 나를 잊으면, 그곳에 도가 들어서리라.’

스스슷.

유현은 자신도 모르게 기수식을 취했다.

다음 순간,

사뿐.

그의 발걸음이 땅에서 떨어졌다.

지금 이 순간 유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자신을 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로지 손끝에 전해지는 검의 감각만이 생동하는 순간이었다.

사락.

매화검이 부드럽게 뻗어간다.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적막함 속에서 유현의 검이 바람처럼 흐른다.

사삭. 사사삭.

대기실에 매화 향이 그득 풍기기 시작했다. 자줏빛 기운이 넘실거리고, 과일을 깎는 것처럼 사각거리는 소리만 기분 좋게 울린다.

유현은 무엇을 위해 검을 휘두르는지도 잊었다.

지금은 그저 검의 의지에 따라 몸을 놀릴 뿐이었다.

검이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검의 의지를 지켜보는 느낌이다.

어찌나 초집중을 한 것인지 유현은 스스로 한 단계 깨달음을 얻어 또 발전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아름다운 춤사위가 계속될 뿐이었다.

사락. 사가각. 사삭!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서 유현 혼자 검무를 춘다.

산들바람이 불고, 매화가 흩날리고, 매화 향이 풍겨 나가고, 기분 좋은 예리함이 공기를 조각낸다.

스스스슥! 샤아아악!

마지막으로 검로를 따라 이동한 유현이 사뿐히 바닥에 착지하더니 부드럽게 검신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철컥.

“후우우우.”

그제야 호흡이 길게 미끄러져 나왔다.

‘나쁘지 않은 기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현은 본인이 무엇을 한 것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것을 자각하기도 전에 뒤에서 기척이 느껴져 돌아섰다.

“누구……?”

“어어……!”

뜻밖에도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다.

팽수혁과 윤종승, 그리고 진소홍까지.

세 사람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팽수혁이 순간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야! 유현 도장!”

“예?”

“너도 지금까지 실력을 숨긴 거였냐?”

“무슨 말씀을…….”

“시치미 떼봐야 소용없다! 이미 다 봤다고! 아니, 뭐 그러니까 우리가 일부러 훔쳐본 건 아니고. 분명히 기척을 울렸는데도 대답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건데…… 아무튼! 지금 그거 뭐야?”

“으음. 괜찮았습니까?”

유현이 태연하게 되묻자, 팽수혁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윤종승과 진소홍을 보았다.

윤종승과 진소홍 역시 유현의 반응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현 도장은 항상 조용하면서도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네.”

“그러게 말이야. 방금 그 굉장한 검무는 뭐였어?”

견습생들의 반응이 격해지자, 유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 별것 아닙니다. 그냥 잠시 몸을 풀려고…….”

“저게…… 그냥 몸을 푼 거라고?”

윤종승의 손이 대기실 벽을 가리켰다.

그 손길을 따라 무심히 눈길을 옮기던 유현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아…… 이런 걸 하고 있었던가?’

사실 검이 이끄는 대로 몸을 놀렸을 뿐이다.

그저 평소와 마찬가지로 검을 수련한다고 생각했다.

딱히 검초나 검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물 흐르듯 움직였다.

한데…… 대기실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아니, 조각이다.

평범하고 삭막했던 대기실 벽에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나무 한 그루가 양각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불어가는 바람에 흩날리는 매화 꽃잎마저 생동하는 듯하다.

“어…… 제가 이런 짓을 했군요?”

유현의 멍한 대꾸에 오히려 견습생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한 걸 모를 정도로 몰두했단 말인가?

정말이지 엄청난 집중력이 아닌가?

‘하긴…… 유현 도장이라면…… ’어? 제가 사람을 이렇게나 죽였군요?‘라고 해도 왠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지만.’

윤종승이 굳은 표정으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유현 도장. 패력궁을 상대로…… 정말 이길 생각이구나.”

그 말에 다른 견습생들도 흠칫거리고는 유현을 바라보았다.

응원하려고 이곳에 모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유현이 패력궁을 상대로 이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잘 싸우고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유현은 아직 후기지수가 아닌가?

남궁천이 워낙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고 다니니, 다른 견습생들에 대한 기대심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하나 후기지수는 후기지수다.

절대고수들과 어깨를 견준다는 패력궁을 상대로 어찌 이길 수 있을까?

그런데…….

