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54화 (253/508)

254. 제왕의 철학

아니, 저게 미쳤나?

당고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궁천을 보았다.

뭐?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아?

그게 맹주에게 할 소린가?

순간적으로 어색해진 공기를 흩트리기 위해 당고륜이 과장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남궁 소협은 농담도 잘하는군.”

“농담이라뇨? 저는 늘 진솔한 말을 하는걸요.”

분위기 파악도 못 한 채 천진하게 대꾸하는 남궁천을 보며 당고륜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억눌린 목소리를 흘렸다.

“흐흐흐. 알읐으니까 즉등히…… 즉등히…… 그쯤만 하지.”

말을 마친 당고륜이 괜한 소리가 나올까 싶어 얼른 남궁검을 보며 본론을 꺼냈다.

“그나저나 예까진 어인 일입니까?”

남궁검이 맹주 눈치를 슬쩍 보고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 가주와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소.”

“무슨 이야기인지요? 말씀하시지요.”

당고륜이 태연히 대꾸하자, 남궁검이 불편한 표정으로 맹주를 슬쩍 보았다.

하나 맹주는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다시 남궁천이 불쑥 끼어들었다.

“맹주님. 안 피곤하세요?”

“으음?”

“아니, 정말 안 주무셔도 됩니까? 무한에서 여기까지 오셨으면 많이 피곤하실 텐데 그만 들어가서 주무시죠?”

“허허. 내가 알아서 하겠네.”

“맹주님은 홀몸이 아니십니다. 맹주님은 강호를 이끄는 몸이십니다. 건강을 챙기셔야지요.”

“아직은 괜찮네.”

“괜찮긴요. 그러잖아도 세월의 풍파를 혼자 다 맞으셨는데.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그만 들어가서 주무시지요.”

엄밀히 말해서 제발 꺼져달라는 말이었지만, 말만 따져본다면 귀한 몸을 극진히 배려하는 것이니 콕 집어 나무랄 수도 없는 부분이었다.

결국 묵천악이 피식 웃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들어선 안 될 얘기인가 보군.”

부드럽게 말했으나, 눈빛만큼은 서늘하다.

남궁검이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며 대꾸했다.

“가문끼리 나눌 사적인 얘기외다.”

“그렇소? 내 생각보다 두 가문이 돈독한 모양이오. 남모르게 비밀 얘기를 할 만큼.”

언중유골을 눈치챈 당고륜이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남궁 가주님. 오늘은 우연찮게 맹주님께서 오셨으니, 함께 대화를 나눠보는 건 어떨지요? 혹, 맹주님께서 고견을 들려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연찮게? 고견?

남궁검이 피식 냉소를 짓더니 이내 서늘한 표정이 되어서는 당고륜을 빤히 응시했다.

“당 가주.”

“예, 남궁 가주님.”

“귀가와 본 가가 긴밀히 상의해야 할 일이외다.”

“흐음. 그렇습니까?”

당고륜의 눈빛이 묘하게 흔들린다.

남궁검도 더는 말을 잇지 않고 가만히 반응을 살폈다.

묵천악이 당고륜을 어찌 구워삶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만하면 충분히 알아듣게 말한 것이니.

그때 남궁검 옆에 앉은 남궁천이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거참, 노친네. 늙어서 호기심만 많아서는. 주책바가지가 따로 없네.”

이 미친놈아! 다 들린다고!

당고륜이 당황한 기색으로 얼른 묵천악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묵천악도 넘어갈 수 없는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가주. 방금 뭐라고 하였는가?”

“예? 뭐가요? 아무 말 안 했는데요?”

“…….”

“아아, 그것 봐요. 너무 안 주무시니까 막 환청 같은 게 들리고 그러잖아요. 맹주님. 정말 충심으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들어가서 얼른 쉬시죠.”

빨리 들어가서 처자라고. 이 늙은 구렁이야.

남궁천이 진솔한 속내를 감춘 채 천진하게 말하자, 맹주가 싸늘한 웃음을 흘리더니 의외로 순순히 일어났다.

