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 이상한 낌새들
불명회주 흑선의 하루는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이른 아침 일어난 그는 공복에 운기행공을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다. 그리고 차를 한잔하면서 밤새 들어온 소식을 보고받는다.
보고는 대체로 서면이 아니라 구두로 이어진다. 최대한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는 이유다.
개중에서 특별히 기록해야 할 정보가 있다면 기록원에 따로 지시를 내리게 된다. 물론 그 기록도 암어로 구성되기 때문에 아무나 본다고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오늘도 그렇게 흑선은 귀한 용정차를 마시면서 새삼 격세지감을 느꼈다.
창밖으로는 후원의 작은 연못이 보였다.
이렇게 평화롭고 고품격 나날을 보내는 날이 올 줄이야.
그래도 한때 불명회 총관까지 올랐을 때는 잠시나마 꿈을 꾸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 항명죄로 좌천당한 후에는 꿈도 낙도 없었다. 그런데 추락하던 그 인생을 남궁천이 단숨에 끌어 올려 준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손을 내밀어 인생역전 시켜준 사람에게는 마음이 각별해지는 것이 인지상정.
‘주군께서는 잘 계실 테지?’
나이는 한참이나 어린데도 이상하게 남궁천을 대하면 노회한 강호 고수를 대하는 기분이다.
실제로 무공도 출중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무공보다 더 매섭고 단단한 느낌이랄까?
사내로 태어나서 평생 섬길 주군을 잘 만나는 것도 천복이라더니, 지금 흑선의 기분이 딱 그랬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는데, 늙은 총관이 무심하게 흘려낸 말에 순간 멈칫거렸다.
“잠깐.”
“예, 회주님.”
늙은 총관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꾸한다.
그는 원래 불명회의 시종장이었는데, 입이 무겁고 태도가 몹시나 신중한 자였다.
흑선보다도 오랫동안 불명회에 몸을 담고 있었던 자로, 흑선하고도 이미 각별한 사이로 지내던 터라 자연히 총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방금 소식 다시 말해주시오.”
“예, 합비 분타의 무인들이 맹의 부름을 받고 이동 중이라고 합니다.”
“합비 분타에서?”
“그렇습니다.”
“맹이 왜 그들을 부르는 것 같소?”
“아무래도 어수선한 시기니까 부르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차할 때 파견을 보내기 좋을 테고요.”
“흐음. 그게 자연스러운가?”
흑선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리자, 총관이 희미하게 웃으면서 대꾸했다.
“확실히 자연스럽지는 않지요.”
“역시. 총관 생각은 어떻소?”
“합비가 무한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이라고는 하나, 다른 곳은 일절 건드리지 않고 합비의 무인만 축출한 것이 이상하긴 합니다. 또 현재 하북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곧장 북쪽으로 파견하지 않고 굳이 맹으로 부른 것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지요.”
흑선이 총관의 의견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얼핏 들으면 황학루 사건도 있었던 만큼 그저 무력 보강을 위해 무인을 축출한 것으로만 보인다.
하지만 사태를 세세히 따져보면 분명 부자연스러움이 있다.
바로 이 간극에 진짜 정보가 숨어 있는 법이다.
한마디로 행간을 읽어야 한다.
불명회에 보고되는 몇 줄짜리 정보. 그 몇 줄 사이에 숨은 뜻이 알짜 정보가 된다.
합비라면 안휘의 성도다.
그리고 안휘에는 자신의 주군인 남궁천의 본 가, 남궁세가가 있다.
자신이 아는 한 남궁천은 무림맹과 암암리에 대립하고 있다.
남궁천이 불명회를 제일 먼저 장악한 것도 그런 이유다. 맹을 견제하기 위해서.
그런데 남궁세가와 밀접한 곳에서 맹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부자연스럽다.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무인이 없다는 건 그만큼 약해진다는 뜻. 그리고 사건이 발생해도 손을 쓰기 어려워진다.
어쩔 수 없이 행한 조치가 아니라 고의적인 상황이라면?
‘혹시 안휘성에서 뭔가 일어나길 바라는 건가?’
아직은 모른다.
섣부른 판단일지도.