유현은 정말 이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종승의 말을 들은 유현의 저 표정이 그 답을 대신하고 있지 않은가?

“예, 이길 생각입니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질 생각이 없습니다.”

유현답지 않게 강인한 의지가 엿보이는 표정이다.

유현이 윤종승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윤 소협도 그런 의지로 팽 소협과 비무를 하신 게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 이기신 거고요.”

“어어? 나, 나? 어…… 뭐, 그, 그렇지? 하하하!”

“어이! 논점을 불필요하게 퍼뜨리지 마라!”

팽수혁이 발끈해서 소리치자, 옆에 선 진소홍도 풋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왜 윤종승은 비무에서 이겨놓고도 팽수혁의 눈치를 보는 건지.

팽수혁이 짐짓 턱을 치켜들고선 거들먹이듯 말했다.

“뭐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이 애송이도 날 상대로 운 좋게 이겼으니까, 네가 패력궁을 이기는 건 그것보다 좀 더 쉬울 거다.”

“하하하. 그런가요?”

유현이 모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그가 부드러운 눈길로 동료들을 보았다.

동료라.

그렇다.

어느새 자신은 이들을 동료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또한 남궁천의 영향일까?

같은 사문도 아니고, 같은 학관 출신도 아니다.

그런데 어느새 끈끈한 동료애가 쌓여 버렸다.

이게 동료의 힘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긴장으로 전신의 근육이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마음이 편안하다.

진소홍이 벽에 양각된 매화나무를 보면서 감탄을 이어갔다.

“기술이 경지에 이르면 예술이 된다더니. 정말 유현 도장의 검술은 너무 아름다운 것 같아.”

“과찬이십니다, 진 소저.”

오글거리는 대화를 더 이상 못 견디겠는지, 팽수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쨌거나 심기일전해서 패력궁을 단숨에 눌러보라고!”

“단숨에는 힘들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서 결승에서는 견습생끼리 한판 붙는 진기한 광경을 보여달란 말이야.”

“노력해 보지요.”

“그나저나 남궁천은? 이 녀석은 안 온 거야?”

“예, 오늘은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어제 남궁 소협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긴 했지요.”

유현의 말에 견습생들이 급 관심을 보였다.

“오, 그래? 남궁천이 뭐래? 승산이 있대?”

“이길 수 있다고 해?”

팽수혁과 윤종승이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물었다.

유현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도에 이르면 이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게 뭐야? 그런 개똥같은 말은 나도 하겠네.”

팽수혁이 투덜거리자, 유현이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또 거리를 좁혀서 싸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 패력궁이 활을 쓸 테니까. 또 다른 건 없었어?”

“또 다른 건…….”

유현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모두들 유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이제 곧 비무가 시작됩니다. 참가자는 대연무장으로 입장해 주십시오!”

“아…… 그만 나가봐야겠네요.”

유현의 말에 다른 견습생들도 아쉬움을 접고는 물러났다.

“그래, 유현 도장. 꼭 이겨.”

“기적을 보여봐!”

“힘내!”

저마다의 응원을 받으며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누군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것은 힘이 된다.

조금 전에 비해 놀랍도록 마음이 진정된 유현이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포권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유현이 가볍게 몸을 돌리고서는 걸음을 옮겼다.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자 밝은 빛이 내리쬐는 대연무장이 나타났다.

동시에 하늘을 떨쳐 울릴 것 같은 함성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우와아아아아! 화산파의 유현이다!”

“매화검의 진수를 보여주어라!”

“무림맹 후기지수는 영원하다! 이겨라!”

고막이 멍멍해질 정도의 함성이다.

하나 유현의 심장은 물속에 잠긴 바위처럼 고요했다.

‘남궁천 소협. 지켜봐 주세요.’

* * *

“정말 안 지켜봐도 되는 겁니까?”

탁자에 음식을 갖다주는 귀왕이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남궁천이 술잔에 술을 따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안 지켜봐도 된다니까.”

“그래도 친하게 지내던 분이신데.”

“괜찮아. 그런 걸로 섭섭해할 인간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뭐 다행이지만요.”

“그리고 오늘 만날 손님이 있다니까 그러네.”

“누군데요?”

“아, 마침 저기 오네. 손님맞이 해라.”

“알겠습니다요.”

귀왕이 부리나케 달려 내려가자, 남궁천이 피식 웃고는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룡 객잔 입구로 한 남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에는 새까만 깃털에 옥빛 눈알이 인상적인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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