“이리도 날 내쫓는 걸 보면, 아무래도 세 분이 긴히 나눌 얘기가 있는 것 같소. 그럼 이만 빠져 드리리다. 말씀들 나누시오.”

뜻밖에도 맹주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이번엔 남궁천과 남궁검이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생각보다 순순히? 이미 당 가주를 충분히 구워삶았다는 건가?’

그렇다면 당 가주를 설득하기 더욱 어려워지리라.

그래도 맹주가 자리에 있으면 얘기조차 꺼낼 수 없으니 그나마 나은 상황이긴 하다.

총관이 들어와 맹주를 직접 안내하며 나가자, 실내에는 마침내 세 사람만 남게 되었다.

당고륜도 이제는 조금 편안한 표정이 되어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긴히 나눌 얘기가 무엇입니까?”

남궁검이 남궁천을 슬쩍 보았다.

“네가 얘기하겠느냐?”

남궁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 가주님.”

“말하시게. 소가주.”

“지금부터 제가 얘기하는 걸 잘 들어주십시오.”

“하하. 시작부터 그리 무게를 잡으니 왠지 긴장되는군.”

남궁천이 말없이 들고 왔던 목함을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 크지 않았지만 고급스러운 재질이 당고륜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게 무엇인가?”

이번에도 남궁천은 말없이 목함의 덮개를 열었다.

특수 처리된 목함이었던 것인지 덮개를 열자마자 짙은 약향이 훅 풍겨져 나왔다.

당고륜이 놀란 표정을 짓는데, 남궁천이 목함에 든 것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야 당연히…….”

영단에 조예가 깊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당가가 아닌가?

한데 당고륜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눈앞의 영단이 분명 대단한 것임은 알 수 있으나,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군. 분명 보통 영단은 아닌데. 참으로 오묘한 영단이로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정기와 사기가 교묘하게 섞여 있어 또 다른 기운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 묘한 기운이 인체에 어떤 양향을 미칠지 알기 어렵겠네. 대체 이런 게 어디서 난 건가?”

당고륜의 말에 남궁천과 남궁검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사실 아직까지는 당고륜이 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인지, 정말 모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당고륜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

남궁천은 그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차분히 말했다.

“이것들은 마신단 재료입니다.”

순간 당고륜이 탁자를 탕, 내리치면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지금 그게 무슨 소린가? 마신단의 재료라니! 하면 지금 마신단의 재료를 들고 본 가를 버젓이 찾아왔다는 말이야? 아무리 본 가가 천하의 모든 독을 제조하는 곳이라지만, 마교가 만든 사악한 영단을 가지고 오다니? 혹 나를 놀리는 것인가?”

당고륜은 진심으로 당황한 사람처럼 남궁검을 돌아보면서도 지적했다.

“남궁 가주님!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설명 좀 해보시지요!”

하나 이번에도 대답한 사람은 남궁천이었다.

“이 영단은 마단곡에서 발견한 것들입니다.”

“마단곡이라고?”

“예. 그중에서도 이건 마신단 재료입니다. 사실 본 가에서 마신단을 제조하려다가 실패했지요.”

“그런 미친 짓을! 당장 불에 태워 버려도 모자랄 판에 천마신단을 제조한다고? 제정신인가!”

얼굴이 벌게진 당고륜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했다.

하나 남궁천과 남궁검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반응이었기에 시종 차분한 이성을 유지했다.

대신 남궁천은 당고륜을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당 가주님.”

“뭔가?”

“당 가주께서는 독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허!”

당고륜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자네가 나와 독을 논하자는 것인가?”

“예. 논하기보단 가르침을 받고 싶네요. 천하에서 독을 가장 잘 아는 곳이 바로 사천당가 아닙니까? 그리고 가주님은 그 당가의 주인이시지요.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독이란 무엇입니까?”

남궁천의 진지한 태도에 당 가주의 얼굴에서 가소로움이 가셨다.

그가 곧 표정을 굳히고는 입을 열었다.

“독이란 곧 약이다.”

원래 진리는 더없이 단순한 법.