우선은 있는 그대로 보고를 하는 수밖에.
판단은 주군이 알아서 내릴 몫이다.
“총관, 주군에게 전서를 보내야겠소. 최대한 빠른 녀석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총관이 허리를 숙여 대답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 * *
중원 각지에 널린 것이 바로 관제묘와 사당이다. 그리고 어디에나 나뒹구는 것이 바로 거지다.
호북과 안휘의 경계지라고 할 수 있는 황매현(黃梅县)의 외곽.
울창한 숲속 복판에는 사람도 찾지 않는 관제묘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두 눈 뜨고 봐주기 힘들 정도로 꼬질꼬질한 늙은이가 술병을 든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드르렁. 쿠울…….”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상거지는 천둥처럼 크게 코를 골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이따금씩 잠꼬대를 하는지 중얼거리기도 했다.
오죽하면 근처에 노닐던 사슴이 기겁을 하면서 달아날까?
그렇게 얼마나 잠을 잤을까?
누가 업어 가도 잠에서 깨지 않을 것 같던 상거지가 순간 거짓말처럼 눈을 부릅떴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 갑자기 보인 반응이었기에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상거지는 잠에서 깨기 위해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으! 죽이는군!”
소매로 입가를 훔친 상거지가 실눈을 뜨고는 눈알을 좌우로 굴렸다. 조금 전까지 비몽사몽으로 풀어 헤쳐진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언뜻 얇게 여민 안광에서 섬뜩함마저 전해진다.
다음 순간 그는 재빨리 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타앙!
순간 먼지가 풀썩 일어나면서 판자가 벌떡 젖혀졌다.
늙은 거지가 재빨리 판자 아래로 몸을 날리더니 이내 덮개를 쾅 닫아 버렸다.
마침 옆에 세워둔 짚단이 쓰러지면서 바닥을 가렸다.
그러고도 잠시 후.
관제묘 앞에서 노닐던 산새들이 어느 순간 후드득 날아오르자, 그 자리에 흑의인들이 하나둘 내려서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늦게 도착한 흑의인이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투덜거렸다.
“이게 무슨 시궁창 냄새야?”
“거지들이 굴러먹던 곳인가 봅니다.”
흑의인 하나가 관제묘를 힐끔거리고는 말하자, 투덜거린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관제묘 문을 발로 걷어찼다.
콰장!
순식간에 문짝이 떨어져 나가면서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하지만 이렇다 할 특징은 없었다.
여느 관제묘와 마찬가지.
대신 역한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크윽. 빌어먹을 거지 새끼들! 냄새 한 번 지독하군!”
사내의 투덜거림에 몇몇 흑의인들이 툴툴 웃음을 흘렸다.
“흑운대는?”
“아마 비슷한 시간에 맞춰 황산에 도착할 겁니다.”
“좋아, 가자. 절대 실수는 없어야 한다.”
“복명!”
흑의인들이 깍듯하게 대답한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관제묘 바닥에서 판자가 천천히 들썩이더니 이내 활짝 젖혀지면서 노인이 기어 나왔다.
그가 술병을 들고 나발을 불더니 한 차례 시원하게 트림을 뱉어냈다.
“꺼어어억! 크으으, 좋다.”
탄성을 흘린 그가 부서진 문짝을 힐끔거리고는 밖으로 걸어 나왔다. 달빛 아래 그의 허리춤 매듭이 보인다.
일곱 번을 묶은 매듭.
칠결개다.
강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그저 늙은 거지가 아니라 개방의 장로라는 것쯤은 쉽게 눈치챘으리라.
거지들로 구성된 개방은 허리띠의 매듭으로 그 신분을 구분한다.
그리고 눈썰미가 아주 좋은 강호인이라면 그가 바로 만취개(滿醉丐)라는 사실까지 알았으리라.
딸꾹질을 한 만취개가 동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황산이라. 황산주도 맛깔나긴 하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그가 옷깃을 잡고 끌어 올려 냄새를 킁킁 맡았다.
“개 같은 것들. 아무 냄새도 안 나는구먼!”
* * *
도에 담긴 뜻이라.
팽적호는 탁자 위에 올려둔 대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칼을 휘두르면서 그런 걸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그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팽적호는 너무나 어렸다.
