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파공검제-252화 (251/508)

252. 당가의 손님

척 보기에도 공력이 심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노인이었기에 살수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경계했다.

남궁천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당가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독을 만져댄 것인지 손가락은 손톱이 죄다 빠져 있었고, 손도 녹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녹수독인(綠手毒人)…….’

남궁천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녹수독인 역시 전생에 만난 기억이 있다.

평소 자신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미관을 위해서인지 얇은 장갑을 끼고 다녔다.

‘한데 지금처럼 장갑을 벗었다는 것은…….’

여차하면 독을 쓰겠다는 소리.

‘오랜만에 보는군.’

어지간히 이름 난 정파 무인과는 한 번씩 손을 섞어본 남궁천이었다. 당연히 녹수독인과도 겨룬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가 독자 개발한 취옥분에 당해 반쯤 죽다 살아난 적이 있었다.

‘정말이지 그때를 생각하면…….’

괜히 살심이 피어오를 것만 같다.

만약 그때 천독노를 만나서 치료받지 않았더라면 십중팔구 죽은 목숨이었을 터.

‘휴우, 잊자. 잊어.’

새 삶을 살기로 한 이상 전생의 원한까지 끌어올 수는 없는 법.

마침내 지척에 다다른 녹수독인을 향해 남궁천이 정중히 포권했다.

“녹수독인을 뵙습니다.”

“호오, 그대가 바로 요즘 신룡으로 떠오르는 남궁천인가?”

“예, 바로 접니다.”

보통은 겸양을 갖춰야 할 터인데 시원하게 인정하는 모습이 뜻밖이면서도 마냥 밉지만은 않다.

‘소문대로 재미있는 녀석이로군.’

생각을 갈무리한 녹수독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한창 젊은 나이인데도 날 알아보는구나.”

“손의 빛깔을 보고 알았습니다. 강호에서 녹수독인을 모르면 무인이라 할 수 없지요.”

“끌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걸 보니 처세술이 제법일세.”

칭찬 아닌 칭찬을 남긴 녹수독인이 이번엔 남궁검을 돌아보고는 먼저 예를 차렸다.

“사천당가의 당 모가 남궁세가주님을 뵙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예는 생략합시다. 이리 다시 만나서 반갑소.”

두 사람은 오래전 무림맹에서 일할 때 인연이 있던 사이였다.

당시 남궁검이 직위가 더 높았기에 녹수독인은 지금까지도 깍듯하게 예를 차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 차례 인사가 끝나자 녹수독인이 주변을 날카롭게 훑더니 카랑카랑한 음성을 뱉어냈다.

“감히 사천에서 당가의 허락 없이 무슨 짓들을 하는 것이냐?”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독기와 뱀처럼 예리한 눈빛을 마주하니 날고 긴다는 살수들도 마른침을 삼키며 주춤 물러났다.

살수 중 흑의 경장을 입은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당 장로님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나 이 일은 살곡과 남궁가 사이의 일이니 방해는 말아주세요.”

어차피 남궁세가가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기에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넸다.

하나 녹수독인은 전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흥! 지금 누가 누굴 방해한다는 것이냐? 남궁세가는 본 가를 찾아온 손님이다. 나는 가주님의 명을 받고 손님을 마중 나온 것이야. 한데 살수 나부랭이들이 설쳐대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정 이렇게 나오시면 우리도 어쩔 수가 없답니다.”

“오냐, 먹잇감을 찾으면 어떻게든 물어뜯는 게 너희 살수 놈들이지. 하나 그건 본 가도 마찬가지다. 너희들이 끝까지 본 가를 방해하겠다면 내 의지를 보일 수밖에.”

스스스슷.

말을 마친 녹수독인의 손이 옥빛으로 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살수들이 흠칫거리며 물러났지만, 여인은 냉랭한 조소를 지은 채 쏘아붙였다.

“장로께서 일당백의 독인이라는 건 익히 들었으나, 본 곡을 상대로 혼자서는 어려울 거예요.”

“계집아. 누가 혼자라고 하더냐?”

“뭐라고요?”

“너는 본 가가 손님을 맞이하는 데 그리 성의가 없을 것으로 보이느냐?”

“무슨……!”

그 순간 수풀이 흔들리더니 황색 제복을 입은 무인들이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사천당가!”

다른 살수들도 갑자기 나타난 사천당가 무인들을 보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본래 살수란 불필요한 싸움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기습을 감행해서 목표를 제거하는 것이 주 임무다.

한데 이렇게 되면 득보다 실이 클 수밖에.

운이 좋아서 남궁검과 남궁천을 제거한다고 해도 피해가 너무 크다.

살수들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어렵다.

바로 앞에 표적이 있는데 암기조차 날릴 수가 없는 상황.

사천당가 앞에서 암기를 잘못 놀렸다간 손모가지가 날아가고 말리라.

