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6.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들
까아아악!
대연무장 관중석 꼭대기에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옥빛 눈알이 유난히 반짝이는 옥안영오였다.
수많은 관중이 모여 함성을 내지르는 후끈한 열기에도 옥안영오는 다른 세상에 내려앉은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이따금 굵다란 눈알을 깜빡이면서 이리저리 관중을 훑어보던 옥안영오가 마침내 비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는 듯 단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 아래에 바글바글 모인 관중들은 연신 기대에 찬 목소리로 오늘 치러질 비무에 대해 떠들어댔다.
“드디어 패력궁이구나!”
“지금까지 패력궁의 상대는 대부분 기권하더니 이번엔 아니네?”
“유현 도장이잖아. 강호신룡과 쌍벽을 이룬다던 그 후기지수!”
“화산파였지? 화산파는 봉문했다던데, 저 소도장은 여기 남았군.”
“무림맹 소속인 것도 사실이니까. 그 부분을 이용했겠지.”
“뭐, 어쨌거나 우리는 좋은 구경하고 즐기기만 하면 되지!”
“맞는 말일세! 하하하!”
사람들의 왁자한 소리가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웅웅 울리는 대연무장.
그 복판에 마련된 비무대에서 유현은 눈을 지그시 내려 감고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스으읍, 후우우우!”
호흡이 길게 뻗어감에 따라 유현의 의식도 물 속에 가라앉은 바위처럼 차분해졌다.
주위의 소음이 적막에 묻혀간다.
‘중요한 것은 나를 비워내는 것.’
승리에 대한 집착도 버린다.
오로지 하나의 점에 집중하여 정신을 집중한다.
그렇게 마음이 잔잔한 호수면처럼 변했을 때,
스르르.
유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와아아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적막을 뚫고 들려왔다.
하나 호수면은 여전히 잔잔하다.
소리는 소리일 뿐이다.
주변의 환경이 유현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다.
유현의 눈동자에 정광이 어리자 가만히 지켜보던 천무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흐음. 제법이구나.”
마침내 묵직한 천무류의 목소리가 흘렀다.
평정심을 찾은 유현이 빙그레 웃으며 포권했다.
“선배님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림맹 견습생 유 아무개입니다. 선배님께 한 수 가르침을 청합니다.”
“화산파의 후기지수를 상대할 수 있어 영광일세.”
“과찬이십니다.”
유현이 또랑또랑한 대답에 천무류가 빙그레 웃었다.
“과연 화산파의 자랑이라 할 만하군. 기개가 남달라. 자네는 내가 무섭지 않은가?”
“진정한 두려움이란 모르는 것을 모르는 그대로 두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선배님께 배움을 청한 이상 아직 진정한 두려움을 보았다고 할 수 없겠지요.”
“허허. 오묘한 말이로고. 하나 그 용기라는 것도 무지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지. 어쩌면 자네는 나를 모르기에 두려움을 모르는 것일 테지.”
“그렇다면 선배님께서 불초 후배에게 진정한 두려움에 대한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호오, 두려움을 가르쳐 달라?”
고개를 든 유현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제 논리에서는 두려움을 알게 되면 그것을 극복할 용기가 또 생기게 마련일 테니까요.”
“허허, 그렇군.”
천무류가 껄껄거리고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았다.
“자네 동료인 남궁천은 오지 않은 모양이군.”
지나가듯 툭 던진 말이었지만, 유현은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현재 대연무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상황.
그런데 대충 둘러본 것만으로 남궁천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다니.
과연 천무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렇군요. 이왕이면 제 비무를 지켜봐 주길 바랐는데.”
“그런가? 자네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군.”
“아닙니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기도 합니다. 남궁 소협이 원체 다른 사람의 비무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요.”
“혹시 남궁천에 대해 알려줄 수 있겠나?”
천무류의 말에 유현이 멈칫거렸다.
일순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 천무류의 상대는 분명 자신인데, 천무류의 시야에는 자신이 없는 것 같지 않은가?
벌써 다음 상대를 마음속으로 남궁천이라 정해놓은 것만 같다.
하나 유현은 곧 마음을 다스리고는 생각을 비워냈다.
‘아…… 이런 것인가?’
생각을 비워내면서 유현은 아주 잠깐 도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도를 이룬다면 저런 말 하나하나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라.
그저 바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들리리라.
유현이 심호흡을 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만약 저를 이기신다면 직접 알아보시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호오?”
“저를 이기지 못하신다면, 그땐 그것대로 남궁천 소협에 대해 대충 알게 되실 겁니다.”
“하하하! 재미있는 친구로군. 내가 듣던 유현 도장과 조금 다르군.”
“성장 중에 있으니까요.”
유현의 차분한 대답에 천무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자네의 성장을 한 번 견식해 보세.”
“영광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 포권했다.
이윽고 천무류가 귀빈석을 슬쩍 돌아보았다.
비무를 시작해도 좋다는 신호.
깃대를 손에 쥔 총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큰 움직임으로 깃발을 휘둘렀다.
펄럭!
“우와아아아아!”
함성이 솟구쳐 올랐다.
이전 같으면 이 함성에도 전신의 솜털이 쭈뼛 섰을 테지만, 유현은 시종 차분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사선으로 거리를 좁히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원을 그리듯 움직이되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물론 패력궁이라고 해서 활만 쓰진 않는다.
하나의 병장기에 달인의 경지에 오르면, 다른 병장기는 절로 고절한 수위까지 습득되는 게 바로 무공이다.
그래도 주특기인 활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 되리라.
