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53화 (252/508)

253. 당가의 손님

지객당으로 안내받은 남궁검과 남궁천은 어두운 얼굴로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오랜 침묵이 이어졌지만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어색한 분위기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사실 아기를 안아 들고 함께 싸운 후부터는 서로에 대한 서먹함도 꽤나 풀린 상황이기도 했다.

“흐음.”

남궁검이 무거운 침음을 흘리고는 찻잔을 들었다.

남궁천이 찻잔에 담긴 찻물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맹주 그 늙은 구렁이가 먼저 손을 쓴 것 같지 않습니까?”

“흐음.”

다시 침음을 흘린 남궁검이 찻잔을 내려두며 말했다.

“늙어가는 입장에서 그 늙은 구렁이라는 말이 썩 듣기 좋진 않구나.”

“할아버지. 지금 그게 문젭니까? 그리고 할아버지는 늙은 구렁이가 아니라…….”

“아니라?”

“늙은…… 여우?”

“뭐라 했느냐?”

“아니면…… 호랑이……?”

남궁검이 웬일인지 푸근한 미소를 짓는다. 한데 찻잔을 내려둔 손에 희미한 기운이 맺힌다.

“확실히 네가 많이 편해진 모양이구나.”

“하하…… 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죠.”

“크흠.”

남궁천이 재빨리 화제를 돌리는 바람에 남궁검도 더는 따지지 않고 손에 맺혔던 기운을 풀어버렸다.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에 대한 호칭이 자연스레 바뀌어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남궁검이 무뚝뚝한 목소리를 흘려내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나도 뜻밖이긴 했다.”

저만치 전각 너머의 가주전에서는 지금쯤 당 가주와 맹주가 긴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상황이 남궁세가에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남궁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성이며 말했다.

“분명 그 능구렁이가 이간질을 할 겁니다.”

“우리가 당가에 왔으니 아마 맹주는 마신단에 대한 걸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그렇겠죠. 이미 알고 있었던 게 아니더라도 이젠 눈치를 챘을 겁니다.”

“해서 너의 생각은 어떠냐?”

남궁검이 남궁천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마 맹주는 당 가주와 본 가를 이간질시키려고 할 겁니다. 그렇다면…….”

“마신단을 만들지 못하도록 종용할 수도 있겠구나.”

“예. 그럴 가능성이 크죠.”

“그럼 당 가주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 되겠다.”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야만 합니다. 마신단이 강호의 판세를 뒤집을 수 있는 열쇠가 될 테니까요.”

“흐음. 맹주가 이간질한다면 무슨 말을 할 것 같으냐?”

“글쎄요. 아무래도 본 가와 마교가 결탁했을 거라는 말을 하지 않을까요?”

“그런 허무맹랑한 말을 당 가주가 과연 믿을까?”

“할아버지. 믿고 안 믿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 가주의 의지 문제일 뿐이죠. 당 가주가 맹주와 손을 잡을지, 본 가와 손을 잡을지에 대한 결정에 따라 믿음도 달라질 겁니다.”

남궁천의 대답에 남궁검이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녀석, 언제 이리 큰 건지…….’

마음 약한 외손자를 보면서 혀를 차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말이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나?

어쩌면 자신이 그동안 이러한 재능을 몰라보고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지금 남궁천의 발언은 마치 음모와 간계가 난무하는 강호에서 수십 년은 구른 사람 같았다.

이 정도의 혜안이 있다면 사실상 당장 남궁세가를 맡겨도 문제가 없을 것만 같다.

하나…….

‘그렇게 떠넘기듯 결정할 일이 아니지. 그동안 못한 만큼 네게 그늘이 되어주마.’

남궁검이 내심 결심을 굳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말이다. 다만 우리보다 맹주가 먼저 만나고 있다는 게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구나.”

“그렇긴 합니다. 아무래도 당 가주 입장에선 어떠한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를 볼 테니까요.”

“그런 당가를 설득시킬 묘수는 있느냐?”

“흐음. 글쎄요.”

남궁천이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맹주가 당 가주를 만나서 정말로 본 가를 마교와 엮어버렸다면?

과연 당 가주는 무림맹을 저버리고 이미 기울어 버린 남궁세가와 손을 잡을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 요소가 너무 크다.