어쩐다?

여인이 머리를 굴리는데 녹수독인이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뭘 그리 머리를 굴리느냐? 지금 어물쩍거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그게 무슨…… 아!”

순간 뭔가가 떠오른 여인이 주변을 휙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살수 중 한 명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비틀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털썩!

“쿨럭, 쿠웨에엑!”

한 바가지 피를 토한 살수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부들부들 떤다.

‘중독……!’

대체 어느 틈에 하독(下毒)을!

여인이 경악한 눈초리로 녹수독인을 돌아보았다.

녹수독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읊조린다.

“너희 같은 잡것들에게 비싼 독을 풀진 않았으니 얼른 돌아가서 며칠 요양하면 큰 부상은 면할 것이다. 썩 꺼지도록 해라.”

“……!”

“행동이 굼뜨구나.”

“오늘은 돌아가지만 이대로 끝이라고…….”

“혓바닥이 길면 죽기 좋은 곳이 바로 강호다, 계집아.”

“……!”

여인의 미간이 팍 일그러졌다.

그녀가 녹수독인을 빤히 노려보다가 결국 걸음을 돌렸다.

그녀를 필두로 주변을 에워쌌던 살수들이 스르르 숲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주변이 정리가 되자 당가 무인들도 경계심을 풀고는 관도로 나와서 도열했다.

녹수독인이 싱긋 웃었다.

“날파리들은 쫓아냈으니 이제 가실까요? 가주님이 연통을 받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리 마중까지 나올 줄은 몰랐소. 덕분에 골칫거리가 해결되었소. 고맙소.”

“별말씀을요.”

녹수독인이 엉망진창이 된 마차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마차는 본 가에서 준비한 것을 타고 가시지요.”

“그래야 할 것 같구려.”

“그런데 크음. 이게 무슨 냄새인지…….”

“아…… 여기.”

남궁검이 그제야 한 손으로 안아 들고 있던 아기를 불쑥 내밀었다. 언제 잠든 것인지 아기는 구린내를 풀풀 풍기면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웬 아기입니까?”

“오다 주웠소.”

“으음?”

녹수독인이 좀체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것도 주울 수가 있나?

하긴 세상이 워낙 험난하니 강호를 유랑하다 보면 이따금씩 버려진 아기들을 보는 경우가 있을 때도 있다.

“괜찮다면 당가에서 거두는 건 어떻소? 시종으로 들여도 좋을 듯하오만.”

“가주님께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사천당가는 시종들조차도 가세를 등에 업고 기세가 대단한 곳이었다. 젖먹이 아이가 당가의 시종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살곡에 거둬지는 것보다는 훨씬 인간다운 삶을 살게 되리라.

“그럼 어서 받으시오.”

“음…… 제가 받기엔 혹 아기가 다칠까 하여…… 아무래도 제가 독공을 익혔다 보니…… 허허허.”

“괜찮소. 포대기에 잘 싸인 아기니까. 뭣하면 장갑을 끼셔도 되고.”

“끄응. 그럼…….”

결국 녹수독인이 어정쩡한 자세로 아기를 안아 들었다.

* * *

당고륜은 뒷짐을 진 채 가주전 안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마침 총관이 근처를 지나다가 당고륜을 발견하고는 인사를 했다.

“가주님,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아닐세. 잠시 산책 중일세. 지금쯤 남궁가에서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당우덕 장로께서 직접 가셨으니 별 탈 없이 도착하실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남궁세가가 안전하게 오지 못할까 봐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남궁검이 어떤 자인가?

비록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강호에 그 위명을 떨치는 자다.

범인은 눈도 함부로 마주치기 힘든 자.

게다가 남궁천은 갓 떠오르는 신룡이 아니던가?

그런 이들에게 별문제야 있겠나?

다만 이 시점에 왜 남궁가에서 당가를 찾아오는 건지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이 엄중한 시국에 친히 가주와 소가주가 찾아온다는 것은 필시 보통 일이 아닐 터.

‘혹 지난번 칠대세가회에서 기분이 언짢았던 것인가?’

하나 당고륜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남궁검이 그런 사소한 일을 여태 마음에 담을 자가 아니다. 게다가 그런 이유라면 굳이 사천으로 찾아올 이유도 없을 테고.

“자네 생각에는 남궁 가주가 왜 본 가를 찾는 것으로 보이나?”

“글쎄요. 짧은 식견으로 감히 말씀을 드려보자면, 얼마 전 흑도인이 남궁세가를 친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지. 그 일도 참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저 역시 그렇습니다.”

남궁세가가 최근 떠오른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세력이 약한 가문이다.

한데 왜 하필 흑도인이 남궁세가를 친 것일까?

‘내가 모르는 일이 강호에서 은밀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일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남궁세가의 방문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준비는 충분히 해두었는가?”