사박. 사박.
유현의 걸음 폭에 맞춰 천무류도 반대 방향으로 이동했다.
소리 없는 전투.
아직 기수식도 취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간의 기 싸움이 팽팽해지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그 때문일까?
대연무장에 들어찬 수많은 사람이 하나같이 숨을 죽인 채 비무대만 바라보고 있다.
이런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면 그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다.
척.
마침내 천무류가 걸음을 멈췄다.
무심히 걸음을 내딛던 유현이 움찔거리고는 따라 멈췄다.
미간을 슬쩍 구겼다.
‘멈춰……?’
그렇다고 화살을 꺼내 들거나 활을 들어 올린 것도 아니다. 그냥 양손을 축 늘어뜨린 자세로 편안하게 서 있을 뿐이다.
천무류가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선공을 양보하겠네. 들어오시게.”
유현이 포권을 취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말을 마친 유현이 서서히 기수식을 취해갔다.
상대는 패력궁이다.
선공을 양보해 준다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비운다는 생각조차 떠올리지 않는다.
마음을 비운다는 그 의지마저도 마음을 비우지 못했다는 증거니까.
지그시 눈을 감았던 유현이 자연스럽게 단전에서부터 공력을 뽑아 올렸다.
후우우우웅.
유현의 전신에서 기풍이 훈훈하게 불어나갔다.
언뜻 매화 향마저 느껴진다.
잘 다듬어진 자하신공(紫霞神功)이 혈맥을 따라 질주한다.
‘좋아, 간다!’
순간 눈을 부릅뜬 유현이 바닥을 차며 바람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런데…….
탁!
두어 걸음을 내디뎠을까?
벼락처럼 날아가던 유현이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유현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지켜보던 관중들이 웅성거렸다.
“뭐, 뭐야? 지금 뭐 하는 거지?”
“어느새 마혈을 당한 건가?”
“아니, 그런 낌새는 없었잖아? 패력궁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고.”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저 소도장은 그대로 돌이라도 된 것 같은데?”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 당황한 것은 유현이었다.
‘발, 발이…… 떨어지지 않아!’
분명 마혈을 당한 것은 아니다.
단지 바닥을 차고 튀어나가면서 천무류와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온몸이 저절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 순간이 너무 기이해서 저도 모르게 사술에 당한 건 아닌지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건 분명…….
‘두려움이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른다.
천무류의 눈빛은 그저 고요하다.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한데 독사 앞에 선 쥐새끼라도 된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다.
지독한 공포.
지금껏 이런 두려움과 마주한 적이 있던가?
천무류의 눈빛은 그저 공허를 담고 있다.
남궁천처럼 죽음의 늪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저 잔잔한 호수다.
하지만 움직이면 죽을 수도 있다는 강박이 본능처럼 일어나고 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린다.
손을 움직여 검이라도 뽑아보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
천무류는 지금 기수식도 취하지 않았다.
화살을 뽑아 들기는커녕 싸울 의지조차 없는 것처럼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서 있을 뿐이다.
한데 만약 자신이 손가락이라도 까딱하면?
천무류가 빛살보다 빠른 속도로 시위를 당겨 활을 쏘리라.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불변의 진리처럼 느껴지고 있다.
‘안 돼…… 속지 마!’
유현은 스스로에게 외쳤다.
겉은 고요하지만, 유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이제 지켜보는 관중의 술렁임은 더욱 커져갔다.
누구도 이 상황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단지 남궁검을 비롯한 몇 명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주시할 뿐이었다.
마침내 천무류의 입이 열렸다.
“어떤가? 진정한 두려움을 보았나?”
광오한 질문이다.
하나 유현은 대답조차 제대로 할 정신이 없었다.
‘이것이 격이 다름인가?’
마치 화산의 만장애(萬丈厓)를 올려다보고 있는 기분이다.
넘을 수 없는 벽이란 이런 것인가?
마음을 비우고 도가 들어서야 할 곳에 공포가 나타나 버렸다.
하지만…….
“이대로는……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호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앗!”
순간 유현이 단전에서부터 솟구친 고함을 터뜨리면서 바닥을 찼다.
드디어 몸이 움직였다.
파앗!
마음을 비운 자리에 오롯이 의지 하나만이 들어선다. 그리고 화기가 모여들어 도를 이루…… 기 전에 유현은 보았다.
패력궁 천무류가 활을 드는 것과 동시에 화살을 뽑아 들고 시위에 걸어 당기는 모습을.
다음 순간!
패애애앵!
쒸에에에엑!
한 줄기 빛살이 유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직 단 한 걸음도 옮기기 전에 날아든 빛살은 그대로 유현의 뺨을 스치면서 뒤로 날아갔다.
피츗!
쒸아아아아앙!
매의 울음소리처럼 공명음을 터뜨리며 하늘로 부드럽게 솟구치는 화살!
허공으로 떠올랐던 유현의 머리카락이 사뿐히 내려앉는 순간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짧은 순간 유현은 죽음을 경험했다.
어느새 천무류는 활을 내려두고 먹 같은 눈동자로 유현을 보고 있었다.
유현의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걸렸다.
‘아직도 도가 멀었구나.’
도움닫기를 한다고 만장애를 뛰어오를 수는 없는 법 아닌가?
마침내 유현이 포권했다.
“선배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 두려움이 자양분이 되었길 바라네.”
“감사합니다.”
유현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수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그저 눈만 끔뻑였다.
까아아악!
높은 곳에 앉아 내려다보던 옥안영오가 긴 울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