도에 담긴 뜻이라니.
그런 걸 신경 쓰면서 도를 휘두를 겨를은 없었다.
얼떨결에 가주 자리에 올라서 가내에서도 숱한 견제와 시기를 받으며 지냈다.
친인척들 중에서는 가주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만큼 아버지의 죽음은 뜻밖이었고 갑작스러웠다.
그런 와중에 도에 뜻을 담을 정신이 어디에 있을까?
그저 살기 위해서 칼을 뽑았고, 적을 베기 위해서 칼을 휘둘렀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하북팽가는 실전 위주의 가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아들이 그게 틀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몸소 보여주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겸허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확실히 남궁천은 대단했다.
아들뻘의 상대를 앞에 두고 경외감을 느낀 건 난생처음이었다.
“도에 뜻을 담는 건 어려운 일이죠. 그러니 그 전에 무공의 뜻부터 파악해 보세요. 혼원벽력신공의 오의와 혼원벽력도가 이루고자 하는 바를 생각해야 해요.”
남궁천이 해준 말이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하나 그것이 팽적호의 마음에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하북팽가가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간 혁이의 무공이 왜 그리 비약적으로 발전했나 싶었더니…….’
이제야 이해가 된다.
“남궁천. 너는 어쩌면 내 생각보다도 훨씬 큰 인물이구나.”
“뭐라고요?”
순간 들린 목소리에 팽적호가 경기를 일으키며 펄떡 일어났다.
“뭐, 뭐냐? 언제 온 것이냐?”
“지금 왔죠.”
남궁천이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들어온다.
팽적호가 탁자에 올려둔 대도를 힐끔 보고는 슬쩍 그 앞을 막으면서 물었다.
“무슨 용무로?”
“우리 사이에 용무는 무슨.”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인데!
비무 이후로 부쩍 살가운 척하는 남궁천이다.
하나 팽적호도 싫지만은 않은지 딱히 반박을 하진 않았다.
대신 남궁천이 뒤로 돌아가려고 하기에 얼른 앞을 막아섰다.
‘이놈 말을 듣고 무공 공부 중이었다는 걸 들켜서 좋을 게 없지.’
하지만 남궁천은 잽싸게 탁자로 돌아가 앉으면서 탄성을 터뜨렸다.
“오호, 대도를 척 놔두고 열심히 공부 중이셨나 봅니다. 제가 혹시 방해라도?”
“그런 것 아니다.”
“에이, 맞으면서. 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답니다.”
빠직.
확실히 묘하게 사람 신경을 건드리는 녀석이다.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에이, 제가 왜요? 세상 사람들이 전부 하북팽가가 돌대가리라고 해도 저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습니다.”
방금 말한 것 같은데?
“게다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북팽가를 고집불통에 목소리만 더럽게 크다고 손가락질해도 저는 그걸 신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째 헷갈린다.
놀리는 건지 아닌지.
“그러니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뭘?”
“제가 없어도 언가장을 잘 지켜주세요.”
“곧 죽을 사람처럼 말하는군.”
“죽진 않겠지만 떠날 수는 있으니까요.”
팽적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남궁천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아직은 어림짐작일 뿐이지만, 본 가에 다녀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황산 말이더냐?”
“예. 묘한 전서를 받아서요.”
남궁천이 생각에 잠긴 채 대꾸했다.
전서는 불명회주 흑선이 보낸 것이었다.
암어로 되어 있었지만, 그 내용은 확실히 해독할 수 있었다.
-무림맹, 안휘성 합비 분타 무인 대거 차출. 타지 이상 무.
‘다른 지역을 가만히 놔두고 하필 안휘성에서만 무인을 차출했단 말이지.’
그렇게 되면 안휘는 텅 빈 곳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남궁세가가 존재하긴 한다.
하나 지금의 남궁세가를 믿고 분타를 비울 리는 없을 터.
더구나…….
‘그 맹주 영감탱이가 하는 일이라면 절대 좋은 뜻은 없을 테니까!’
남궁천의 표정이 사뭇 진중해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팽수혁이 헐레벌떡 달려와 소리쳤다.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