“예, 손님들이 머무실 잠자리는 아침에 확인해 두었고, 연회에 올릴 술과 음식도 넉넉합니다.”

“수고했네. 먼 길을 왔을 테니 가볍게 인사를 나눈 후 편히 쉴 수 있도록 배려해 주게나.”

“물론입니다.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당고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주전으로 막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보고했다.

“가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요!”

“오, 벌써 도착한 모양이군. 가세.”

“예, 가주님.”

시종이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고 했지만 당고륜과 총관이 먼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내원을 지나 외원으로 들어서자 저만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거참, 사람들하고는. 저리 몰려들어서 맞이할 것까지야.’

당가를 찾은 손님에게 예를 갖추는 게 옳다지만, 조금 과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침내 당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손님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당고륜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뒤를 바짝 따라 붙어 오던 총관이 당고륜의 등에 부딪칠 뻔하다가 겨우 멈춰 섰다.

“가주님……?”

당고륜이 뭘 본 것인지 두 눈을 부릅뜨고는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긴 총관은 당고륜보다도 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 * *

“두 분을 본 가에서 맞이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가주님이 며칠 전부터 손님맞이 할 준비로 분주하셨답니다.”

녹수독인 당우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남궁검이 예의 그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을. 여튼 고맙소.”

“허허. 요즘 남궁세가가 다시 기운을 품고 떠오르는 중이지 않습니까? 참으로 잘된 일입니다.”

“하긴. 사천당가에서 보면 잘된 일일 수도 있겠구려. 본 가가 힘을 얻을수록 절강에 와 있는 모용세가를 견제하기도 좋을 테니.”

“허허허, 굳이 그런 이유보다도…….”

녹수독인이 식은땀을 훔쳐내며 애써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남궁천이 안쓰럽게 보며 내심 고개를 내둘렀다.

‘내가 이런 영감과 단둘이 마차를 타고 왔단 말이오. 얼마나 힘들었을지 아시겠소? 사회성이라곤 한 톨도 없는 영감이라니까. 젖먹이를 말 안 듣는다고 패려고 하질 않나.’

그래도 이렇게 어색함을 떠안을 사람이 한 명 생기니까 훨씬 마음이 편하긴 하다.

다만 녹수독인은 이 어색한 자리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무슨 말을 해도 돌덩이처럼 반응을 하니…… 거참.’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거란 표현이 딱이지 않은가?

천하에서 녹수독인을 이토록 곤혹스럽게 만들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래도 녹수독인이라는 별호를 들으면 만인이 두려움에 떨건만.

한데 이상하게 남궁검의 저 칼날 같은 시선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게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편안한 마음으로 창밖으로 지나가는 구름만 보았다.

얼마 만에 얻게 된 마음의 평화인지.

어른들끼리 있으니 자신처럼 어린 사람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

그렇게 모든 긴장이 풀린 채 이동하다 보니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마차가 속도를 줄이는 것 같아서 천천히 눈을 떠보니 어느새 번화한 사천의 성도로 들어선 후였다.

“자, 다 왔습니다. 두 분 내리시지요.”

녹수독인이 드디어 해방이라는 표정으로 얼른 마차에서 내렸다. 거의 뛰어내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날렵한 동작이었다.

남궁검과 남궁천도 마차에서 내리자, 녹수독인이 앞장서 걸으며 두 사람을 안내했다.

웅장한 정문으로 들어서니 광활한 장원이 드러났는데, 이따금씩 지나가는 이들이 이쪽을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과연 사천당가다. 장원 규모가 어마무시하군.’

남궁천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남궁세가도 지금 증축하고 있지만, 사천당가는 그보다 훨씬 더 넓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내원으로 들어갔고, 그러고도 좀 더 걸어서 가주전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뜻밖에도 거구의 무인 두 명이 녹수독인 앞을 막아서는 게 아닌가?

“장로님,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장로님.”

녹수독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두 무인을 둘러보며 날카롭게 일렀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네놈들은 오늘 손님이 찾아올 거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더냐? 이분들은 남궁세가에서 오신 손님들이다. 지금 가주님이 기다리고 계신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뭐라?”

녹수독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남궁천과 남궁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서로 눈길만 교환할 뿐이었다.

녹수독인이 미간을 푹 찡그리며 물었다.

“어째서 가주님이 그런 명을 내렸다는 것이냐?”

“저희도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지금 가주님은 먼저 찾아오신 손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먼저 찾아오신 손님?”

녹수독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먼저 찾아온 손님이라니?

그런 일정이 있었던가?

대체 누구기에 남궁가 사람들의 방문도 미룬단 말인가?

녹수독인이 이맛살을 찡그리며 물었다.

“대체 그 손님이 누구란 말이냐?”

다음 순간 무인들의 입에서 깜짝 놀랄 만한 대답이 떨어졌다.

“무림맹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가주님은 지금 맹주님과 담화 중이십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