맹주의 말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무림맹을 등질 용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남궁천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마신단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원래 먹지 못하는 떡이 더 맛있어 보이는 법.

애초에 마신단에 대한 집착은 없었지만, 상황이 이리 되니 더욱 욕심이 나게 된다.

그때 마침 지객당 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더니 총관이 안으로 들어섰다.

“두 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가주님께서 두 분을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당 가주가 이리 바쁜 줄 알았으면 애초에 결례를 저지르지 않았을 거요.”

남궁검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안 총관이 거듭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갑자기 맹주님이 방문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

남궁검도 더는 따지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회랑을 따라 이동한 남궁검과 남궁천은 곧 가주실에 도착했다. 총관이 먼저 안을 향해 소리쳤다.

“가주님, 남궁세가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곧 들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총관의 뒤를 따라 남궁검과 남궁천이 걸음을 옮겼다.

실내로 들어서던 남궁검이 일순 눈살을 슬쩍 구겼다.

‘아직 가지 않았군.’

얼음장 같은 시선이 날아간 곳에는 무림맹주 묵천악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탁자에 앉아 있었다.

당고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색했다.

“어서 오십시오! 남궁 가주께서 이리 먼 길을 찾아오시니 영광입니다. 소가주도 잘 지냈는가?”

“바쁜 와중에 결례를 범했소.”

남궁검이 이번에도 싸늘하게 대꾸하자 당고륜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사정이 있었던지라…….”

당고륜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묵천악이 뭉그적거리며 일어나더니 능글맞은 웃음을 그렸다.

“이게 누구신가? 남궁 가주를 여기서 만나다니.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오.”

“그러게 말이외다. 우리야 일찌감치 당가에 연통을 넣었다지만, 맹주께서는 어인 일로 먼 길을 오셨소?”

“허허, 먼 길로 따지자면 귀 가가 더 멀 텐데.”

“하나 맹주의 자리가 여간 바쁘지 않소이까?”

“그건 그렇소. 요즘 정말이지 정신이 없구려. 흑도인들이 어찌나 설쳐대는지 말이오. 그나저나 이렇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다 인연이 닿아서 그런 것 아니겠소? 이리 앉으시오. 모처럼 만났으니 다함께 담소나 나눕시다.”

묵천악이 마치 제집인 것처럼 남궁검을 불렀다.

남궁천과 남궁검이 탁자로 다가가 앉자, 당고륜이 시종을 시켜 차를 내오라 지시했다.

하나 남궁검이 먼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됐소. 차라면 이미 지겹도록 마셨소. 두 분도 마찬가지일 듯한데.”

그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당고륜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럼 그냥 대화를 나누도록 할까요?”

“그럽시다.”

무뚝뚝하게 말을 뱉은 남궁검이 맞은편에 앉은 묵천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묵천악은 자리를 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끝까지 앉아 있을 생각인가?’

눈엣가시 같다는 표현은 이럴 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묵천악이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남궁천에게도 말을 건네 왔다.

“소가주도 오랜만일세.”

“뭐, 그렇게 오랜만은 아니죠. 칠대세가회에서도 뵀으니까요.”

“허허, 그런가?”

“그런데 정말 안 바쁘세요? 지금 흑도인들이 난리인데.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으실 것 같은데요.”

남궁천의 거침없는 말에도 묵천악은 웃음기를 잃지 않았다.

“그러게 말일세. 무림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네. 그래도 자네가 맹활약을 해준 덕분에 이렇게 남궁가도 무사하고, 언가와 팽가도 지키지 않았나?”

“잘 알고 계시니 다행이네요.”

남궁천의 맹랑한 대답에도 묵천악은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하나 다음 순간 이어진 남궁검의 싸늘한 말투에 그의 표정도 잠깐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 강호 평화를 생각하시는 분이 마교 잔당을 놓아주었소?”

“……!”

순간 좌중이 소리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남궁천 역시 남궁검이 이렇게나 공격적으로 나올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마교 잔당을 놓아줘? 하긴 저 능구렁이라면 충분히 말이 되긴 하지.’