방금 내뱉은 말은 바로 당가의 철학이었다.

“재미있군요. 사람을 죽이는 독이 곧 약이라니. 어째섭니까?”

“단순한 이치다. 이독제독이란 말도 들어봤을 것이다. 극약은 극독이 될 수 있고, 반대로 극독은 극약이 될 수 있다. 독은 양날의 검이다. 어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독이 내게 해를 끼칠 수 있고, 내게 약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

“바로 이 당가에서는 말이죠?”

남궁천이 빙그레 웃으며 묻자, 당고륜이 어깨를 펴며 말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이곳, 사천당가다.”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뭐라?”

남궁천이 목함의 덮개를 탁 덮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약향이 더는 올라오지 않았다.

“천마신단. 그걸 제가 약으로 써볼까 합니다. 바로 이곳 사천당가에서요.”

당고륜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자네는 지금 나를 놀리는 건가?”

“가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독이란 곧 약이라고. 모든 독을 약처럼 다루시면서 어째서 천마신단만 다르게 여기십니까? 만약 사천당가가 천마신단을 제조하는 데 성공한다면 분명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겁니다. 정사를 막론하고 모든 독을 다루었지만 유일하게 아직 손대지 못한 게 천마신단이 아닙니까?”

확실히 솔깃한 이야기다.

천하의 모든 독을 다뤄본 당가다.

하나 유일하게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 바로 천마신단이다.

남궁천이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천마신단이야말로 약과 독의 양면성을 가장 진하게 품는 영단이지요.”

“아무리 그래도…….”

“만약 이 재료를 모두 사용하지 않고도 천마신단을 제조하는 데 성공한다면, 남은 것은 사천당가에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

당고륜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목함을 내려다보았다.

독을 다루는 독왕으로서 어찌 탐나지 않겠는가?

하나…….

당고륜이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은근한 노기마저 담긴 음성을 나직이 흘렸다.

“자네가 천마신단을 약으로 삼겠다고?”

“그렇습니다.”

“당치도 않는 소리. 천마신단을 약으로 쓸 방법은 천마신공밖에 없네. 그렇다면 자네는 정녕 천마가 되고자 하는 것인가!”

“누가 그래요? 천마신공만이 천마신단을 약으로 쓸 수 있다고?”

당고륜이 코웃음을 쳤다.

“하면 무엇으로 천마신단을 소화할 또 다른 무공이 있단 말인가?”

“있다면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천마신단은 천마신공으로 흡수할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것일세. 본 가의 만류기원단(萬流歸元團)은 역시나 본 가의 만류기원신공(萬流歸元神功)으로 흡수해야 마땅하지. 또한 자네가 이번에 도와준 언 가의 강령신단도 강령신공으로 흡수하는 것이고! 각 영단에는 상성이 맞는 무공이 존재하는 법. 어찌 천마신공이 아닌 무공으로 천마신단을 흡수하겠단 말인가?”

그러자 남궁천이 당고륜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어떤 무공이든 포용할 수 있는 무공이 있다면 어떻습니까? 하면 어떤 영단도 포용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 갈수록 헛소리가 지나치군.”

당고륜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데 다음 순간 남궁천이 허리춤에서 벽라검을 스르릉 뽑아 드는 것이 아닌가?

“역시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요.”

“뭐?”

뜻밖의 상황에 당고륜이 표정을 무섭게 굳히고는 남궁천을 노려보았다.

“자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장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림자들은 바로 당고륜을 상시 비호하는 호신위였다.

차치차앙!

그들이 일제히 짤막한 검을 뽑아 들며 남궁천을 포위했다.

그럼에도 남궁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태 자리에 앉은 남궁검 역시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남궁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당가가 독에 대한 훌륭한 철학을 가졌듯이, 본 가의 무공에도 철학이 있습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남궁천이 일순 검을 빙글 돌리더니 검파를 당고륜 쪽으로 내밀었다.

“한 번 확인해 보시지요?”

“뭘 말인가?”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여 드리지요. 본 가에서 품은 강령신공을. 그 제왕의 철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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