사실 남궁검으로서는 이런 공격적인 발언이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만약 맹주가 남궁세가를 마교와 엮으려고 한다면, 차라리 선공을 취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판단이었다.

예상대로 당고륜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묵천악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남궁검 가주님,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자네는 모르고 있었던가? 오래전 맹주께서 마교 잔당을 살려 보내준 사실을.”

“그게 사실입니까? 대체 어째서……?”

당황한 당고륜 옆에서는 묵천악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초리로 남궁검을 응시하다가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허허, 남궁검 가주도 참. 언제 적 일을 이제 와서 꺼내시오.”

“하면 요즘은 안 그러오?”

“남궁검 가주. 어찌 이리 나를 부끄럽게 하시오? 허허. 당시엔 내가 실력이 일천하여 마교 잔당을 뿌리 뽑지 못한 게 사실이외다. 그렇다고 오늘날 이런 식으로 날 꾸짖으시니 면목이 없소이다.”

이쯤 되자 어색한 자리를 무마하기 위해 당고륜이 애써 웃으며 나섰다.

“하하…… 그런 거군요. 지나간 아쉬움은 술 한 잔으로 달래는 법이지요. 그래도 결국 마교를 소탕했으니 오늘날의 평화가 유지되지 않았습니까?”

“자네라도 알아주니 고맙군. 사실 오늘날의 평화를 이루기까지 많은 역경이 있었지.”

묵천악의 말에 남궁검이 이번에도 싸늘하게 냉소를 지었다.

“맹은 명화를 유지했으나, 강호는 여전히 혼탁한 것 같소만. 오죽하면 흑도인들이 본 가를 공격했겠소?”

“그러고 보니 이번에 고생깨나 하셨다고 들었소.”

“말하신 대로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소. 흑도인들이 대체 왜 본 가를 공격했는지.”

“그러잖아도 그 부분에 대해 당 가주와 얘기를 나눴다오. 남궁 가주께서는 너무 염려 마시오. 본 맹이 앞장서서 조사를 할 테니.”

남궁검이 내심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맹이 그리해 주신다니 안심은 되는구려. 그럼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말해보시오.”

남궁검이 남궁천을 힐끔 돌아보았다.

어느새 이심전심이 되었는지, 남궁천은 그 뜻을 알아채고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왕 맹이 본 가를 도와주실 거라면 특별 재난 문파로 선정해 주시지요?”

“특별 재난 문파라.”

뜻밖의 요구에 맹주가 당황한 속내를 숨기며 수염을 쓸었다.

“하나 그건 나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

“에이, 맹주씩이나 되시면서 쩨쩨하게 굴지 마시고요.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다면서요?”

“내가 그런 소리를 했던가?”

“어? 그럼 그 뜻이 아니면, 그냥 말만 도와준다고 하신 겁니까? 이거, 이거 이러면 진짜 실망인데.”

“자네 혼자 기대하고 실망하는군.”

“그냥 화끈하게 도와주시죠? 본 가가 이번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언가와 팽가도 잘 도와주시면서 유독 본 가만 외면하시는 건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는가?”

묵천악이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게 아니면요? 왜 안 되는데요?”

“말했다시피 절차가 그리 단순하지 않네. 하나 내 긍정적으로 검토하도록 지시해 두겠네.”

“감사합니다, 맹주님.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남궁천이 천연덕스럽게 포권했다. 남궁검이 그런 남궁천을 슬쩍 돌아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녀석의 방식에 나도 어느새 적응이 된 모양이군.’

그러는 사이 당고륜이 웃으며 말했다.

“참 다행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함께 만나니 좋은 일이 생기는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맹주님은 이제 그만 주무셔야죠?”

“응? 나 말인가?”

묵천악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건방진 애송이가 또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다.

이젠 잠자리까지 참견이라니. 참으로 맹랑하지 않은가?

남궁천이 씨익 웃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잠자리에 일찍 들어야 건강할 수 있다더라고요. 이제 그만 주무시죠?”

“흐음. 자네 가주와 나는 동년배일세.”

“예에에? 정말입니까! 아니, 맹주님! 강호 평화는 혼자만 지키셨답니까? 어째서 그간의 세월을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신 겁니까?”

“허허허.”

묵천악이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새끼, 그냥 여기서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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